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각하게 부채 거부를 선동하다
    [서평] 「크레디토크라시」(앤드루 로스/ 갈무리)
        2016년 06월 11일 09: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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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채의 지배체제’ 또는 더 넓게 보아 부채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사회 시스템이나 양식을 의미하는 ‘크레디토크라시’는 낮선 용어지만, 부채라는 프리즘으로 이 세상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개념이기도 하다.

    지배체제(-cracy) 앞에 자주 붙었던 관료(bureau-), 독재(auto-), 또는 민주(demo-) 만큼이나 부채(credit-)가 그렇게 중요한 정치 및 사회의 규정 원리가 되었다는 것인데, 앤드루 로스가 보여주는 사례와 해석들을 보면 부채 사회라는 규정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 책 1장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회전결제자’다. “나는 마스터카드로 비자카드를 막는 사람”이라는 선전 문구가 바로 이 의미다. 악성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다 신체포기각서를 쓰거나 생명을 건 추격전을 벌이는 한국 영화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도 부채 사회의 한 징후일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은 주택자금 대출이나 학자금 대부, 아니면 사소하게는 스마트폰 할부약정의 형태로라도 일상적으로 빚을 지고 살고 있다. 또는 빚을 권하는 각종 광고와 채무 관계를 전제로 하는 제도들을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익숙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초기 산업자본주의의 시장 문명은 모든 재화가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만으로 쉽게 형성되지 않았다. 익히 알려진 바처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폭력적인 인클로저와 공장 규율을 동반한 ‘시초 축적’을 필요로 했다. 마찬가지로, 널리 거래되는 재화든 아니든 재화 각각의 구매비용이 부채로 조달될 수밖에 없을 때, 더 나아가 부채가 물질적인 삶의 향상은 물론 기본적인 생활 필수재에 접근하는 데서도 전제조건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부채의 지배는 모습을 드러낸다(13면).

    크레디토크라시

    서구 자본주의는 공황과 전쟁, 혁명을 위기이자 동시에 팽창의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했다. 가계와 정부에 시나브로 쌓인 빚은 성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고, 또 빚 자체가 성장의 수단이 되었다. 빚으로 먹고 사는 은행들이 생겨났고, 기업과 병원 그리고 학교들이 빚의 떡고물을 나누어 챙겼으며, 정치인들은 이 체제의 일부로서 그리고 수호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파생상품 시스템이 위기에 빠지면 공적 자금으로 은행을 구제하도록 했고, 변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개인과 국가에는 가차 없이 채찍이나 족쇄가 제공되곤 했다. 심지어 채무자가 빚을 다 갚지는 않도록 하여 영원히 채무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채권자에게는 더 좋은 일이었다.

    때문에 부채의 지배는 정치경제적 체제이자 사회문화적 헤게모니 체제이기도 하다. 특히 2차 대전 후 미국에서 저당권이 설정된 주택은 이 시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초석으로 기능했다. 대규모 교외주택 단지를 공급한 건축업자 윌리엄 레빗은 “자기 집과 땅을 소유한 사람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102면).

    또한 헨리 포드의 일당 5달러 임금이 대중소비 사회를 가져왔다고 이야기되지만, 실은 그것으로 자동차를 구매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소비자 혁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개인대출이라는 산업문화에 시동을 건 것은 고임금이 아니라 바로 이 자동차 구매자금 대출이었다(224면).

    최근에는 대학 학자금 대출이 미국이나 한국 모두에서 청년 세대를 옥죄는 장치가 되고 있다. 학자금 대출은 학생들의 미래를 저당으로 잡히는 ‘기한부 노예계약’에 다름 아니다. 노동시장의 신규 진입자들, 특히 대졸자들은 스스로 고용 적격성을 갖춰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수취한 임금 중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몫을 그러한 자격을 얻는 데 투입된 부채를 상환하는 데 쓰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체제에서 이윤을 챙기는 대학과 은행들이 따로 있지만, 전후 호황기에 대학 교육을 받은 세대와 청년 세대 사이의 갈등으로 비춰지면서 정작 부채의 지배 체제는 은폐되기 쉽다.

    캐나다 퀘벡의 부채 저항운동의 상징인 붉은 정사각형 휘장의 네 모서리는 각각 교육, 의료, 주택, 신용카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네 가지 부채는 실제로 서로 얽힌 채 모든 가구 단위들을 순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179면).

    데이비드 블래커 같은 논자는 인간의 지속적 실존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는 유형의 부채를 ‘실존적 부채’라 일컬으며, 특히 교육부채와 의료부채를 여기에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부채는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에 맞서 쌓여온 부채이며, 개인에게 철저히 들러붙어 일생에 걸쳐 그를 과도하게 통제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정하고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222면)

    오늘날 채무불이행자들에게 가해지는 낙인과 오욕, 그리고 그들이 내면화하고 있는 수치심과 죄의식은 공장시대의 쓸모없고 무기력한 이들에 대한 멸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채무자와 노동자들은 존재적으로도 겹친다.

    1990년대에 가계부채가 증가하자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이사회 의장은 가계부채가 노동의 전투성을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스스럼없이 시인한 바 있다. 노동자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을 경우 파업에 참여하는 경향이 확연히 감소한다는 의미다(226). 한국의 경우 파업으로 회사의 경영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내려지는 손배가압류라는 징벌이 이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생적인 또는 의식적인 부채 반대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학생들은 학자금 부채를 개인의 부족함이나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을 것을 주장하며 거리로 나섰고, 여러 나라들이 주빌리(기독교의 희년) 방식의 부채탕감을 공공연히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채 반대 또는 부채 탕감 주장은 단지 피해의 완화나 부채의 경감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채의 정당성과 변제의 의무성 자체까지 의문시한다. 저자는 우선 다음의 경우들이 부당하거나 갚아서는 안 되는 종류의 부채라고 적시한다.

    채권자에게 일방적으로 이익을 안겨주거나 채무자와 공동체에게 치명적인 사회적 또는 환경적 손상을 입히는 대출, 상환 능력이 없는 차용자들에 대한 대부, 수익이 넘쳐나며 부채로부터 이미 충분한 이익을 얻는 은행들과 채권자에 대한 부채, 수상쩍은 불로소득에서 기인한 대부금, 또는 민주적 책임 능력을 억압하거나 필수 공통재 이용권을 침해하는 채무들이 그러하다.

    게다가 이런 부채들을 변제해줌으로써 은행가들의 사기와 협잡, 반사회적 행동이 계속되게 만드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유해하다. 이런 부당한 부채의 목록은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다.

    더욱이, 주요 채권 은행과 채권국들이 좀체 인정하지 않는 부채도 있다. 기후변화를 초래한 에너지 다소비 국가, 즉 선진 산업국들이 후진국들에 지고 있는 ‘기후 부채’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아서 기후 채권을 갖고 있어야 할 남반구의 섬나라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엄청난 희생을 겪고 있지만, 이 채권의 실체와 액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현실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유엔의 기후변화협약 논의에서도 기후 부채는 기후변화기금 설치라는 다소 막연한 약속으로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저자가 보기에 부채의 지배라는 고리를 끊는 일은 개인적인 차원으로도, 정치적인 차원만으로도 달성될 수 없다. 부채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던 GDP 중심의 성장 논리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채의 지배를 폭로하는 것 보다 몇 배 더 어려운 일로 여겨지겠지만, 저자는 다양한 상호부조적이고 비영리적 협동 경제의 맹아들이 존재함으로 일깨운다. 새로운 지속가능한 안정상태의 경제, 부담이나 치욕으로서의 빚이 아닌 서로의 공생 논리로 작동하는 경제를 위한 요소들 중 많은 것들이 이미 발명되어 일상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물교환 네트워크 공동체 화폐, 선물 경제, 해커 공간, 협동 주거, 자치 교육 등 특히 아나키즘 그룹들 사이에서 발전한 것들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인 실천과 기획들이다.

    저자가 희구하고, 또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부채반대 정치동맹, 청년과 노동자들의 동맹이 세계적 수준에서 조만간 가시화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적어도 월스트리트를 위시한 여러 나라의 광장 점거운동의 한 축을 이루는 진지한 ‘반체제’ 운동의 동학과 핵심 논리를 이해하고 수긍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차피 대안은 부채 사회의 비밀을 벗기는 데에서 출발할 것이고, 잘못된 현실에 대한 투쟁과 연대의 선언으로부터 빚어져 나올 것이다.

    부채저항 운동의 구호인 “당신은 빚이 아니다(You are not a loan)”가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You are not alone)”와 같은 발음으로 읽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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