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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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17일 06: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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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데뷔작 『순례자』는, 파올로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남프랑스의 생장드피에르포르에서 시작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산티아고의 길’에서 얻은 경험은 파올로가 작가가 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경험담을 바탕으로 씌어진 만큼 코엘료의 전매특허인 듯한 ‘어른을 위한 동화’의 색채는 미미한 편이다. 그러나 고행으로부터 영혼의 행복에 도달한다는 가르침은 여전하다. 코엘료의 독자들에게는 『순례자』를 읽는 것이 ‘코엘료적인 성찰’이 시작하는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테고, 그것으로부터 만고불변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얻게 될 것이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그렇다.

    코엘료는 책의 도입부를 비밀종교단체에서 교단의 기사로 임명되는 과정에서 범한 실수담으로 채운다. 기사의 징표인 검을 단숨에 잡으려 했던 코엘료를 향해 마스터는 그의 ‘오만함’을 꾸짖는다.

    “성전의 길은 몇몇 선택된 자들의 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길이네! 그대가 지니고 있다고 믿는 힘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지! 그대는 검을 물리쳤어야 했네. …중략… 오만으로 인해, 그대는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검을 찾아야 하네."(p.16)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간교한 인물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조조만 해도 세 번은 겸손을 보이는데 하물며……. 오만한 코엘료, 그는 수행을 통해 한참을 거듭나야만 할 것이다. 바로 산티아고의 길에서.

       
     ▲ 파울로 코엘료
     

    미래에 4,300만부를 팔아치우는 ‘대작가’가 될 파올로, 그러나 순간의 오만함 탓에 기사가 되지 못한 파올로. 그는 스페인 피레네 산맥에서 안내인 페트루스와 함께 순례의 길에 나선다. 여행의 첫 날이지만 겸손의 미덕을 쌓기 위한 그의 다짐과 성찰은 가상하다. 그는 오늘 기꺼이 자신을 낮춘다.

    “오늘 나는 작은 씨앗이 되었다. …중략… 난 내가 원하는 만큼 새롭게 또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내 팔이 충분히 자라나, 내가 태어난 대지를 넉넉하게 감싸안을 수 있을 때까지.”(p.48)

    이튿날, 피레네 산맥 여기저기를 헤매며 수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페트루스의 의도였다. 그는 서둘러 검을 받으려는 욕망과 조급함이 앞서는 바람에 길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가는 코엘료의 잘못을 지적한다.

    “당신에겐 길을 따라 움직이는 과정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오직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욕망만이 앞섰던 거죠.”(p.56)

    ‘화들짝’ 놀란 코엘료에게 안내인은 목적지 못지않게 길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난 너무나 놀라서 추위와 마을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페트루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일 때, 길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표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건 언제나 길이기 때문이죠. 길은 언제나 우리가 걸은 만큼 우리를 풍성하게 해줍니다.”(p.57)

    여행이 계속되는 만큼 페트루스의 충고도 반복된다. 쉼없이 쏟아지는 페트루스의 고언을 거름삼아 코엘료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인간은 결코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영혼은 꿈을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살아가는 동안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실망하고, 충족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좌절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지요. 하지만 그래도 꿈꾸기를 멈춰선 안 됩니다.”(p.77)

    고된 여행 중에 주목할만한 일화도 있다. 악마에 빙의된 개와 페트루스가 한 판 싸움을 벌여 개에게서 악마를 쫓은 것이다. 『엑소시스트』 같은 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거늘, 코엘료는 이것을 실제로 겪은 것이다. 다음은 페트루스의 가르침.

    “중요한 것은, 그 노부인이 저주에 익숙해져 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저주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고, 세상의 인색함을 수긍했습니다. …중략… 종종 우린 선을 보여주려고 하고 삶이 관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악마의 것인 양 거부합니다. 아무도 삶에게 많은 걸 바라려고 하지 않아요.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죠.”(p.123)

    페트루스의 말처럼 부정적 사고는 몸과 마음을 멍들게 한다. 이미 물들었다면 패배주의에 오염된 정신을 세탁해야 한다. 이를 위해 페트루스는 ‘푸른 천체의식’을 코엘료에게 ‘전수’한다. 그 의식에 동참하려면 귀기울여야 할 이야기가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느껴보십시오. 친구여, 하찮은 세상사를 잊고 그대의 마음을 자유롭게 놓아주십시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릴 적에 부르던 노래를 불러보십시오. …중략… 그 단계에 이르면, 어린 시절 믿었던 성인들이 당신 앞에 나타남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이 그곳에 현존함을, 사방에서 모여들어 미소를 띠며 당신에게 삶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져다주고 있음을 믿으십시오.”(p.160)

    푸른 천체의식의 효과는 ‘트롬 세탁기’ 못지 않으므로, 코엘료여, 아픈 영혼들이여, 곧 나으리라.

    “내 안에 아가페가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반짝이며 빛나는 신비스러운 푸른 빛줄기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내 영혼은 정화되었고 내 죄는 용서를 받았다. 빛은 다시 나가 들판으로 퍼져나갔고, 곧 세상을 가득 채웠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p.164)

    몸과 마음이 깨끗해졌다면 이제 ‘성숙’을 얻게 될 것이다. 코엘료는 검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순례자로서의 의무를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순례길을 따라 걷는 동안, 내가 알고 싶어했던 것은 오직 검이 숨겨져 있는 장소였다. 왜 그것을 찾고 싶어하는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자문하지 않았다. 나의 모든 에너지는 보상만을 생각하는 데 소진되었다. 무언가를 원할 때는 그 욕망의 대상에 아주 확실한 목적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보상에 대한 유일한 동기였다. 그것이 내 검의 비밀이었다.”(p.311)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그는 인격적 성숙을 바탕으로 순례의 의미를 발견한다. 코엘료의 여행의 의미, 그것은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었다.

    “저는 저 자신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어려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 먼 길을 걸었습니다. 주님,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이 힘을 지닐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 중 대부분은 마침내 실현되려는 꿈을 그냥 놓아버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선한 싸움’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에 갇혀 있는 포로들입니다. 무엇을 할지도 모른 채 검을 찾기만을 바랐던 저 자신처럼……”(p.322)

    이제 코엘료는 안다. 겸손은 삶을 기름지게 하는 윤활유라는 것을. 검을 수여받기 전 그는 자신을 낮춘다.

    “나는 겁에 질린 채 계속 외쳐댔다. 주님, 저는 당신의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p.324)

    이제는 마스터도 코엘료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코엘료는 서품을 받고 ‘마법사’가 된다. 사람들에게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잃지 말고 노력할 것을 권한다. 족집게 강사의 ‘밑줄 쫙’ 강의보다 쉽게 읽히고 더 재미있는 『연금술사』 같은 책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여 진정한 행복을 구하라’는 코엘료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들어 모실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는 삶의 구체적인 풍경들 속으로 깊게 들어가기보다는 관념적인 언어들로 가득 찬 사유를 펼쳐 보이기를 즐긴다.

    가령, 결혼식 피로연에서 테이블을 정리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라.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는 저 여인을 보세요. 페트루스가 말했다. 에로스에는 여러 면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그중 하나입니다. 불행 속에서 발현되는, 좌절한 사랑이죠. 저 여인은 신랑과 신부에게 축하의 입맞춤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중얼거립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세상을 정돈하려고 합니다.”(p.144~145)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징후를 설명하는 대목은 또 어떤가.

    “꿈들을 죽일 때 나타나는 첫 번째 징후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서 알게 된 사람들 중 가장 바빠 보였던 사람조차 무엇이든 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 피곤하다고 말하고, 정작 자신들이 하는 게 거의 없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하루가 너무 짧다고 끊임없이 불평을 하지요.”(p.78)

    이것을 고귀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대신에 ‘코엘료 식 처세술과 성공학 강의’라고 말해버린다면 불경죄에 해당할까? 세상에 대한 불경한 해석이 차라리 삶을 삶 답게 만들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혼란스러운 삶을 드러내는 대신 주제와 사유에 이야기를 끼워 맞추는 코엘료의 언어들은 그래서 관념적이고 작위적이다. 그것이 그의 작품들을 도리어 단선적이고 평면적이게 만든다. 그는 꿈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현실을 복합적으로 조명하는 대신 일방적으로 ‘꾸짖기’ 바쁘다.

    ‘현실’을 ‘관념’의 거푸집에 억지로 넣으려는 코엘료는 기꺼이 우리시대 계몽군주를 자처한다. 프리즘처럼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비춰내는 책이 아니라 일원적으로 의미를 강요하는 책인 것이다.

    게다가 『연금술사』나 『악마와 미스프랭』처럼 허구적인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동화도,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 『순례자』의 이야기도 동일한 맹점을 공유한다. 그 ‘순례’가 그를 작가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순례자』는 코엘료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을 잉태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순례자』가 코엘료의 명성에 걸맞는 판매량을 기록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판매량 위에서 코엘료의 언어들은 갖가지 해석과 찬사를 누리게 될 것이다. 앤디 워홀이 그랬듯 지금은 명성이 의미와 평가를 좌우하는 시대가 아닌가.

    더군다나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출근하는 것과 같은 일상 생활을 하기 위해 자명종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스승의 고언이 늘 필요하다. 이제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도를 믿으십니까?”라며 접근하면 그를 따라나서야 할 지도 모른다. 코엘료도 믿음 덕에 악마를 쫓고 인격을 성숙시키는 체험을 하지 않았는가. 혹시 아는가, 무조건 믿는다면, 로또라도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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