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
    [그림책 이야기]『흰 눈』(공광규 시/ 주리 그림/ 바우솔)
        2016년 05월 30일 09: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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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하고 고마운 시절

    참 신기하고 고마운 시절입니다. 요즘은 저더러 직접 고르라면 아마도 결코 고르지 않을 책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물론 예전에도 제 취향이 아니더라도 검토해야 할 책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취향이라는 편견의 벽을 뚫고 본질을 보게 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참 미숙했고 여전히 미숙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깨우쳐 줍니다. 게으른 서평가인 저에게도 꾸준히 책을 보내주시는 여러 출판사 분들이 저의 편협한 눈을 더 밝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저와 모임을 함께 하는 그림책을 사랑하는 여러분 덕분에 정말 다양한 작품들의 진미를 맛보게 됩니다.

    그동안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열어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일이 즐겁습니다. 저와 그림의 취향은 다를 지라도 작품 안에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눈

    주리 작가의 마술

    그림책『흰 눈』의 표지에는 하얀 벚꽃송이들이 가득 합니다. 마치 흰 눈이 아니라 벚꽃이 주인공인 것 같습니다. 벚꽃송이들 뒤로는 배경처럼 시골집과 누군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벚꽃송이와 시골집 사이로 꽃잎들이 흰 눈처럼 휘날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경탄할만한 이 아름다운 표지를 저는 아주 무심하게 넘겨봅니다.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은 제 취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면지는 상대적으로 단순해서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더구나 꽃잎이 흩날리는 하늘을 과장해서 벚꽃송이가 통째로 휘날리는 것으로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과장하고 ‘뻥’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은

    -본문 중에서

    마침내 첫 장면에서 흰 눈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회색빛 겨울 하늘과 그 사이로 흩날리는 흰 눈이 정말 꽃잎 같습니다. 표지와 면지에서 흰 눈 같은 꽃잎을 날리더니 첫 장면에서 꽃잎 같은 흰 눈을 날린 것입니다. 주리 작가는 세 장의 그림으로 꽃잎이 흰 눈이 되고 흰 눈이 꽃잎이 되는 마술을 보여줍니다.

    공광규 시인의 마술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본문 중에서

    공광규 시인은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매화나무 가지에 앉았다고 합니다. 주리 작가의 그림에도 하얀 눈이 내려와 하얀 매화꽃이 됩니다.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는다

    -본문 중에서

    이 장면에서 마침내 누군가 시골집의 문을 열고 나옵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왜일까요?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더불어 마당에 내려앉은 꽃잎이 이제는 꽃잎으로 보이지 않고 흰 눈으로 보입니다.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매화꽃이 되고 벚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공광규 시인은 네 줄의 시로 하얀 눈이 매화꽃이 되고 벚꽃이 되는 마술을 보여줍니다.

    눈은 계속 내린다

    이제 눈은 조팝나무 가지에도 앉고 이팝나무 가지에도 앉습니다. 온 세상의 흰 꽃은 모두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내려앉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앉다가, 앉다가 더 내릴 곳이 없으면 눈은 어디에 내려앉아야 할까요? 공광규 시인과 주리 작가는 이제 두 번째 마술을 보여줍니다.

    공광규 시인의 상상력은 따뜻합니다. 차가운 눈을 어쩜 이렇게 따뜻하게 그려냈을까요? 주리 작가의 그림도 매력적입니다. 꽃잎과 흰 눈을 어쩜 이렇게 조화롭게 그려냈을까요?

    공광규 시인과 주리 작가가 그려낸 두 번째 마술은 제 마음을 출렁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나도 꽃을 피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 속에서 언제나 그리운, 한 사람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하얀 눈꽃 같은, 우리 할머니입니다.

    진짜 마술

    흰 눈이 흰 꽃이 되는 것은 분명 마술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이기도 합니다. 겨울에 내린 눈을 먹고 봄에 만물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흰 눈이 흰 머리가 되는 것도 마술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흰 눈을 먹은 만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얀 눈이 노인의 머리에만 흰 꽃으로 다시 피는 까닭은, 사람이 늙어서야 비로소 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늙는다는 것은 나무가 되고 꽃이 된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흰 눈이 흰 꽃이 되는 마술보다 사람이 나무가 되는 마술이 진짜 마술입니다. 한 사람이 노인이 되고 다시 나무가 되려면 정말 오랜 세월과 사랑과 웃음과 눈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와 그림으로 자연과 인생의 마술을 보여주는 그림책, 바로 『흰 눈』입니다.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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