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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화는 왜 며느리 몫인가

혼인 후 첫 명절은 추석이었다.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시가에 가서 어머님, 손위 동서와 함께 끝도 없이 일했다. 원래 손이 크신 어머님은 커다란 광주리로 일곱 개 가득 전을 부치고 자식들이 좋아한다며 별별 음식을 만드셨다. 냉장고에서는 재료가 계속 나왔고 음식을 만드는 사이사이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어지러워진 집안을 치우고 다시 음식을 했다. 어머님과 손위 동서는 일을 누구에게 미루는 성격이 아닌지라 나는 잔심부름이나 하는 정도였지만 부엌 주변을 서성이며 좀처럼 앉을 수 없었다. 명절 당일에는 남편의 할아버지 차례에 참석했다. 큰집의 첫째 며느리가 거부하는 바람에 둘째 며느리가 30년째 떠맡고 있는 차례에는 성인만 쳐도 30여명이 참석했고 그 절반은 여성이었다. 차례가 끝나고 늙은 남성들은 상 앞에 앉아 수저와 술잔을 받았고 조금 젊은 남성들은 그들의 술시중을 들었다. 어린 남성들은 방 안에 있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며느리를 데리고 온 늙은 여성들은 쪼그려 둘러 앉아 근황을 나누었고 젊은 여성들은 계속해서 전을 썰어 담고 국과 밥을 푸고 과일을 손질했다. 방 안에서는 요구가 많았다. 늙은 남성들은 ‘조금만 달라’는 말로 염치를 차리려 했다. 국을 조금 담건 많이 담건, 사과를 한 쪽 썰건 열 쪽 썰건 일은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여성들 모두는 수저조차 받지 못했다. 늙거나 젊거나 여성들은 부엌 근처에 옹기종기 앉아 손가락으로 마른 송편과 식은 전을 집어먹었다. 일회용 젓가락조차 없는 것으로 봐서 이 집에선 이것이 당연한 듯했다. 손위 동서는 내게 가장 품이 많이 가는 꼬치전 중에서도 모양이 괜찮은 것을 골라 건넸다. “동서, 배고프지? 이거라도 먼저 먹어.”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어쩔 줄 몰랐다. 차례상 차림을 주관한 그 댁의 형님도 손으로 전을 집어먹다 웃으며 말했다. “아유, 명절에 한 번 이렇게 먹는 것도 재미지요.” 나는 웃을까 울까, 소리 지를까 화낼까, 망설이다가 건넨 손이 부끄러울까 싶어 몰래 전을 내려놓았다. 이 치욕은 무려 2003년의 일이다. 내가 열 살 때 쯤엔 2003년이면 달나라로 소풍 갈 줄 알았다. 나의 시가 식구들은 매우 유쾌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라서 나는 그 분들을 오래 뵐 수 있는 명절을 항상 기다렸다. 언제나 나를 먼저 쉬게 해주시는 어머님과 손위 동서의 배려에 감사했고 맛있게 먹는 식구들과 밥상을 나르고 치우는 남편이 보기 좋았으며 수고했다 말씀하시는 아버님의 한 마디가 고마웠다. 내가 힘들어도 좀 참고 양보하며 얻는 이 화목이 혼인이라는 제도 안에 편입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안온함이라 믿었다. 하루 종일 부엌을 서성이는 것이, 밥을 먹으면서도 설거지가 언제 얼 만큼 쌓이는 지 확인하며 ‘제가 할게요!’라고 먼저 외치는 것이, ‘에미야~’라는 부름에 살갑게 대답하여 기쁨을 드리고 가끔 되바라지게 답하여 시어른들께서 당돌한 며느리를 얻었다며 남에게 자랑할 거리를 드리는 것이, 어머님의 손맛을 열심히 배우려는 것이, 그래서 내 존재를 지우고 며느리로서 존재하는 것이 낫다 여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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