• 사회주의 재발명의 길,
    단절과 재구성에서 시작
    [책]「사회주의 재발명: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악셀 호네트/사월의책)
        2016년 10월 25일 12: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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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셀 호네트는 내게는 반가운 이름이다. 대학 다닐 적에 그의 책 [인정투쟁: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문성훈, 이현재 옮김, 동녘, 1996. 개정판은 사월의 책, 2011)을 인상 깊게 읽어서다. 그 무렵 위르겐 하버마스가 방한해 사뭇 떠들썩했는데, 하버마스의 책은 흥미롭기는 했지만 늘 딱딱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하버마스의 제자로 프랑크푸르트학파 제3세대라 분류되는 호네트는 좀 달랐다. 그 역시 스승처럼 자신의 저서에서 철학과 사회과학을 넘나들며 독일 학자 특유의 긴 개념어들을 남발했다. 하지만 그의 사변 속에는 사회 현실과 실천이 하버마스에 비해 훨씬 더 긴장감 있게 살아 있었다. 상호주체성을 소통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과 의지의 차원에서도 탐색하는 점 역시 감동 깊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악셀 호네트 선집’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저작들이 사월의책 출판사에서 출간되기 시작하더니 그 세 번째 책으로 최근 [사회주의 재발명: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2016)가 나왔다. ‘사회주의’를 앞에 내세운 데다 그것도 ‘재발명’한다? 좌파 성향 독자라면 한 번쯤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자극적인 제목이다. 더구나 저자가 호네트다. 마르크스주의의 변형에서 출발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오랜 여정이 이 혼돈의 시대에 어떤 대안의 실마리를 던져줄지 잔뜩 기대를 품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호네트 선집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언론 서평란 등에서 상당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악셀호네트

    나 역시 기대에 부풀어 국역본이 나오자마자 한달음에 읽었다. 독서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호네트는 사회주의를 다룬 책에서 으레 기대할만한 내용들, 가령 소유나 계급 문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의 핵심이자 목표로 생각됐던 이런 쟁점들이 실은 더 근본적인 이념의 실현을 위한 수단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수단’들이 ‘목표’로 오인돼왔다. 호네트는 책 첫머리부터 단숨에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로 직행한다. 이 책의 독일어판 제목이 ‘사회주의 이념’인 이유다.

    호네트가 제시하는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는 ‘사회적 자유’다. 출발점은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 ‘자유, 평등, 우애’다. 대혁명의 즉각적 승자인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은 철저히 원자론적 인간관에 따라 자유의 유권 해석을 내렸다. 이들에게 자유란 개인이 저마다 능력껏 경쟁해서 얻은 성과만큼 보상을 누릴 권리였다. 이는 지금껏 통용되는, 특히 신자유주의 시기에 더욱 굳어진 다수설이다. 한데 이런 자유 관념은 대혁명 구호의 다른 두 항과 긴장, 모순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경쟁에서 성과를 거두는 만큼 다른 누군가는 바로 그 때문에 고통을 받거나 뒤쳐졌다. 자유는 불평등을 낳았고 우애는 설 땅을 잃었다. 우리가 사는 근대 자본주의 시공간 안에서 이는 여전히 미해결의 난제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이런 자유에 맞서 평등을 고취하려 한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궁극의 지향은 자유였다. 다만 이들은 자유를 자유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규정했다. 이들이 보기에 자유의 다수설이 전제하는 원자론적 개인주의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의 진실과도 부합하지 않았다. 혼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다. 단순히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현실의 확인 때문이 아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내 자유는 남의 자유를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 나의 성취란 것도 타인의 인정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성취를 따지기 이전에 나의 존재 자체가 타인과의 수많은 관계를 통해 구축된 것이다. 호네트가 자주 쓰는 개념어에 따르면, ‘상호인정’의 드라마다. 상호인정의 관계망 속에서 개인을 바라본다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와 갈라지는 근본 지점이다.

    그래서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함께’ 누리는 자유, 더 나아가 ‘서로를 위하는’ 자유를 궁극 목표로 제시했다. 이를 지칭하려고 고안된 말들이 ‘연대’, ‘연합’, ‘코뮌’ 등이다. 호네트는 이를 ‘사회적 자유’라 번안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를 이렇게 다시 정의함으로써 자유와 평등, 우애 사이의 모순과 대립을 일거에 해결하려 했다. ‘서로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첫째 규범이 되는 사회에서 자유, 평등, 우애란 어쩌면 같은 말의 반복이다. 이런 상태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농촌 공동체들의 잔해 위에 등장한 근대 사회는 진정으로 ‘사회’가 된다. 사회주의란 이런 사회적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 이념-운동이다.

    나는 [사회주의 재발명]의 제1장 “시원적 사회주의 이념: 프랑스 대혁명을 사회적 자유로 고양시킴”에서 전개되는 이런 논의가 우리 시대의 대안을 찾기 위해 반드시 한 번은 거쳐야 할 필수 작업이라 본다. 오랜 세월 동안 ‘사회’주의는 ‘국가’주의를 뜻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로부터 떠올리는 이미지는 혁명 광장의 군대 사열이나 현기증 나는 매스 게임이다. 또한 사회주의는 이 이념의 주된 지지층이었던 남성 육체 노동자의 정체성이나 문화와 동일시되곤 했다. 즉, ‘사회’주의는 ‘노동자’주의이기도 했다. 이 모든 역사적 더께들이 이제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이후’의 지향점으로 인정받는 데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호네트는 이 짐들에 가려진 애초의 빛을 되살려내려 한다. 왜냐하면 되살릴 값어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교조적 자유주의의 복고 운동이 인간 세상을 막다른 골목에 내모는 지금이야말로 이 불꽃이 다시 찬란히 타올라야 할 때이다. 그래서 호네트는, 에릭 올린 라이트가 ‘사회 중심 사회주의’라는 번잡한 동어반복으로 환기시키려 하는 것처럼(E. O. 라이트, [리얼 유토피아: 좋은 사회를 향한 진지한 대화], 권화현 옮김, 들녘, 2012), ‘사회주의’의 그 ‘사회’를 재음미함으로써 불씨를 살려내려 한다.

    이미 자신의 학문 여정 전반을 통해 상호주체성 이념(달리 말하면, 관계론적 인간관)을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대 사회의 가치들(사랑, 권리, 연대)을 다시 바라보려 한 호네트이기에 그의 이런 논의는 결코 새삼스럽지 않다. 필생의 탐구와 대안 이념의 갈구가 맞물린 탓에 우리에게 더욱 믿음직하게 다가온다.

    2.

    그러나 이 책에 품은 기대가 실망으로, 아니 분노로 바뀐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다. 호네트는 단지 과거 사회주의의 주요 목표들, 가령 생산수단의 국유화,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을 수단의 지위로 격하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들 대부분이 낡고 거추장스러운 과거의 유물이라며 폐기한다. 과거 사회주의 교과서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내용들은 이 책에서는 오히려 부정과 극복의 대상이다. 제목에 혹해 책을 손에 든 독자들 중에는 “이게 무슨 ‘사회주의 재발명’이냐 ‘해체’지” 하며 반감을 품을 이들도 꽤 될 법하다.

    과거 사회주의의 기둥 구실을 하던 가정들 중에서 호네트는 특히 다음 세 가지를 논파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경제 영역이 중심 영역이며 적절한 자유 형태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는 유일한 곳이라는 것, 경제 영역에 이미 존재하는 대항 세력과 반성적 차원에서 연계되어야 한다는 것, 끝으로 현존하는 저항운동의 필연적 승리를 역사철학적으로 예견하는 것”([사회주의 재발명], 77쪽)이다. 도식적으로 정리하면, 경제중심론과 노동계급중심론 그리고 역사법칙론이다.

    호네트는 이들이 하나같이 산업화 초기의 정세와 인식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이며 이후 사회주의 이념-운동의 발전을 제약하거나 왜곡한 요인이라고 진단한다. 가령 사회주의 운동은 경제중심론 때문에 보통선거제도나 다당제 같은 대의민주주의의 독자적 의의를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노동계급중심론은 노동운동 말고도 사회적 자유의 실현을 간절히 바라는 또 다른 대중운동(예컨대 여성운동 등)이 등장할 때마다 사회주의가 이들의 언어로 정착되는 데 장애물 노릇을 했다. 마지막으로 역사법칙론은 사회주의의 상상력을 이미 정해진 몇 가지 답안 안에 가둬 놓았다. 중앙집권형 계획경제,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이 불변의 정답으로 여겨진 탓에 이들 공식을 거스르는 탈자본주의 실험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내가 [사회주의 재발명]을 읽으며 만족감을 느낀 것은 호네트의 이런 비판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실은 그가 이 책에서 전개한 이런 해체 작업은 내가 사회주의의 짤막한 입문서([사회주의], 책세상, 2013)를 쓰며 어눌하게나마 시도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초기 사회주의의 다양했던 생태계(마르크스, 엥겔스도 그 일부였던)를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평정하면서 세 가지 도식이 자리 잡았다고 보았다. 첫째 생산력 발전과 역사 진보가 동일시됐고, 둘째 노동계급이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혁명의 담지자가 됐으며, 셋째 국가권력 장악이 사회 혁명의 관건적 과제가 됐다. 호네트가 비판하는 세 가지 가정과는 겹치기도 하고 차이가 있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이들 도식이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성공에 밑바탕이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한 한계와 오류의 진원이 됐다고 본다. 생산력 중심의 역사발전관을 통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성장주의로 나아갔다. 국가를 사회 변혁의 중요한 무대로 삼았던 역사적 실천은 어느덧 ‘국가’가 ‘사회’를 대신하는 국가주의로 굳어졌다. 노동계급의 집단 행동을 사회 변혁 과정과 동일시한 결과는 현실 노동운동의 경제주의, 조합주의를 정당화하거나 그 한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과거 사회주의의 구성 요소들은 철저한 해체 작업을 거쳐야 한다. 해체 대상을 어떻게 정리할지와는 별개로 호네트는 [사회주의 재발명]에서 바로 이 작업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수행하고 있다.

    물론 해체는 동전의 한 쪽 면일 뿐이다. 동시에 재구성이 시도돼야 한다. 졸저 [사회주의]에서 나는 성장주의는 생태적 성찰을 통해 ‘좋은 삶’을 다시 사고하려는 노력으로, 국가주의는 사회가 자발적 결사체들을 통해 직접 변화의 주역이 되는 전망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한편 전통적인 노동계급관에 대한 반성으로는 광범한 민중 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윤리적 결단을 강조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구상에 주목했다. 호네트의 경우는 그럼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는가?

    우선 경제중심론에 맞선 호네트의 대안은 사회주의를 사회 안의 다양하게 분화된 영역들에서 그에 맞게 민주적 생활양식을 확대하려는 노력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들 영역을 조정해 사회 전체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통합하는 중심 영역은 있어야 한다. 다만 이는 더 이상 경제 영역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구분에 따르면 정치 영역과 많이 겹치는 공론장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런 호네트의 구상은 민주주의를 확대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구체적 정세에 따라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해 특정하게 접합하는 과정으로서 좌파 정치를 재정식화하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논의(E. 라클라우 ‧ C.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와 닮은 구석이 많다.

    다음으로 목적론적 역사관 대신 호네트가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 실험주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역사 속에서 극복해야 할 게 무엇인지는 분명하지만 그러한 극복 과정을 통해 도달할 상황이 무엇인지는 예정돼 있지 않으며 알 수도 없다. 사회적 자유의 실현이라는 유일한 상위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실험을 펼치는 길밖에 없다. 사회적 자유라는 목표가 분명하므로 이는 목적 없는 과정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자유 실현의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역사의 매 순간 새로운 실험을 추진하고 평가하며 다시 추진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호네트가 헤겔 철학을 독특하게 해석한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실은 지난 세기에 이미 프래그머티즘의 영향 아래 호네트와 비슷한 논의를 전개한 인물이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이론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다. 그는 100% 자본주의를 100% 사회주의로 뒤집는다는 유토피아적 사고를 거부했다. 동시에 그는 부분적 개혁을 넘어서 사회 전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총체적 개혁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구상에 그는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였다(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책세상, 2011).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와 호네트의 역사적 실험주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둘 모두 헤겔-마르크스적 역사관의 프래그머티즘적 변형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것은 노동계급중심론을 대체할 대안이다. 이 쟁점에 대해 호네트는 위의 논의들보다 훨씬 더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주장을 내놓는다. 그는 단지 전통적인 노동계급이 사회 변혁의 유일한 주체임을 부정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아예 그런 특정한 주체를 식별하려는 시도 자체를 부정한다. 신사회운동이든 비정규직이든 어떤 사회운동이나 세력도 사회주의의 새로운 담지자임을 내세울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특정한 사회운동과 일체화하려는 오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근대사 속에서 사회운동은 끊임없이 주인공을 달리 하며 명멸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회주의의 주인공은 이제 그런 사회운동들이 아니라 이 운동들에 참여하기도 하고 반응하기도 하면서 이들 운동이 남긴 역사적 성과들을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살아 있는 전통으로 받아들이는 시민 모두가 돼야 한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따로 없는 사회주의.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 재발명]에서 기성 좌파 이론에 익숙한 독자들이 가장 당혹감을 느낄 대목이 아닐까.

    악셀 호네트

    악셀 호네트(사진=사월의책)

    3.

    노동계급중심론에 대한 호네트의 대안이 낯설게 보일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실은 요즘 사회운동에서 흔히 듣는 구호에 이미 이런 시각이 담겨 있다. ‘1% 대 99%’ 말이다. ‘99%’를 호명하는 것이 호네트처럼 시민 대다수를 변혁 주체로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회주의 재발명]은 단지 이런 시대정신을 보다 논리적으로 정리했을 뿐이다.

    그러나 호네트의 다른 주장들과는 달리 이 대목에서는 마냥 박수만 칠 수만은 없겠다. 특정 사회운동이나 세력만을 변혁 주체로 특정할 수는 없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치자. ‘99%’를 위한 세상을 외치면서 우리 자신 이 주장을 무의식적으로 수긍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 이념-운동에서 늘 중요하게 다뤄왔던 계급 혹은 계급투쟁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99%’는 그렇다 치더라도 ‘1%’의 문제가 남아 있다.

    ‘1%’와 나머지 사이에는 분명 깊은 강이 흐른다. 계급투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대립이 현존한다. 계급투쟁은 여전히 작동한다. 노동계급의 경계가 모호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본이 여전히 권력의 독점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변혁의 주체는 특정하지 않더라도 변혁의 대상은 특정해야만 한다. 호네트가 정리하는 대로 “경제 영역에서 타율과 노동소외의 극복”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 관계와 민주주의적 의사형성이라는 두 가지 다른 영역 내에서도 강제, 간섭, 강요를 극복”하려면([사회주의 재발명], 162쪽), 항상 자본이 정점에 있는 권력 관계를 역전시키고 해체해야만 한다. 지구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은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 걸쳐 지배 체제를 단단하게 잇는 중심 세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사회주의와 ‘재발명된’ 사회주의 사이에는 호네트가 정리한 깊은 단절의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속의 측면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더 이상 생산수단 국유화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지만, 자본의 구조적 권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기 위해 어떤 제도적 조치가 필요한지는 앞으로도 사회주의 실험들의 주된 고민이 될 것이다. 개혁과 혁명을 둘러싼 고민도 재구성이 필요할지언정(가령 민주적 생활양식을 지탱 ‧ 확산시킬 대중 역량의 ‘진화’와 기존 계급 권력 관계의 ‘돌이킬 수 없는 역전’이라는 식으로) 계속 사회주의 운동의 현안으로 남을 것이다.

    말하자면 호네트의 저작은 사회주의가 아직 풀지 못한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해주지는 못하며 이들 난제가 모두 시효를 상실했음을 증명하지도 못한다. 정치, 경제, 문화, 각 영역의 쟁점들에 대해 ‘재발명된’ 사회주의의 해법을 담은 책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붙은 ‘사회주의 재발명’이라는 제목은 독자를 현혹시키는 과장일 뿐일까? 제목에 부합할 정도의 내용은 아니라고 평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사회주의 재발명]이 남긴 한 가지 성취만큼은 널리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사회주의 이념-운동이 앞으로 오래 된 혹은 새로운 문제들에 봉착할 때마다 어떤 방향에서 해답을 찾아 나아가야 하는지 명확히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자유’를 향한 인류의 여정을 이어가는 일이다. “사회주의 재발명”으로는 아직 시작 단계라 하더라도 한국어판의 부제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의 답은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필자소개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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