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투사와 새로운 당
    [필리핀 좌파운동] '토니 카발도'
        2016년 07월 07일 11: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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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5장 투사 열전

    토니 카발도 :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삶

    동지 토니는 1993년 CPP로부터 분열을 선언한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와 뜻을 같이 하기로 했을 당시 신인민군(NPA)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이후 그는 1993년에서 1996년까지 마닐라·리잘 위원회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1996년에 간장암을 진단받아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1997년 1월에 토니가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호주에 있었다. 나는 철야 추도회와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마닐라로 돌아와 소중한 동지에 대한 애도를 미망인 루미아와 아들 안소니에게 전했다.

    철야 추도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상념을 담아 토니의 관을 어루만졌다. 그 중 격하게 울부짖는 한 여성에게 눈길이 갔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관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필리핀 공산당 분열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 살해된 한 신인민군 게릴라의 부인이었다(나는 예전에 마닐라에서 토니한테서 그 동지를 소개받았는데, 그가 신인민군에 있다가 당이 분열할 때 CPP를 탈당했다고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그날 밤, 남편과 함께 자고 있는데 무장한 괴한들이 난입해 남편을 바깥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마당에서 남편에게 총을 쏜 후 달아났다. 토니는 남편의 장례를 도와주고 매장을 끝낸 후, 그녀에게 중고 미싱을 사주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자수를 놓은 중고 옷가지들을 만들어 팔아 그녀와 아이들의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토니는 누구로부터도 사랑받는 동지였다. 곤란에 처했을 때,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에피소드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나는 이따금 토니를 하늘에 빛나는 섬광으로 비유했다(토니가 죽었을 때, 그에게 바친 나의 시의 서두가 그것이었다). 밤하늘에 꼬리를 끌며 흐르는 유성의 광채에 비유한 것으로, 나쁜 의미〔유성은 흉조로 알려져 있다〕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눈에 언제까지나 감동의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빛이다. 토니는 우리들 삶의 여러 장면에 등장해 설령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감동시켰다.

    토니는 칼루칸 출신의 활동가였다. 「1/4분기의 폭풍」 때에는 페어티 대학의 학생 리더였고 그의 가족은 그 대학 구내에서 작은 가게를 하고 있었다. 바로 최근에 「1/4분기의 폭풍」을 그린 피트 라카바의 책(『불온의 나날, 분노의 밤』)속에 캡션이 없는 한 장의 집회 사진이 있었다. 놀랍게도 마닐라의 시위 장면이 실린 그 사진에 젊은 날의 토니가 찍혀 있었다.

    토니는 우리 형 오스카와 동기생으로, 「1/4분기의 폭풍」 무렵, 우리 집에 와서 형 오스카와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는 대단히 호감을 주는 인상으로, 우리 부모님들과 근처에 사는 친척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른 저 청년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토니는 계엄령이 포고되자 마닐라를 빠져나와 사마르 섬의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사마르섬 최초의 신인민군 게릴라 부대를 창설했다. 나는 그가 얘기해주곤 했던 사마르 섬에서의 경험담을 떠올렸다. 지역의 신인민군 신참 병사가 군의 트럭을 포획했지만 그 트럭을 어떻게 태워야 하는지를 몰라 몇 시간이나 트럭 밑에서 장작불을 붙이고 있었다는 얘기, 또 산골이다 보니 생전 처음 샴푸를 본 지역의 신인민군 병사가 토니의 부인 루미아가 보내준 샴푸를 그들의 옷을 세탁하는 세제로 썼다는 얘기도 있었다.

    1977년 초에 토니는 다시 칼루칸으로 돌아와 내가 이끌고 있던 지하조직에 합류했다. 그때 그는 사마르 섬에서의 활동을 잠시 접고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돌보기 위해 부인 루미아와 함께 루미아의 친정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갓난아기 안소니에게는 정기적으로 우유를 먹여야 했다. 나는 토니와 함께 칼루칸에 있는 지지자 집들을 방문해 아기에게 먹일 분유를 정기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부탁하러 갔던 것을 기억한다.

    어항(漁港)노동자의 조직화

    나보타스의 어항이 있는 노스베이 대로에서 우리가 조직하고 있던 어항노동자 밀집지역을 군이 급습했다. 생선 운반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이 지역에서 공공연하게 전투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팔을 칼로 베어 그 흘러나온 피로 청원서에 서명하는 “산도그랑”〔타갈로그어로 「협정」의 의미〕이라는 피의 의식을 행했다.

    그 청원서는 어항 내에서 정부나 자본가에 의한 탄압이나 교섭권의 부정에 대한 노동조합의 항의를 담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몇 개월 동안 군 첩보부대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지도부 몇 명이 체포되어 파괴활동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남은 지도부, 특히 지역의 당 지부 멤버를 잠시 도피시키기 위해 그들을 소집했다. 토니와 나는 불라칸의 미카와양에 그들을 위한 집을 빌렸다.

    이들 운송노동자 그룹은 당 생활은 처음이어서 규율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지하 아지트를 빠져나와 지역을 배회하는 경우도 있었다. 토니와 나는 그것을 알고 회의를 소집해 그들에게 부과할 징벌에 대해 논의했다. 나는 위반자에 대해서는 당권을 정지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토니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당권 정지는 신참 당원에게 좋지 않은 이력을 남기게 되므로 “경고” 정도로 괜찮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결국 내가 물러섰다. 결과적으로 토니가 옳았고 나는 그의 현명함을 인정했다. 토니의 제안대로 그들은 더 이상 나돌아 다니지 않게 되었고 규율도 향상되었던 것이다.

    1977년 중반 무렵 토니는 사마르 섬으로 돌아갔다. 나는 얼마 동안 그와 만나지 못했다.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는 국회의원 선거를 둘러싼 논쟁의 와중에 해산되었고, 나는 1979년에 에드가 좁슨이 이끄는 마닐라·리잘 임시위원회의 지시로 사마르 섬에서 개최된 당 기초강좌를 마무리하기 위한 지역 합동회의에 파견됐다.

    마닐라에서 사마르 섬 북부의 마을 알렌 시까지 15시간의 긴 버스 여행이었다. 거기서 다시 강을 건너 서(西)사마르 산지까지 거의 3일간을 걸었다. 그 길은 지름길을 피해 멀리 우회하는 길이었는데, 그곳 동지들에 의하면 지름길에서는 군의 군사작전이 자주 행해지고 있다고 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신선하고 기분 좋은 여정이었다. 현지의 동지들이나 마을 혁명위원회 멤버, 지역의 공산당원, 인접한 게릴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많은 신인민군 병사들과 만났다.

    내가 걸어 간 길은 1993년 분열 때 「거부파」의 리더가 된 공산당 지도부의 한 사람인 릭크 레이에스가 걸었던 길과 같은 길이었다. 지역 사람들은 산길을 걷는 도중 몇 번씩이나 넘어져 땅바닥을 구르곤 했던 키가 큰 남자(릭크의 신장은 180센티 이상이었다)얘기를 해주었다. 나 역시 몇 번이나 비틀거리곤 했는데, 지역 동지들 말로는 그래도 나는 비교적 잘 걷는 편이라고 했다.

    내가 겨우 캠프에 도착했을 때 회의는 이미 끝나버렸고, 릭크 레이에스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대부분 떠나고 없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은 당의 동(東) 비자야 지역 캡인 티암손 부부였다. 그들은 나에게 회의의 내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나는 헤어지면서 사마르 지구에 있는 두 사람의 동지에게 편지를 전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한 통은 내가 계엄령 초기에 입당시킨 나보타스의 산 라파엘 촌 출신의 노동자 활동가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한 통의 편지는 바로 토니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토니에게 보낸 편지에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의 해체와 포포이 동지의 누에바 에싯쟈행에 대해 알려주고, 내 새로운 배속 지역으로 사마르 섬을 택해도 좋은가를 물었다. 두 통의 편지는 티암손 부부에게 건네졌다. 나중에 토니는 동 비자야 지역위원회가 개봉했다는 기묘한 메모가 붙은 편지를 받았는데, 그래서 그는 내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0년, 나는 마닐라에서 토니를 다시 우연히 만났다. 그는 포포이 동지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포포이는 첫 부인인 살리의 사후 산간지역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이때는 단기휴가 중이었다. 포포이는 이 즈음 에드가 좁슨의 동생과 사귀고 있었다. 좁슨은 사실 포포이에게는 “정적”과 같은 사이로, 1979년의 중앙당과의 논쟁 끝에 징계를 받은 포포이를 대신해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의 새로운 위원장이 된 것이 에드가 좁슨이었다. 토니는 이들 두 사람과 다 친했기 때문에, 세 명은 포포이의 집과 우리 집에 함께 머물면서 서로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곤 했다. 당시 토니는 신인민군 총사령부에 있었고, 로물로 킨타날〔신인민군의 전 총사령관이었으나 2003년 케손시에서 암살되었다〕 다음 가는 실세였다.

    다시 또 오랫동안 토니와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1989년에 나는 토니가 마닐라에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은 4월경이었는데, 그 무렵 미 통합군사고문단(JUS-MAG)의 단장으로 CIA 멤버인 제임스 로우 대령을 태운 차가 고문단 건물을 나와 토마스 모랏로(路)의 커브길을 돌아 나오는 순간 총격을 받았다. 신인민군이 살해를 인정했지만, 군 당국은 엉뚱하게 마닐라수도권 대중조직의 무고한 사람들을 체포했다. 그 중 한 명은 지금도 옥중에 있다.

    그해 후반에 나는 국제활동에 배속되어 네덜란드로 가서 쿠바에서의 임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임무는 쿠바에 가서 민족민주전선의 쿠바 지국 설치를 지원하고, 하바나에 사무소를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정당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유럽 공산주의국가의 붕괴로 인해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나는 한동안 조직적으로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호세 마리아 시손이 근거지로 삼고 있던 네덜란드 유틀레히트의 민족민주전선 사무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토니가 네덜란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는 그와 만나지 못했지만, 한 네덜란드인 부부가 스위스 은행에서 100만 달러를 예금하려다 스위스에서 체포됐다는 소문이 날라 들어왔다. 그 부부에게 돈가방을 넘겨준 것이 토니였다. 그런데 도중에 어디에선가 가방 안의 돈이 위조지폐로 바뀌어졌고, 스위스 은행이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네덜란드인 부부는 체포되었고 돈은 압수됐다. 미국으로부터 위조지폐 대책팀이 날아왔다. 당연하게도 시손은 이 사태에 대해 극렬하게 분노했다. 이 작전을 신인민군 총사령부의 작품으로 보고 토니와 롤리〔당시 신인민군 총사령관〕 두 사람을 비난했다. 시손은 이 실패를 “고의로 비소를 타 넣은 밀크”와 같다고 질타했다.

    이 사건 후, 나는 1990년에 마닐라에 돌아와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에 복귀했다. 나는 시손과 롤리 킨타날, 즉 필리핀 공산당 의장과 신인민군 총사령관 사이의 불화가 이미 화해 불가능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1991년에 그 대립은 절정에 달했고, 그로부터 2년 후 필리핀 공산당은 분열에 이르게 되었다.

    시손 최근

    2016년의 호세 마리아 시손(출처=http://josemariasison.org)

    1993년의 CPP 분열

    1991년, 호세 마리아 시손은 『우리의 기본 원칙의 재확인과 오류의 시정』이라는 논문을 집필했다. 이 문서는 “제 2차 정풍운동”을 제안했다. 이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 공산당과 신인민군의 급속한 쇠퇴를 초래한 “무장봉기주의”나 “신인민군의 정규군화” 노선을 내건 주모자들을 당으로부터 축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8년에 시손은 당의 청년 리더들과 함께 구 필리핀 공산당 PKP로부터 떨어져 나와 맑스·레닌·마오주의 이데올로기 아래 새로운 공산당 CPP를 창설했는데 이들이 당시 주장한 것이 당의 “정풍”이었다. 시손을 그것을 상기시켜 금번 사태를 “제2차 정풍운동”으로 규정했다. 1968년의 “제1차 정풍운동”에 연결시키려고 한 것이다.

    시손은 무장봉기주의와 신인민군의 정규군화의 오류의 책임이 신인민군 총사령관 킨타날과 신인민군 지도부에 있다고 규정했고, 제2차 정풍운동은 그들을 제거하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시손의 격노는 킨타날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와 당 중앙지도부와의 의견차를 좁히기 위해 시손과 포포이의 전화 회담을 주선했을 때, 시손은 포포이에게 “당의 오류에 책임이 있는 킨타날과 중앙위원회 멤버를 옹호하지 않는다면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포포이는 킨타날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신인민군 총사령부에 대해 당의 유능한 지도자들을 숙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와 여타 당 조직과 협력할 것을 호소했다.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는 당 지도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첫 번째 조직이었다. 그 때문에 임박한 숙청으로부터 면할 수가 있었다. 제2차 정풍운동을 거부한 당내 그룹을 하나로 모으려 한 시도는 초기 단계에서 실패했다. 최종적으로 신인민군 총사령부 중에서 마닐라·리잘 위원회에 가세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은 토니뿐이었다. 그는 1993년부터 1996년 간장암으로 진단받기까지 마닐라·리잘 위원회 지도부의 멤버였다.

    1996년 5월, 토니와 부인 루미아는 나와 내 파트너 레이하나와 함께 간장의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출발 직전에 토니는 집에 있던 6개의 필리핀 여권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명이었지만 모두 다 진짜 같았다.

    1990년 4월에 토니가 홍콩으로부터 귀국했을 때, 토니는 부인 루미아와 함께 마닐라 국제공항(현재는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서 체포됐다. TV에는 그가 공항에서 체포되어 연행되는 장면이 방송되었고, 리포터는 그가 신인민군(NPA)의 부사령관으로 국제 테러 작전의 혐의로 체포됐다고 전했다. 그 작전은 무기 구입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위조지폐의 세탁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토니는 증거불충분으로 몇 주 후에 석방됐다. 토니의 여러 개의 여권을 보고서야 나는 겨우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에 와서 토니는 루미아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했고, 레이하나와 나는 토니의 치료를 위한 지원과 도움을 얻어내기 위해 우호적인 여러 단체를 찾아다녔다.

    잔존하는 낡은 당규칙

    우리가 마닐라에 돌아왔을 때, 나는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가 나와 레이하나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도부가 보낸 전령이 레이하나에게 내 전처와의 상황을 고려해 마닐라를 떠나도록 요구했다. 당은 나의 이혼을 인정할 수 없고 마닐라에 머물면서 나와 레이하나가 우리의 관계를 “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때문에 무기한 활동정지처분을 받았다.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는 필리핀 공산당을 탈당했지만, 케케묵은 낡은 규칙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당시 다른 몇 쌍의 톱 리더가 은밀히 유지하고 있던 “금지된” 관계를 생각한다면 남녀 관계에 대한 당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억압적이고 또 위선적이라고 내 파트너와 나는 생각했다. 나와 레이하나 사이는 오픈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징계 조치를 당해야 했고 레이하나는 마닐라를 떠나도록 요구받았다. 이 문제에 대한 동지들과의 토론과 논쟁 중에 “불륜, 부정이란 게 도대체 뭔가?” “남녀관계에 있어 약한 여성의 입장” 등 많은 문제가 도출되었다. 남녀 관계에 관한 당의 규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여성문제”, 즉 여성과 페미니즘에 관한 당의 입장,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들 문제에 관련하는 당의 실천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비판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험악한 상황에서조차도 우리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해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를 격려하고 지지하고 또 도와준 것이 토니였다. 그 자신도 당의 방침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이 때 그는 이미 당을 떠나 건강의 회복에 주력하고 있었다. 1996년 9월, 레이하나와 나는 마닐라를 영원히 떠나 호주에서 함께 살 것을 결정했다. 호주에 있는 동안 현지의 혁명정당에 가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3개월 후, 토니가 병원에서 일주일간의 사투 끝에 운명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향년 43세였다. 나는 마닐라에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 마음먹고 있었으나, 깊은 슬픔 속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토니의 장례에만은 참석해 그의 명복을 빌기로 했다. 나는 마닐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국 포포이의 설득에 의해 마닐라에서 그와 함께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CPP-46

    필리핀 공산당 창립 46주년(2014년) 행사 모습(출처=www.philippinerevolution.ne)

    제 26 장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의 분열과 사회주의노동당

    토니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포포이는 타귁시에 있는 테믹스사(社)(텔레푼켄 마이크로엘렉트로닉스;Telefunken Microelectronics)의 파업에 나를 데리고 갔다. 독일의 다국적기업인 테믹스사 1,600명의 노동자들이 이 다국적기업의 필리핀 지사에 의해 해고된 조합원의 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노동부는 이미 5차례에 걸쳐 노동자의 복직을 명하고 있었으나, 독일 기업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테믹(Temic)노동자의 투쟁

    노동자들은 노동부가 자신이 내린 명령조차 이행시키지 못하는 것에 분개해 1996년 12월 20일에 노동부 건물을 점거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포포이와 당시 산라카스의 위원장이었던 콘스탄티노 주니어가 노동자들을 방문해 교류했다. 12월 31일, 특별기동대 팀과 서부 관구의 경찰이 건물을 급습해 테믹 노동자들을 강압적으로 체포했다. 노동자들은 2~3대의 버스에 가축들처럼 실려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포포이와 콘스탄티노는 구속된 노동자들의 지원에 온 힘을 쏟았다.

    12월 31일 오후, 노동자들은 불기소로 석방됐다. 그리고 그들은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정부기관과 매스컴에 항의시위를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그들은 말라카냥 궁 근처의 멘디올라 다리 위에 캠프를 설치하고, 피델 라모스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라모스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불법파업”이라고 비난했다.

    모든 정부기관으로부터 문전박대당한 노동자들은 타귁 시에 있는 테믹사 정문 앞에서 다시 피켓라인을 펼쳤다. 내가 포포이와 함께 테믹 노동자들을 만난 것은 이 때였다. 나는 12월의 쾌거(노동부 점거)의 자초지종을 보지는 못했다. 그 당시 나는 호주에 있었고, 1997년 1월 마지막 주에 마닐라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2월 22일의 테믹사 파업의 클라이막스에는 참가할 수 있었다. 그 날 마닐라 수도권의 200여개 지원 단체로부터 노동자 약 1만여 명이 와서 타귁시에 있는 테믹사 정문 앞에 “천막촌”을 만들고 테믹의 파업노동자들과 합류했다. 천막촌의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였으나, 테믹의 공장 벽면은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경비원들이 구내를 순찰했고, 검은 제복에 헬멧을 쓴 경찰들이 건물 옥상을 순찰했다. 포포이가 테믹 노동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필리핀에 “영원히”살기 위해 호주로부터 돌아온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한 것은 이 노동자판 피플파워의 와중이었다.

    마닐라·라잘 지역위원회의 분열

    테믹의 “레이버 파워”〔「피플파워」를 비유〕투쟁 중에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 내의 분열이 심화되어갔다. 분열의 한 쪽은 마닐라·리잘 위원회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비합 조직이었고 다른 한 쪽은 포포이 동지와 공개 대중조직이었다. 비합 부문에서 제기한 문제는, 포포이가 “합법조직”을 우선시한 것에 관해서였다. 그들은 포포이가 지하활동으로 돌아와 당의 비합 활동 부분을 지도하기를 원했다.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불만은 “특정 표적”에 대한 작전을 포포이가 거부한 것에 대해서였다. 포포이에 의하면 그가 거부한 “특정 표적”은 잘 알려져 있는 인물로,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에 의해 표적이 된 것은 그의 “중립적” 태도가 혁명운동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만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의 지역조직 및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비합 부문 지도부는 곧 회합을 열어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의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을 “청산”하려 한다는 혐의로 포포이 동지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그들은 당 지역대회의 개최를 요구하는 서명을 돌렸는데, 서면에는 “블로크(Bloke)” 즉, 마닐라·리잘 지역 당 조직의 한 블록이라고 서명했다. 포포이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대중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던 당원 전체를 소집했다. 얼마 후 포포이가 캡을 맡고 있던 필리핀 노동자연대(BMP)등의 조직이 포포이 지지를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마닐라·리잘 지역위원회의 “순수” 비합 부문과 대중조직 관련 당 부문이 분열되고 말았다.

    포포이와 나는 「블로크」의 견해에 대한 비판을 조직화했다. 나는 레닌이 실행한 해당주의자와의 투쟁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 1905년 러시아 제1차 혁명이 좌절된 직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은 상반된 두 개의 잘못된 경향과 직면했다. 하나는 의회주의 전략에 편승해 순전히 합법적인 당을 건설하기 위해 비합당을 해체하려는 경향이었다. 이것은 명백한 우편향이다.

    또 하나의 경향은 극좌 경향이라고 불린 것으로, 순전히 비합만의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의회나 공개부문에서 활동하는 당의 대표를 소환하는 등 당의 합법 활동을 일소해버리려는 경향이었다. 레닌은 그가 “좌익 청산주의자”라고 지칭한 이 극좌주의자들 역시 당을 청산으로 몰고 간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방침이 실행되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광범위한 대중(공개적인 대중조직에 결집한)들로부터 분리되어 결국에는 비합당 자체도 붕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포포이와 나는 합법과 비합법 활동, 공개와 비공개 조직을 항상적으로 결합시켜 나가는 것이 올바른 방침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그 시점에서 마닐라·리잘 위원회(블로크의 분열 후에도 남아 있는)를 「마닐라·리잘 혁명위원회(KRMR)」로 명칭을 변경했고 이것이 사실상 신당 결성준비위원회가 되었다. 그 강령은 강고한 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을 기반으로 하는 당 건설이었다.

    혁명적 노동자당(RPM) 아래 필리핀 공산당(CPP)로부터 분열한 지역위원회를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이 「블로크」 였다. 그러나 1998년에 「블로크」의 대부분(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을 제외하고)은 이 프로젝트를 탈퇴하고 독자적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필리핀 맑스 레닌주의당(PMLP)을 결성했지만, 이후 도시게릴라 투쟁에 경도되어 이 당도 소멸되고 말았다.

    리가 소셜리스타(Liga Sosyalista)

    1998년에 나는 신당 건설에 있어서의 최우선 과제를 둘러싸고 포포이 동지와 의견이 대립되어 마닐라·리잘 혁명위원회(KRMR)를 떠났다. 포포이는 법률사무소와 폼 나는 노동조합의 잡지, 노동조합 학교, 노동자 은행 등에 중점을 두었지만, 그런 것들은 직접적인 사회주의의 선전과 조직화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나는 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나 역시 공공연하게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할 시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사회주의자들이 공개부문으로 오픈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설령 그것이 지하당의 통제 하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나와 내 파트너 레이하나가 젊은 사회주의자 그룹이나 마닐라·리잘 위원회의 몇몇 간부들과 함께 「리가 소샬리스타(Liga Sosyalista)」라는 당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것은 이 시기였다. 리가 소샬리스타는 조직 건설을 위한 교육·선전 캠페인에 착수했다. 우리는 노동운동과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마닐라수도권 남부의 공장벨트 지대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들 사회주의자의 요구나 방침을 게재하는 신문 『프로그래시보(Progresibo)』를 발행했다. 발행부수는 약 2,000부에서 5,000부 정도였는데, 특히 집회나 행사 중에 정치적인 뉴스나 정보에 목말라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판매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는 『프로그래시보』를 몇 군데 책방과 신문판매대, 그리고 「포퓰라 북스토어」에 깔아놓았는데, 어느날 구 소련파 공산당 「PKP-1930」〔PKP의 새로운 명칭-1930은 PKP의 창설년도〕에서 탈당한 두 명의 젊은 동지가 신문을 보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들은 PKP의 가장 오래된 소작농 그룹인 농업노동자연맹(AMA)과 함께 프로레타리아 혁명당(RPP)이라는 당을 결성한 참이었다.

    1999년 11월 30일, 필리핀 노동자계급의 영웅 안드레 보니파시오의 탄생일에 「리가 소샬리스타」와 「프로레타리아 혁명당(RPP)」이 통합해 「사회주의 노동당(SPP)」을 결성했다. 통합 성명에서 사회주의노동당은 “1930년대로부터 1960년대에 걸쳐 무장 또는 비무장의 다양한 투쟁을 해온 사람들, 마르코스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싸워온 1970년대 활동가, 그리고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새로운 투쟁을 전개한 1980년대의 활동가들”, 즉 수 세대에 걸친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 결집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동안 1998년 6월, 전 영화배우였던 죠셉 에랍 에스트라다가 압도적 득표를 통해 필리핀의 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에랍”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히어로인 것처럼 부각시켜 선거전을 치룬 것이다. 산후안 시장을 오랜 동안 역임해 정치적 경험을 쌓은 에랍은 지배계급 내의 신흥세력을 대표했다. 그러나 에랍의 경제정책은 피플파워 전이나 후의 체제와 아무런 차이가 없었고, IMF나 해외 은행이 시키는 대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그 자체였다. 그 특징은 경제나 무역의 자유화, 정부기업과 자산의 민영화, 국내산업의 규제완화 등이었다.

    에랍은 대통령에 취임하자 국가 파탄을 선언했다. 대외 부채가 456억 달러(1조9천억 페소)로 불어났고, 국내 부채도 2조3천억 페소에 이르러 국가재정적자는 약 700억 페소에 달했다. 그로 인해 에랍 정권은 취임하자마자 세수를 증대시키기 위해 인기 없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는 결국 미수에 그친 마르코스 일가의 “자산 동결” 시도와 상당액의 수입을 가져다 준 미 정부와의 군사조약인 주류미군협정(Visiting Forces Agreement)을 추진한 것 등이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 노동당(SPP)은 경제위기가 악화일로를 걸어 대중들의 불만이 폭발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에랍 정권은 이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채 인기가 급격히 떨어져, 정치적 위기가 조기에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이 예측은 적중했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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