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혐’의 기원과 구조?
        2016년 06월 08일 12: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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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의 끔찍한 “강남 살인 사건”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한 개인의 정신질환에 의해서 발생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일베적’ 경향의 인터넷 게시물들을 보노라면, 거의 살인으로 이어질 것 같은 농도의 “여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죠.

    물론 그런 경향의 남성들이 혐오하는 대상들도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컨대 외국인이나 호남인에 대한 혐오가 (다행히) 아직도 물리적인 파괴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과 달리 “여혐”은 이미 섬뜩한 살해로 이어졌습니다.

    아울러 성추행에 대한 남성 사회의 관용적(?) 분위기나 데이트 폭력부터 가내 폭력까지의 각종의 여성에 대한 폭력 행위들의 지속 내지 흉악화는, 이 문제의 보다 심층적 맥락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킵니다.

    이런 폭력들을 “가부장적”이라 부르는 것도 틀리지 않겠지만, 사실 “여혐”은 가부장제 사회의 “정상적”(?) 심성과 좀 다르기도 합니다. 대개 가부장적 남성들이 여성을 열등한 “집안”의 구성원, 즉 모성적 기능과 가사노동의 전담자 내지 결정 능력이 결여된 피보호자 등으로 보면 보지 굳이 “혐오”까지 할 것도 없습니다.

    강남역 포스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크잇들

    “여혐”은 가부장제적이면서도 가부장제의 어떤 위기적 상황, 그리고 그 위기적 상황 속에서의 또 새로운, 거의 파쇼적인 남성우월주의적 심성의 탄생을 알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위기는 결국 신자유주의 한국 속에서의 남녀관계의 “시장”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유관하리라고 봅니다.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는 남녀관계만큼 시장화된 관계도 찾아보기가 힘들죠. ‘듀오’ 등 결혼정보업체 사이트를 한 번 구경해보시죠. 남녀 결합은, 거기에서 면밀히 계산되어지는 재/학/외모력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런 연애/결혼 시장의 작동방식도 그 근저에서는 충분히 가부장적이죠.

    남성이 충분한 학/재력을 갖춘 뒤 결혼이라는 거래를 통해서 육아/가사 노동자, 즉 집안 내의 한 명의 유사 피고용자를 득하는 (사오는) 셈입니다. 이와 같은, 가부장성이 짙은 거래는 남성의 경제력이 지속되는 한 지속되고, 그 경제력이 소멸될 경우 여성이 가출되는 등 많은 경우에는 “거래 중단/취소”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매우 가부장적인 연애/결혼 시장에의 진입 장벽이, 돈이 “다”인 사회에서는 아주 높다는 것이죠.

    즉, 가부장적 특권을 누리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남성이 데이트 단계부터 데이트 비용이라는 원천적 투자를 해야 합니다. 결혼 단계로 가면 남자 측으로부터의 주거 마련 비용 등이 문제가 되고… 한국의 가정이 일종의 소회사라면, 그 사장 격인 남성 “가장”이 창업자본을 손에 쥐어야 합니다. 그게 없다면? 병영화된 가부장적인 자본제 사회에서는 군대에 갔다 와야 – 내지 “신의 아들”로서 면제돼야 – “남자” 자격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사실 “돈이 있어야” 가부장제적 의미의 “남성 자격”이 부여됩니다.

    한데 성장시대 사회와 달리 신자유주의적 대한민국의 번식 가능한 일생의 단계로 진입하는 상당수 젊은 남성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회사 “창업 자본”이 주어질 리도 없고, 뭔가가 주어진다면 그게 학자금 융자를 받고 나서 생기는 졸업 후의 엄청난 빚입니다. 이미 빚쟁이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은 모기지론이라는 이름을 빚을 더 져야 주거 마련이 가능해지고, 그것도 “취직”이 돼야 가능하고, 취직은 이미 하늘의 별따기이고… 오늘날 젊은 남성이 가부장적인 지배자가 되고 싶어도, 출발부터 데이트에 충분히 투자해서 그런 지배자로서의 기반 다지기가 지난하다는 말입니다.

    한데 동시에, 이미 계층이동이 불가능한 준세습 신분사회에서 결혼적령기의 여성들이 꼭 자신보다 “지체”가 더 높은, 다른 남성들을 선호함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계층이동을 계획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렇게 가부장적 데이트/연애/결혼 시장으로부터 “퇴출” 당하는 것처럼 느끼는, 끝내 가정의 지배자가 되지 못한 “지배자 후보생”은, 결국 이 상황에 대해 혐오 감정과 폭력으로 대응합니다. 이게 바로 그 살인적인 “여혐”의 기반이 되는 정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여혐”은 관용해서 안 될, 톨레랑스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인종적 혐오 등과 마찬가지 말이죠. 서구 사회 하층 백인 사이의 인종적 혐오 감정과 한국적 “여혐”의 발생 구조가 상당히 흡사하기도 한데, 어쨌든 그 두 정서는 사회에서는 자리 잡으면 절대 안 되죠. “여혐”은 분명히 사회적 운동의 투쟁 대상이 돼야 하고 근절돼야 하죠.

    한데, 우리는 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병리적인 “여혐”을 낳은 것은 대한민국의 극도로 병리적인,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시켜 놓고 다수에게 인생 출발기에 그 어떤 경제적 안정도 주지 않는 게 한국 사회죠.

    남성들의 “여혐” 사고나 “여혐” 행위가 매우 악한 것인데, 또 그만큼 남녀 구분할 것도 없이 모든 가난뱅이들에게 연애를 “사치”로 만든 이 사회가 극악무도하기도 합니다. 남성들도 당연히 우선적으로 그 가부장적 습성 등에 대해 반성해야 하지만, 한국형 신자유주의 사회/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않고서는 “여혐”의 발본색원이 지난하리라고 봅니다. 슬프지만, 이게 슬픈 진실인 듯합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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