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붉은역사 답사기⑨]
    1920년대 '풍운의 조직' 서울청년회 회관터
        2020년 06월 29일 10: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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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붉은역사 답사기⑨]

    1920년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 풍운의 조직 서울청년회 회관터 / 종로구 견지동 74

    서울청년회는 일제강점기 1921년 1월 서울에서 조직된 최초의 전국적 청년조직.

    이득년 장덕수 등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였으나, 한성임시정부를 주도하다 감옥에서 나온 김사국이 지지자들과 서울청년회에 가입, 김사국은 7인 지도부 중에 1인이었으나 조직은 점점 좌익화되었다.

    친일 전력이 있는 김윤식을 청년회 지도부 다수가 사회장으로 하자고 하는 상황에서 김사국은 반대를 하지 않고 기다리다 사기공산당사건이라는 네이밍을 들고 나왔다. 장덕수 등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받은 코민테른 자금의 상당액을 받음. 이들을 고려공산당 국내파라고 함. 장덕수와 김철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사국은 이들이 사기당을 만들어 자금을 유용하고 흥청망청 사용했다고 공격하여 조선청년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이를 부각시키며 민족주의 주도의 청년연합회를 반분했다.

    연합회를 반분한 서울파는 노동 농민 등 적국적인 조직을 만들며 준정당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전국적인 청년조직, 사회주의 운동의 다수파로 급부상했다. 김사국의 오른팔과 왼팔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영과 한신교의 활약으로 사회주의 조직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때부터 서울파의 질주가 시작됨.

    1923년 3월 경성에서 100여개 단체가 참여하는 전조선청년당대회 개최를 주도했으며 전조선노농대회도 준비.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의 창립을 주도하면서 방점을 찍었다.

    코민테른에게 국내 통일당 건설의 전권을 가지고 들어온 김재봉과 논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김사국은 통일당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일관되게 코민테른과 절연을 요구했는데 이는 김재봉과 화요회가 받아들일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결국 1924년 가을부터 화요회는 전국조직을 건설하고 당 건설을 기정사실화하고 서울파를 배제했다.

    서울파와 김사국은 이에 대항하여 별도의 비밀전위정당을 건설했는데 고려공산동맹이 그것이며 김사국이 책임비서. 이율배반인 것은 코민테른과 절연을 요구하던 김사국이 고려공산동맹의 통일당 요청을 위해 코민테른행에 나섰.

    러시아 일대를 헤매던 김사국은 폐병으로 귀국해 1926년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서울파는 급속히 조직이 축소되고 방향을 잃음. 3차 조선공산당 전권을 장악한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국내파 김철수가 통합을 추진하자 흡수되면서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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