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집단성폭행 사건
[기고] 강박증과 히스테리 사이에서
    2016년 06월 09일 10: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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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전체 주민에 공동책임을 묻는다

섬노예 사건에 이어 신안군 흑산도에서 또 다시 집단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가해 당사자뿐 아니라 신안군 전체 주민에게 공동책임을 묻는다.

공동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자칫 111개 섬마을과 그 몇 배의 무인도에 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지역 전체를 비하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책임을 묻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는 악행이 개인범죄가 아니라 공동체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김대두가 전남 광산군에서 17명을 살해했다 하여, 경남 의령의 우순경이 한마을 주민 56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하여, 고재봉이 강원도 인제에서 도끼로 살인을 하였다 하여, 화성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났다 하여, 광산과 의령, 인제와 화성 주민들까지 살인의 공범으로 매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억울한 희생에 공감하여 그 죽음을 애도할 따름이다.

신안군에 공동책임을 묻는 것은 범죄가 연속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난 범죄들이 갖는 공동체성 때문이다. 일련의 범죄들은 공동체 전체의 공조와 은폐 속에 자행되었음과 동시에 외지인 또는 공동체로 동화되지 못한, 배제당한 내지인을 대상으로 했다. 즉 개인이 개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아니라 공동체가 무력한 개인을 공동체에서 배제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범죄라는 것이다.

공동책임을 묻는 것은 선량한 개인까지도 범죄의 주범으로 매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섬에는 범죄라고는 모르는 선량한 주민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섬에서는 불법으로 인신을 감금하고 집단으로 성폭행을 저지른 주민이라도 타지에 나가서는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안군의 잇단 범죄는 공동체 범죄이며 마찬가지로 전체 주민의 공동책임 속에서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신안군 주민들은, 신안군에서 출생해 거주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모두 자기책임으로 생각하여 자정 노력을 하시라. 부모형제를 감시하고 친구와 이웃을 감시하고 행정기관을 감시하시라. 자신들의 무관심과 방조가 범죄를 조장했을 가능성에 통감하여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관심과 참여를 아끼지 말아주시라.

자치단체장은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시민교육을 실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겹겹의 수단을 강구하시라. 공동체 정신의 강화는 다른 것을 배제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포용과 조화에서 나오는 것임을 교육하시라. 임시방편의 조사와 수색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장치와 도구를 두텁고도 지속적으로 마련하시라.

신안군 전체 주민들은 집단적인 자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시라. 침묵과 은폐가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사소한 잘못이라도 끄집어 내 알리고 고쳐나가시라. 아름다운 섬들을 범죄의 온상으로 만든 혐의가 누구도 비껴가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반성하고 또 반성하시라.

지금 신안군에 퍼부어지는 비난 중에는 비합리적이고 반이성적인 게 많다. 주민들에게 수치심과 모욕감만 안겨주는 무조건적인 멸시와 비하가 상당수 있다. 잇단 범죄에 대한 비판이 신안군 전체 주민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데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외부의 자제와는 별개로 신안군 주민들 스스로는 비합리적이고 반이성적인 멸시와 비하마저도 업보로 여겨 집단적인 자정 노력에 나서야 한다. 고립되고 폐쇄적인 지역에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범죄는 공동체 전체의 자정 노력이 있지 않는 한 사라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촉구는 신안군뿐 아니라 밀양 등 공동체 범죄의 혐의를 받고 있는 모든 마을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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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 앞서 페이스북에 짧게 같은 취지의 글을 올린 일이 있다.(링크) 위의 글보다도 불친절한 생략이 많고 극단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취지는 똑같다. 43개의 댓글 중 동의를 표해준 것은 몇 개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 원색적 비난 일색이었다. 오독으로 치부하기에는 비난 댓들을 단 사람들 다수가 평소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보는 시각도 유사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전체 댓글을 분석해 비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자 했다.

아래 그림은 전체 댓글에 나타난 주요 비난 글을 성격이 비슷한 것끼리 묶고 해당 비난의 근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 문장을 표시한 것이다. 빨간 글씨의 앞부분은 비난의 내용이고 괄호 안은 글의 원래 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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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논란 지점을 중심으로 글의 취지를 도식화한 것으로(파란색은 댓글에 나타난 해석)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 흑산도에서 발생한 집단성폭행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범죄(이하 ‘공동체성 범죄’)이고 흑산도를 포함하는 신안군은 그러한 공동체성 범죄가 빈발하는 대표적 지역이다. 따라서 신안군 전체 주민들은 공동책임을 느끼고 사고 재발을 위한 자정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현재 덧씌워지고 있는 해당 지역에 대한 낙인을 벗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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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비난과 반박이 집중된 다섯 곳을 상세히 살펴보자.

“이번 집단성폭행 사건은 연속적인 공동체성 범죄가 아니다”

나는 이번 사건을 그간 알려진 섬노예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공동체성 범죄로 간주했다. 두 사건 모두 고립성과 폐쇄성이 강한 섬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간주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두 범죄 모두 발생지역의 고립·폐쇄성이 범죄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

우선 섬노예 사건의 경우 지역주민들뿐만 아니라 공권력까지 합세해 은폐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공동체성을 부인하기 힘들다. 반면 이번 사건은 여교사의 신속한 신고로 은폐되지 않고 바로 검거와 수사로 이어졌다. 은폐되지 않았고 공권력의 은폐 공조가 없었다는 게 섬노예 사건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까지도 공동체성 범죄라고 판단한 까닭은 여교사의 신고가 없었더라면 하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범죄의 배경이 된 지역이 갖는 고립·폐쇄의 속성, 거기서 비롯됐을 범죄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반응에 더욱 주목했기 때문이다.

1989년 7월 9일 전북 부안군 위도의 만성호 선주의 집 마당에서 김태석이라는 인물이 인신매매로 선원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들을 구해달라는 유서를 남긴 채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했다.(동아일보 1989-07-15) 1989년 1월에서 6월까지 6개월 동안 345명의 선원이 실종되거나 사망했다.(동아일보 1990-08-18) 사고사도 있겠지만 고의적인 경우도 상당할 것이다. 그리고 선원의 경우 불법적 감금과 강제노동의 가능성이 매우 높겠지만, 단지 선원이란 직업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다. 또 고립·폐쇄된 지역에서 불법적으로 인신을 감금하여 부당노동을 시키는 일은 내륙의 농촌지역에서도 발생하는 일이지만 훨씬 더 많은 경우가 도서지역에 해당한다는 것은 널려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성폭행은 어떠할까. 관련 통계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사건이 은폐됐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도서지역의 범죄를 다룬 몇몇 영화를 통해 은폐의 가능성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

1983년 작 안성기 주연의 ‘안개마을’은 마을의 이방인으로 남성들의 일상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주인공 깨철이 섬 부녀자들의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남자이고 마을 남자들에게 성불구로 알려진 깨철 역시도 성관계를 기피하지 않는다는 게 다르지만 고립·폐쇄된 지역 부녀들의 은밀한 공조와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은 공동체성 범죄의 속성에 해당한다. 2010년 작 서영희 주연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노예처럼 일하고 시동생에게 성적 학대를 받고 있는 김복남이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하나씩 죽이는 내용이다. 또 2014년 작 배두나·김새론 주연의 ‘도희야’는 마을 전체가 공모한 가운데 일어난 아동성범죄를 소재로 한다. 이들 영화가 섬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과장했을 수도 있지만 섬이 갖는 고립·폐쇄라는 특성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방인에 대한 주민들의 배타성, 그 안에서의 범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성범죄에 대한 섬 주민들의 인식, 그에 따른 무관심 내지 방조의 가능성은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교사가 꼬리쳐서”(채널A)
“서울에서는 묻지마 살인으로 사람도 죽이고 토막살인도 난다.”(MBN)
“공무원이, 그것도 처녀가 술을 그렇게 먹었느냐.”(JTBC)

위는 사건 직후 지역주민들의 인터뷰 내용이다. 물론 공정하지 못한 채널에서 선정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골라냈을 수 있다. 그러나 한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방송에서 비슷한 얘기가 반복된다는 것은 전체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주민들이 같은 시각으로 사건을 보고 있다는 것이 된다.

“특정지역 거론은 지역차별이다”

흑산도를 신안군으로 확대 및 특정한 것은 전라남도에 대한 편견이나 지역감정 때문이 아니라 현재성과 대표성 때문이다. 현재성은 지금 바로 그곳에서 발생한 범죄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대표성은 산간이나 농촌지역보다는 도서지역의 경우 어업 또는 염전업을 주로 하면서 공동체성 범죄의 발생 가능성이 높고 신안군의 경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섬으로 구성된 지역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신안군에 속한 830개 섬은 남한 전체 섬의 25%에 해당하며 그 중 111개가 유인도이다. ‘신안’과 ‘노예’로 인터넷을 검색했을 때 적지 않은 기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연대책임을 묻는 것은 연좌제이다”

공동체의 공조와 은폐 속에 발생한 범죄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공동체 전체가 범죄 발생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 지역 특성상 공권력의 증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공동체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외부에서 끊임없이 공동책임을 강조하며 내부의 자성을 요구해야 한다. 연좌제는 자기의 행위가 아닌 것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공동체성 범죄로 간주할 때 그 책임은 피고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연좌제는 사건을 단순해 개인들의 일탈행위로 볼 때 가능하다.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처벌이다”

주민들의 상호감시와 집단교육을 요구한 것을 군대 내 단체기합과 삼청교육대에 비유한 댓글이 있었다. 현행법은 지역 주민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감시와 교육조차도 주민들 스스로 수용하지 않는 한 실행 불가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구들은 주민들의 자성 속에 자발적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과거에 이런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6년 SBS 시사프로그램 ‘긴급출동 SOS24’에서 신안군의 현대판 노예청년을 방영한 뒤 신안군에서 주민 1백여 명을 대상으로 인권교육을 실시했다. 그 뒤에서 몇 차례 실시되기는 했지만 매번 일회성에 그치고 말았다. 행정기관의 요식적인 교육이 아니라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토론으로 지속적으로 인권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가야 한다.

더욱이 신안군에는 경찰서가 없다. 15개 파출소에 90명의 경찰관이 전부이다. 이번 사건을 목포경찰서에서 수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경찰도 공모의 혐의를 받고 있는 지역이지만 경찰을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서를 설치한다고 해서 불식될 일은 아니다.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야 한다.

“낙인찍기다”

신안군에 대한 낙인찍기는 이미 시작됐다. 이 글은 나까지 낙인을 찍는 데 합세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낙인찍겠다고 위협할 것이 아니라 곧바로 비방하고 매도하면 될 일이다. 이 글은 거꾸로 현재 증폭되고 있는 낙인찍기를 멈추기 위해서는 지역주민들의 자성과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취지이다. 지금 끓고 있는 양철냄비도 시간이 지나면 유야무야 될 것이다. 주민들의 자성과 행동에 의한 실질적인 개선이 없다면 차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더더욱 지우기 힘든 낙인이 찍힐 것이다.

강박증과 히스테리

위와 같은 상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취지에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책임을 연좌제로 읽고 낙인의 제거를 낙인찍기로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꾸로 곡해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주장을 계속하고 더욱이 상세한 주장에 앞서 거칠고 불친절한 언어로 비난을 자초하는 글을 내가 쓴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설명이 글의 문구에 대한 비난과 반박이라면 이번에는 비난하는 자와 비난을 감수한 자의 심리를 살펴보겠다.

우선, 비난의 이유를 보자. 비난 글 태반이 연좌제, 지역차별, 불법·부당한 강제력에 집중돼 있다. 이 셋은 모두 과거 군사독재 시절을 대표하는 행태에 해당하다. 양심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죄악이다.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글이 온당하게 읽혔다면 논란은 공동체성 범죄 여부, 신안군의 대표성 여부, 개선의 방법에 초점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적과 이견을 건너뛴 채 곧장 세 가지 금기로 비난이 모아졌다. 이것은 신경증의 일종인 강박증으로 볼 수 있다. 금기가 반복되지 않게끔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박증을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박증이 “이래야 돼!”라면 신경증의 반대 증상인 히스테리는 “이러면 안 돼!”에 해당한다. 강박증이 ‘의무의 감옥’이라면 히스테리는 ‘불안의 감옥’이다. 강박증이 미래와 개선에 대한 집착이라면 히스테리는 과거와 기피에 대한 집착이다. 다시 말해 히스테리는 과거에 경험한 공포를 반드시 기피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금기와 관련한 민감한 문제를 거칠고 생략이 많은 불친절한 언어로 뱉어낸 나는, 여성이라는 존재에 근거한 공포와 불안을 기피하기 위해 히스테리성 발작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필자소개
대학과 대학원에서 차례로 역사학과 행정학과 정치학을 전공했고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사회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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