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당의 왜소화,
    진보정당 정체성 상실이 핵심 이유"
    의원단 연속워크숍 특별강연 - 최장집 고려대 교수
        2016년 06월 07일 11: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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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당은 의원단 연속워크숍을 통해 각계 인사들의 비판과 조언 등을 듣는 ‘광폭 경청’ 릴레이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첫 번째로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에 이어 7일에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이후 탈북자 출신의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와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등의 강연이 이어질 예정이다.

    최장집 교수의 강연은 정의당이 새누리당과 더민주, 국민의당과 질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진보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사회적 지지 기반, 이념적 지향의 미약함에 대한 지적과 제언, 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건설할 것을 주문했다.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과 함께 현대 사회에서 체제 단절과 같은 구상은 현실성을 상실했다며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에서의 정치적 포지셔닝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정당의 중심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의당이 대표해야 하는 사회적 기반과 이를 실제적으로 대표 대변할 수 있는 정당체제로의 전환을 제언했다. 과거 운동정치의 ‘최대정치’에서 현재 정당들의 ‘무이념, 탈이념’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지적과 함께 여전히 ‘이념’의 유효함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편 젊은 세대 육성론을 강조하며 “새로은 세대의 새로운 정치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은 곧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만든다. 사실 정의당을 보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선함, 창의성, 생동감, 약동하는 정신(esprit)과 같은 어떤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뼈아픈 지적을 하기도 했다. 다소 긴 글이지만 공유하고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에 최 교수의 강연 원문을 그대로 전재한다. 강조는 편집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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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어가는말

    1) 정의당 의원단 워크숍 강연 초청을 기쁘게 생각한다.

    오늘의 강연주제는 4.13 총선 이후의 정의당이다. 오늘의 정의당은 엄중한 상황을 넘어 위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정의당이 처하고 있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당의 진로를 중심으로 나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2) 4.13 총선은 어떤 선거였나? 선거의 의미가 특별한 것이어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어떤 전환점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나.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 권위주의적 역진을 뚜렷이 드러내는 현 정부의 퇴행을 일정하게 억지할 수 있었던 것이 지난 총선의 가장 긍정적인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여소야대를 가져온 투표 결과는 정부여당 지지표의 이탈로 나타난 항의투표, 그 이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야당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결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총선은 이슈 없는 선거였고, 현 정부여당의 국정운영 방향과 정책기조에 대해 야당들이 어떤 비전이나 설득력 있는 대안적 정책방향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야권 내의 더민주, 국민의당 간에, 그리고 보수적인 정부여당과 야당들 간의 별다른 차이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총선에서 진보적 의제는 배제됐고, 진보적 의사가 표출될 수 있는 통로는 없었다.

    3) 정의당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의당의 역할은 군소정당의 지위로 극도로 왜소해졌다. 여기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진보를 대표하는 것을 표방하고, 또 그러한 위치에 있었던 정의당이 야권의 두 주류정당과는 사이즈가 다를 뿐 진보정당으로 그 자체의 특징과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갖게 되는 질문은 진보를 표방하지만 도대체 정의당은 어떤 정당인가? 정의당을 지지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즉 정의당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었지만 정의당이 왜소화되었다면,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정체성의 상실이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오늘 나의 강연의 주제는 정의당의 존재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에서의 한 진보적 정당으로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정의당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정당 정체성의 문제

    1) 현재 정의당이 직면하고 있는 핵심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것은 두 수준에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진보정당운동의 관점에서 정체성의 상실이다. 다른 하나는 정의당이 창당 4년차에 있지만,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체성은 무엇보다 조직으로서 당의 핵심내용으로서 당의 노선, 정책내용과 프로그램, 이를 입법화하고 정책 수행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출발점으로 한다. 정체성 문제는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당의 기본노선, 비전, 정책과 관련된 차원은, 합리적, 이성적, 과학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비합리적, 감정적, 심리적 차원이다. 정치인들이든, 이론가든, 정당을 이해하거나 운영하거나 또는 정당 발전을 도모할 때 자주 간과하게 되는 문제는, 이 두 번째 차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곧 정당의 표출적 차원(expressive dimension)에서 발생하는 아이덴티티의 문제이다.

    2) 당의 기본노선과 비전, 이념과 가치, 구체적인 정책프로그램을 유권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통해 지지를 호소하는 조직으로서의 정당 행위는 당과 지지집단 사이의 유대를 발전시키는 아이덴티티 형성의 출발점이다. 당과 당의 비전과 가치, 정책대안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특정의 사회적 인구집단이 지지집단 사이에서 발전하는 일정한 시간 동안의 지속적 유대가 발전되면서 아이덴티티가 형성된다. 당과 당의 사회적 기반이 되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발전하는 유대는 곧 정서, 열정, 감정이 공유되고 강화되는 채널인 것이다. 이러한 정당 아이덴티티의 문제는, 정치와 정당의 본질적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선거 경쟁에서 승리하여 당의 가치와 정책을 실현하고, 공직을 획득하는 것이 권력의 차원이라면, 정체성의 문제는 세계를 보고, 사회질서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하는 차원이다. 하나의 정체성을 선택하거나, 또는 긍정하는 것은 이념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가치와 원칙의 문제와 관련된다.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은, 특정 방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다른 정체성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 종교, 민족, 인종, 성, 계급 등등. 그렇기 때문에 이 차원에서의 문제는, 보다 감정적, 정서적, 이데올로기적, 비합리적 갈등, 즉 우리와 그들 간에 훨씬 더 강한 대립을 유발하고 상대적으로 잘 변하지 않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정치, 민주주의의 실천의 어려움은 합리적 차원과 비합리적 차원이 결합돼 있다는 점이다. 정당은 이들 사이의 접점을 조직화한 정치조직이다. 위의 두 요소 가운데 어느 한 차원에서만 정당이 조직되고 활동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고, 성공하기 어렵다. 이점에서 볼 때 정의당의 정체성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3) 그렇다면 정의당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확립하고 또 강화하는 문제는, 당 전체의 과업이라 하겠는데, 우리는 이를 세 수준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정의당은 누구를 대표하나, 즉 사회적 기반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② 정의당의 이념은 무엇인가. ③ 조직으로서의 당은 어떤 내용을 가져야 하나. 이 세 수준에서 정의당이 어떤 내용을 가져야하는가 하는 것이 오늘의 강연 주제라 하겠다.

    3. 누구를 대표하나?

    1) 정의당의 사회적 기반은 무엇인가

    – 한국의 모든 주요정당들은 모두 “포괄정당”(catch-all party)이다. 4.13 총선 과정을 볼 때 정의당 또한 포괄정당임은 마찬가지이다. 포괄정당이라는 말은 각기의 정당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이해관계, 가치, 의사, 열정 등에 있어 서로 상이한 다원적인 갈등구조에 기초하여, 이들 특정의 인구집단들을 대표하기보다는 국민 전체라는 총합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전체, 국가전체의 이익을 추구하고, 이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정당들이 국가와 사회전체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고자하되 정당으로서 사회의 특정 인구집단들의 권익, 가치, 의사를 대변하고 이를 통해 뚜렷이 차별적인 대안적인 국가운영의 지향과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정당들이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식적인 당의 목표나 정책, 내거는 슬로건이나 레토릭에서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정당이 행위하는 실제의 내용에서는 차이가 미미하다. 사회전체의 이익과 의사는 부분이익/ 특수이익들로 구성돼있다는 전제와 아울러 이들 사이에는 크든, 적든, 일정한 갈등이 있다는 다원주의적 사회구조에 대한 관념이나 이해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정의당을 보자. 작은 포괄정당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보수적인 새누리당에 반대한다는 것 이외에 더민주당이나, 국민의당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불분명하다. 지난 총선을 통하여 이 문제는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났다.

    정의당은 누구를 대표하고, 누구를 위한 정당인가? 당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불분명하다. 있다하더라도 매우 추상적 수준에서 그럴 뿐이다. 정의당이 적어도 한국정당체제 내에서 진보를 표방한다고 한다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류정당들- 더민주, 새누리, 국민의당—은 배타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당은 아니다. 그들은 성장지상주의가 가져오는 사회적 양극화, 사회해체, 빈부격차의 증대, 노동문제를 포함하는 광범한 사회적 비용이 성장과 균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 위에 성장과 분배, 국가주의와 다원주의가 균형될 수 있는 대안적 발전모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정의당은, 기존의 성장지상주의가 창출해낸 또는 그것과 병행했던 국가의 실패, 시장의 실패, 시민사회의 실패가 만들어낸 사회적 약자, 소외된 사회집단을 대변하는 정당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국가의 실패가 가져오는 폐해는 편향적으로, 또는 불비례적으로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에게 가해져왔다. 그들의 삶의 조건에 불비례적으로 가해지는 부정적 효과는 ‘법의 지배’의 실패를 동반하는 국가실패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그것의 ‘부수적 폐해’가 결합된 것이다. 시장경쟁에서의 열패자들, 이들 각기의 영역에서 제도권에서 배제된 사회집단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그들의 소리, 요구 그리고 그들의 가치와 열정을 대변해야 할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은 정치의 제도권에서 배제돼 있을 뿐만 아니라, 언론으로부터도 이들의 소리는 표현되지 못한다. 그럼으로 사회에서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얼굴 없는 사회집단인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정의당이 대표해야할 잠재적인 인구집단이고, 당의 사회적 기반이 아닐까. 이들의 다수는 사회적 양극화에 있어 그 하위층이 중심부분을 형성한다. 정치학자 박상훈 박사가 그의 ‘정당의 발견’에서 말하듯이, 이들은 그 어떤 정당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고 투표율도 극히 낮은 그렇기 때문에 제도권 밖에서 존재하는 정치적으로 잠재적인 사회집단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규모가 기존의 주류정당 못지않게 큰 제3의 정당체제를 구성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정의당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 아닐까 생각한다.

    4. 정의당의 이념적 선택- 자유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사이에서

    1) 현재 정의당의 공식적 이념이 어떤 것인지는 고사하고, 어떤 종류의 지배적인 이념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아예 어떤 이념적 정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무이념적 상황이다. 현재의 정의당을 민주화 이후 진보적 정치운동의 최신 버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80년대 민주화 이후 진보적 민주화운동 내지 정치운동의 前史를 갖는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거기에는 격세지감이 있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민주화 이후 일정기간 동안 진보적 정치운동이 일정하게 지닌바 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변혁적 이해방식을 담는 ‘최대정의적/최대강령적 이념(maximalism)과 현재의 무이념적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그 변화는 엄청난 것이다. 나는 80, 90년대 민주화를 사회구조의 총체적 변화를 추구했던 진보파들의 이상주의적 열정과 친화성을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정의적 이해방식과,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주화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추구했던 진보파들의 있을 법한 이념적 지향이라는 이들 兩者간의 결합은, 미스매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미스매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진보파들이 민주화를 이해했던 방식, 즉 민주주의는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라,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2) 이 점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소련과 동구에서 현존했던 사회주의의 붕괴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세계관을 달리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말하는 ’역사의 종언‘은 내용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역사가 종결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종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은 냉전시기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틀에서 한 체제에서 어떤 다른 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점에서 사회에 대한 어떤 대안적 비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대립은 민주주의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개방사회냐, 권위주의적, 또는 전체주의적인 폐쇄적인 사회냐 하는 대립축이 있을 뿐이다. 동구에서의 민주화는 이러한 새로운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민주주의국가들에 있어 보수적인 우파는 복지국가를 수용하고, 이를 운영하는 국가의 범위와 규모의 팽창을 허용한 일방, 좌파는 국가권력을 제한하고, 시장경제 운영의 기초로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 주류정당들의 프로그램들은 모두 이 새로운 현실을 수용하는 것으로 변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환경에서 국가 간에 증가하는 경쟁압력에 대응하여 각국은 중상주의적 성장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나 미국의 복지국가와는 다르고, 복지의 발전에 있어 낙후돼있다 하더라도 그 구조는 동일하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들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든,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든 모든 정당들은 극히 좁은 이념적 패러미터 내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앞에서 말했듯이 4.13 총선에서 모든 정당들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특징을 만들어내는 환경이 된다.

    3)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의 세계에서도 정치영역에서 이념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의당과 관련하여 이념을 두 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한 차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냉전시기를 지배했던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은 끝났다는 사실이다. 자유에 이르고, 평등에 가까이 가는 길은 한 체제에서 어떤 다른 체제로의 이행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문제중심으로, 그럼으로 부분개혁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는 접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점에서 그것을 실용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의 존재이유, 그 필요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지배적인 이념이라 할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보자. 진보적 관점에서 자유주의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부족하거나,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에 대응하는 대표적인 경쟁적인 이념은 사회주의이다.

    이 두 이념의 관계를 통해 문제를 볼 수 있다. 하나의 관점은, 자유주의는 사회주의를 포함하는 다른 지적 전통 없이도 평등주의적 목표를 추구할 지적 자원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것이다. T.H. 마샬의 시민권 이론은 (시민권→정치적 권리→사회적 권리) 여기에 잘 상응한다. 여기에 대응하는 다른 관점은, 자유주의는 사회정의와 평등주의적 가치를 핵심으로 했던 사회주의 (여기에서 사회주의는 현실적으로 동구에서 존재했던 사회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19세기로부터 20세기에 걸쳐 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했던 사회주의를 말한다)를 필요로 하고, 그것과 결합할 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의 틀에서 말한다면, 그 차이는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다.

    4) 20세기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로 존경받는 존 롤스의 이론은 이 문제를 볼 수 있게 하는 훌륭한 사례이다. 그의 ‘정의론’은 20세기 자유주의 철학의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분배의 정의를 중심으로 한 윤리이론은 그 중심 원칙들에 있어 자유주의에 내장된 평등의 가치를 끌어내 활용한 자유주의의 재해석이자 확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롤스의 이론은, 자유주의의 핵심가치는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의 핵심가치로 확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의론‘의 핵심은 위계적으로 구성된 두 원칙을 둘러싼 문제이다. 첫 번째 원칙은, 각 개인에게 평등한 자유의 원칙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두 번째 원칙은 각 개인에게 일정 수준의 물질적 자원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가능한 한 개개인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보장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두 번째 원칙은 재산과 권위의 불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편익을 보상해주는 결과를 가져올 때만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최소의 편익의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보상해 줄 때만이 그러하다. 이른바 ‘차별성의 원칙‘이 그것이다.

    자유주의에 치중하여 이론의 논리구조를 해석한다면 위의 위계적 원칙들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가치를 포용하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유를 우선시하면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보다 최소편익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배분을 강조할 수 있다. 즉, 사회주의적 가치를 불러들여 롤즈 이론의 애매함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나 정치현실에서 자유와 평등의 동맹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치는 지적, 정치적 공간 내에서 결합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우리는 정치이론이나 철학사에 있어 풍부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의 계보를 발견할 수 있다. 현실정치에서도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통해 이 두 가치는 결합될 수 있다. 예컨대 정의당의 이념적 정향이 이런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관점 사이에는 활발한 내부 논쟁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5) 서양에서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보통 구분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국가주의, 애국, 민족주의, 경제발전주의 이외에 이를 비판적으로 보거나 말하는 것을 부정시하고, 자주 그러한 비판적 관점, 가치, 비전에 대해 이데올로기로 색칠하는 것이 또한 한국적 정치문화의 한 특징이기도하다. 이러한 정치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환경은, 정당정치의 이념적 패러미터의 폭을 축소하고, 정치의 장에서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금기시하는 경향을 만들어왔다. 이 점을 고려하여 여기에서는 이데올로기라는 말보다는 좀 순화된 이미지를 갖는 이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러한 환경은 한국정치를 이념은 갈등의 원천이고, 그것을 동반하는 나쁜 의미로 이해하면서, 무이념, 무갈등을 함축하는 정치언어들을 불러들인다.

    한국정치에서 무이념적 환경은, 갈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를 경쟁과 타협을 통해 일정한 컨센서스에 도달하는 정치과정의 본질을 부정하고 정치가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데 대한 목적의식과 가치를 동시에 부정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오로지 기존의 국가목표와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에 대한 컨센서스만이 수용될 뿐이다. 그럼으로 무이념은, 행정적이고, 테크노크라틱한 정책 산출의 가치만을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세계의 보편적인 이념적 가치정향, 퍼스펙티브, 비전 등에 대해 폐쇄적이 되도록 하고, 열린 이념적 지향과 한국사회의 지적 환경, 정치문화의 개방성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폐색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럼으로 무이념은, 민주화이후 진보파들이 추구했던 과도한 이상주의에 대한 정반대의 또 다른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통과의 단절의 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6) 당 바깥을 향해 새로운 정의당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으로서 자유주의를 포함하는 열린 이념, 열린 문화를 말한다고 한다면, 당 안을 향해 여러 경쟁적인 이념, 이들 간의 결합, 또는 부정에 대해 토론, 비판, 이견들이 논쟁될 수 있는 내부 환경의 형성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전당대회는 이런 내부토론의 최종적이고 가장 큰 장으로서 역할을 가질지 모른다. 이념이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토론, 이견, 비판이 없는 정당은 정신적으로 죽은 정당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주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한국정치사에서 존재했던 모든 정당들은 당이 견지했던 지배적인 어떤 이념, 가치, 즉 정통이념(orthodoxy)을 빼고는 어떤 다른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즉 무이념은 강력한 정통이념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당 내 파당들, 또는 계파들은 존재했으나, 당의 이념과 노선을 둘러싼 이들 간의 토론은 존재하지 않았고, 지배하는 다수파 또는 당의 방침에 도전하는 소수 또는 비주류의 비판이나 이견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한국정당 내에서 존재하는 계파들은, 권력경쟁이나 분점을 위해 위계적으로 형성된, 그렇지만 아무런 대의도 갖지 못한 파당 이상이 될 수 없었다.

    7) 이 점에서 정의당은 당 내부에서 토론과 심의가 가능한 최초의 정당운영이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진보적인 정당들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에 대해 여기에서 새삼 말할 필요는 없다. 정의당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무이념은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유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 위에서라 할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정의당의 지도자들과 당원들이 스스로 선택해야할 문제이고, 이 과정을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때 또는 그 과정에서 정의당의 정체성은 크게 부각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4. 조직으로서의 당의 건설- ⑴ 정책전문분야와 능력

    1) 정의당이 앞으로 크게 발전할 잠재력을 가졌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정의당은 어디까지나 작은 정당이다. 따라서 정의당은 큰 주류정당에 비해 특히 집중성과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가지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첫째, 현대정치의 이슈와 사안들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발달된 지식정보산업을 동반하는 산업/후기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높은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문제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당이 상대하고 다루어야 할 대상은 국가의 잘 발달되고, 강력한 전문지식의 인적집단이 관리하는 관료행정체제이다.

    둘째, 앞의 것보다 큰 문제이지만, 민주화, 민주주의의 내용과 관련된 문제에서 발생한다. 민주주의이론 가운데 매우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하나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치체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분체제”들 (partial regimes)들의 총합이라는 관점이다. 이 이론의 주창자는, 기존의 권위주의국가에서 민주화한 통치구조에서 정책 결정의 중심체인 정부관료 행정체제와 의회, 사법부 등의 국가기구들과 대표의 체계, 정책의 인풋 측면을 구성하는 정당, 사회집단, 결사체들 간의 관계에서 민주화에 의해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가 하는 것을 부분체제를 통해 관찰한다. 선거제도, 압력체제, 대표체제, 정책 상호협력체제, 수혜-피수혜자 관계의 체제 등, 각각을 부분체제로 이해한다.

    2) 그러나 이런 방식 말고, 정책 및 이슈 영역을 중심으로 부분체제를 볼 수도 있다. 법체제, 사회정책영역, 복지정책, 노동문제 및 노사관계, 시장구조, 국가관료체제 및 국가의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접합되는 거버넌스, 관치경제의 내용과 방향, 재벌개혁, 교육제도, 대북정책과 외교정책 등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전진하고, 역진되기도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여러 정책영역들은 그 발전/역진의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것 들을 모두 합친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전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분체제의 결합으로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정치체제 전체를 “민주 대 반민주”라는 총체적 구분을 피하도록 하는 이점을 갖는다. 특정의 부분체제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체제 전체의 문제로 이해한다면 사회의 주요영역들에서 “민주 대 반민주”투쟁이 전체 사회에 범람하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3) 우리가 부분체제의 관점 또는 이론을 활용할 때, 작은 진보적인 정당으로서 정의당은 어떤 영역에서 전문성과 집중성을 강화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당의 중심과제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정의당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정체성을 확립코자 한다면 자연히 선택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들과 관련된 정책영역에 집중하고 전문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정책, 노동문제와 노사관계, 교육과 취업, 결혼, 출산을 포함하는 청년문제 등을 정의당의제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5. 조직으로서 당의 건설- ⑵ 젊은 세대 정치가들의 발굴과 욕성

    1) 현재 한국의 정당체제를 구성하는 정당들 가운데, 정의당은 가장 순수하게 80년대 운동을 기반으로 한 정치운동으로부터 발전했고, 그 연속선상에 있다. 당의 여러 활동가들은 운동의 전통과 문화 속에서 현재에 이르렀고, 그런 것만큼 민주화 이후 정치적 운동의 전통과 정조를 유지하는 정당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정의당만큼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정당도 없을 것 같다. 당 내의 지도부와 활동가들도 그렇고, 당 밖의 지지자들도 그렇다. 과거 운동세력은 세대교체와 운동의 해체로 인하여 그리고 젊은 세대의 문화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구세대와의 단절 내지 이질감으로 인하여 전통은 가히 단절적이라 할만하다.

    이 상황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정치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은 곧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만든다. 사실 정의당을 보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선함, 창의성, 생동감, 약동하는 정신(esprit)과 같은 어떤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당이 창출하는 새로운 문화가 없고, 새로운 비전과 가치가 없고, 매력이 없다면, 그리하여 젊은 세대에 어필할 수 없다면, 그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2) 내가 갖는 정의당에 대한 이미지 또한 새로운 주류정당에서 느껴지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고, 그러다보니 그저 작은 주류정당 같다. 당과 신세대가 소통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정당보다도 신세대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정의당의 미래는 극히 어둡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현재 정의당 지도부의 최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정의당은 젊은 세대 인재 발굴과 관련하여 관련된 과거의 사례에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진보적인 정당들의 계보를 되돌아볼 때 차세대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문제는 당내 이념갈등으로 표출되는 파벌들 간의 경쟁 내지는 분열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진 바 있었다. 그럼으로 훌륭한 차세대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문제는, 당내 이념갈등을 토론과 논쟁을 통해 극복하면서 이념적 컨센서스를 형성하는 과정, 또는 어떤 이념적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당 발전을 위해 공존하고 연대하고 협력할수 있는 개방적 당내 문화를 필요로 한다. 이점에서 다음세대의 지도자그룹을 육성하는 문제는, 당이 얼마나 성숙했느냐 하는 정도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6. 조직으로서 당의 건설- ⑶ 정의당의 대표체계의 재구성

    1) 한국정당체제에서 정당들은 위만 있고 아래가 없는 정당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은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으로부터 발생하고,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정당들은 대통령제를 떠받치는 정치결사체이고,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 권력을 획득코자 하는 투쟁을 위해 존재이유를 갖는다. 따라서 정당은 권력의 하향배분을 실현하는 위계적, 권위주의적 권력배분의 정치적 행위자이고, 매개자이다.

    그와 맞물린 현상으로서 정당들의 사회적 기반은 허약하고, 사회경제적 문제로부터 발생하는 갈등, 요구, 의사, 이익들을 위한 정당들의 대표기능이 약화되고 쇠퇴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정당과 사회의 다원주의적, 사회적 결사체들의 연계는 허약할 대로 허약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정당이 아닌 국가와 사회의 자율적 결사체들 간의 관계는 혜택과 편익배분의 권위주의적이고, 온정주의적인 관료적 배분의 고리로 연결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지방자치 수준에서도 정당과 결사체 간의 권력배분 형태는 중앙정부수준과 같은 패턴이 재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2) 그러나 전체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가 어떠하든, 사회적 이익과 요구의 대표기능이야말로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답게 만드는 정당의 가장 본질적인 역할이다. 그러한 환경 하에서 자율적 결사체가 중심에 있는 다원적 사회구조와 정당의 사회적 기반 사이의 상호관계가 순기능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정당의 사회적 이익의 대표 역할은, 사회적 이익, 요구, 가치를 국가의 권력중심과 정책결정구조에 인풋하는 당의 인풋 기능이야말로 정치체제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인풋 기능의 약화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보다 권위주의의 상대적 우월성이자 장점이라 할 아웃풋 기능의 강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정당의 대표기능의 구조를 특징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정당의 중심 역할의 하나가 특정 정당의 사회적 기반을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인구집단의 이익과 요구, 의사를 대표하는 선거 경쟁을 위한 후보의 선발이다. 즉 정당의 사회적 특수이익들의 대표기능이다. 그런데 정당이 그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대표(대표가 되기 위한 후보)의 선정이 ‘사실상의 대표’ 또는 ‘명목적인 대표’가 아닌, ‘실제의 대표’(actual representation)가 중심적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는 실제의 대표는 정당에 의해 선발되지 않는다.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선거제도, 정당과 사회의 다원적인 이해집단들 간의 직접적인 연계의 부재 내지는 허약함, 정치에 있어 여론의 압도적 역할, 선거과정에서 매스미디어, SNS와 같은 의사소통매체의 엄청난 영향력이라는 요인들은, 각 사회영역에서의 엘리트, 전문가, 유명인사들을 포함하는 명사집단의 성원들이 정당의 선거후보선정에서 압도적인 이점을 향유하도록 한다. 특히 한국의 현행 선거제도에서 정당투표제를 통한 비례대표제는, 이들 명사집단들의 정치권으로의 진입의 주요 통로가 된다.

    여기에서 정의당도 다른 주류정당과 이러한 대표선정의 내용에 있어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나는 앞에서 정의당이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정당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 사회집단들로부터 사실상의 대표가 아닌, 실제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대표 선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실제의 대표가 의미하는 것은, 대표되는 사회집단들이 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독일의 사례를 보면, 기민당이나 사민당의 노동의 대표성은, 단순히 노조가 파견하거나, 노조와 관계가 있는 어떤 인사를 호선하는 것이 아니라 노조가 대표성을 가지면서 당내 의사결정기구 내로 들어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특정의 사회적 이익이 당에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때, 이들 사회적 약자집단들이 자율적 결사체로 형성되고, 강화되어서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진보적인 정당은 사회의 다원적 구조를 발전시키고, 시민사회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진보적 정당의 정체성은, 정당과 그 사회적 지지자 그룹, 사회적 기반을 구성하는 성원들 양자 사이에서 공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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