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학교 학생 이원기 도강기(都講記)
    [컬렉터의 서재] 1896년 조선의 어떤 장면 스케치
        2022년 09월 27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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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10월 8일(음력 10월 8일) 일어난 을미사변을 계기로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다시 친일내각이 들어섰다. 이들은 일본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서 을미개혁(갑오 3차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으로 단발령이 내려지고, 소학교도 설립되고, 갑신정변으로 중단됐던 우편 사무도 다시 시작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음력 1895년 11월 17일이 양력 1896년 1월 1일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연호도 갑오개혁 때부터 사용해 오던 연호인 ‘개국(開國)’을 버리고 ‘건양(建陽)’이라는 새 연호로 바뀌었다. ‘양력을 새롭게 세웠다’는 뜻이다.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이 양력 1896년 1월 1일이 된다니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한 달 반 정도의 날짜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들이 당황한 것은 단순히 새로운 역법 체계가 생소해서만은 아니었다. 당장 11월 17일부터 12월 말까지 조상 제사를 지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졸지에 제사도 못지내는 불효자가 되어버리니 양력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1895년에서 1896년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는 단발을 한다느니, 양력을 쓴다느니 온통 개화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사진] 을미사변을 보도한 프랑스 화보 신문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1895년 10월 27일자 1면으로 <조선 왕비 암살>이라는 제목을 달았다.(박건호 소장)

    이런 개화를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한 유인석, 이소응 등 일부 양반 유생들은 반일 의병을 일으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였다. 이 와중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직후 단발령을 철회하고 의병 해산을 명하였다. 이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일내각이 붕괴하고 새롭게 친러내각이 수립되면서 5개월도 안되는 짧은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고종과 친러내각은 기존의 내각대신들을 ‘국적(國賊)으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성난 군중들은 을미개혁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을 광화문 앞에서 욕하며 돌로 쳐 죽였다. 단발령 때 고종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랐던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도 김홍집과 같이 맞아 죽었다. 탁지부 대신이었던 어윤중은 고향인 충북 보은으로 피신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주민들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으며, 내부대신 유길준 등 10여 명의 고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외부 대신 김윤식은 체포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임금은 다른 나라 공사관 2층에서 셋방살이를 하게 되었고 (이 국내 망명은 향후 1년간 지속되었다), 왕비는 일본에 의해 참살된 후 그 시신마저 불태워졌으며, 일국의 총리대신은 광화문 앞에서 ‘왜놈대신’이라는 욕을 들으며 백성들에게 참살되던 시대였다. 조선은 이미 국가로서의 존엄을 상실하였다.

    1896년 건양 원년 6월경으로 돌아가 ‘이원기’라는 한 청년을 만나보자. 때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지 넉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이원기(李源綺)는 을미사변-을미개혁-단발령-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관립 영어학교를 다니던 16세의 학도였다.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1883년에 동문학(同文學)과 1884년에 육영공원을 설립하여 영어교육을 실시한 바 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후 다시 외국과의 교섭상 영어 습득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청어학교, 불어학교, 일어학교 등과 함께 영어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영어학교는 원래 박동(礴洞)의 육영공원 자리에 있었는데, 얼마 전에 6조 거리의 농상공부 뒤편으로 이전한 터였다. 허치슨(W. Hutchison) 교장 아래 외국인 교관 핼리팩스(T.E. Halifax)와 프램프턴(R. Frampton), 조선인 교관으로 안명호, 윤태헌, 정인범 등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사진] 당시 불어학교의 수업 장면. 이원기가 다닌 영어학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원기는 현재 1학년으로 앞으로 4년 반을 더 공부해야 이 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 가난한 상인의 아들인 원기는 생소한 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 영어학교 학생들은 모두 한복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다녀 주변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라고 하나 안에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죽을 노릇이었다. 다른 것들은 그럭저럭 따라가겠는데 서취(書取)과목이 잘 안된다. ‘서취’는 영어를 듣고 받아쓰는 과목인데 핼리팩스나 프램프턴 선생님이 영어 문장을 말하면 그걸 영어로 받아쓰는 것이다. 영어학교에는 5년에 걸쳐 다양한 과목을 마쳐야 되는데, 영어(독해, 문법, 번역, 작문, 지리, 산수, 서취, 회화), 한국 지리와 역사, 논어, 체조 과목 등이 있었다.

    원기는 학교 다니는 것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영어학교 수업 시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는데, 늦기도 여러 번이고, 심지어 결석도 여러 번 했다. 원기는 아버지가 하는 장사일이나 배울까 하고 아버지께 말씀 드렸지만 씨가 먹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앞으로는 장사를 하는데도 외국어는 꼭 필요하다고 원기를 윽박지르고 달랬다. 근처의 변부자댁은 이전부터 청어(淸語) 통역관 집안으로 큰 부를 일구어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왔던 터여서 아버지는 정 영어가 힘들면 차리리 올해 2월 수송동에 세워진 아어학교(俄語學校;노어학교)로 옮기더라도 외국어 공부를 포기할 수 없다고 아들을 채근했다. 최근 국왕이 아라사공사관으로 파천한 이후 아라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아어(俄語)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외국말은 이제 생존이었다.

    [사진] 영어학교 이원기의 도강기. 1896년 6월 30일 발급한 것이다. 이 도강기를 통해 영어학교 학생들이 당시 어떤 과목을 배웠는지 알 수 있다. (박건호 소장)

    1896년 6월 30일 오늘은 원기가 하기(夏期) 도강기(都講記)를 받는 날이다. 도강기는 도강(都講) 즉 교관들이 작성한 일종의 성적표다. 일 년에 두 번, 6월에 하기 도강기, 12월에 동기 도강기를 받게 되어있었다. 여기에는 배우는 과목과 학생이 받은 성적이 기록되는데 성적은 영어학교의 교관들이 상의하여 결정하였다. 원기는 성적표를 받고 자리로 돌아와 유심히 살펴본다. 총 900점 만점에 648점이다. 20명 정도 되는 같은 반 학생들의 평균점이 720점이니 총점 기준으로는 아주 꼴찌는 아니었다. 그런데 서취 과목은 심각했다. 100점 만점에 34점이라니!! 이걸 아버지가 보시면 뭐라고 하실건가…

    게다가 교관들이 써 준 학생에 평(評)은 더 심각했다.

    “在家不甚做工 做工甚惰 品行端正”

    “집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매우 게으릅니다.”

    이렇게 써 준 뒤 교관들은 원기에게 좀 심하다 싶었던지 “품행은 단정합니다.” 이렇게 덧붙였다.

    자업자득이라 생각하고 원기는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놀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향한다. 이 도강기를 아버지에게 어떻게 보여드린다?

    이런 생각으로 길을 걷는데 저 멀리서 군인들의 구호 소리가 들려온다.

    “один(아진), два(드바), три(뜨리)!”

    아라사 군인들이 구호를 외치며 줄지어 6조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진짜 이참에 아어(俄語)로 갈아탈까? 이건 영어보다 더 어렵다던데…. 아니면 아예 일본어를 하는 건 어떨까?

    원기의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녹음은 날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1896년 병신년 6월 마지막 날 광화문을 비추던 뜨거운 태양이 뉘엿뉘엿 인왕산 자락을 향해 넘어가고 있었다.

    [사진] 왼쪽 그림은 러시아 군사 교관단이 조선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오른쪽 그림은 [르 프티 파리지앙] (1904.2.7.)에 실린 그림으로 멀리 광화문이 보이는 육조거리(현재의 세종로)에 러시아 군대, 프랑스 군대, 미국 해병대가 차례로 줄지어 행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원기가 영어를 배우던 그 시기에는 이렇게 외세가 한국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다. 이와 함께 영어, 불어, 러시아어, 일어 등 외국어도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 위 글은 영어학교 이원기 도강기를 통해 1896년 6월의 시대상을 가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이원기 아버지의 직업이라든지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필자)

    * <컬렉터의 서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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