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2년 서울,
    태평로 토지 사기 사건
    [과거와 현재] 반복되는 어떤 역사
        2016년 05월 23일 11: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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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칼럼을 연재한다. 과거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 그리고 내일의 미래를 고민해보는 역사칼럼이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의 염복규 선생이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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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로’를 아시는지? 태평로는 현재 공식적 정의에 의하면 세종대로 네거리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너비 50m, 길이 1.1km의 도로로서,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세종대로와 합쳐 서울역-경복궁을 연결하는 서울 도심부의 대표적 간선도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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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태평로 (2016.5.21, 네이버 지도 검색)

    조선시대 남대문 부근에 위치했던 태평관(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에서 유래한 태평로는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는 지금과 같은 넓은 도로가 아니라 소로에 불과했다. 조선시대 도성의 남대문과 연결되는 종로 이남의 메인 도로는 남대문로였기 때문이다. 도로 체계를 이렇게 한 이유는 조선시대의 유교적 감각에서 서울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남대문에서 신성 지대인 궁궐까지 거침없이 직통으로 연결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태평로가 현재와 같은 위상의 도로가 된 것은 1910년대 초이다. 총독부는 병합과 더불어 ‘경성시구개수’라는 이름의 서울 도심부 간선도로 정비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193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지만, 가장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10년대 전반이었다. 그리고 이 때 정비된 대표적인 도로 중 하나가 태평로(당시의 이름은 태평통)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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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서울 도성의 도로 체계

    조선 왕조는 성문과 궁궐이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을 꺼렸을지 모르겠지만, 근대 제국주의 권력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서울의 입구에서 권력의 물리적 정점인 (이제 곧 경복궁 경내에 짓기 시작할) 총독부 청사까지를 연결할 도로가 일개 소로로 남아있도록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태평로 공사는 1912년 10월 시작되어 이듬해 8월 거의 완료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태평로 공사는 이렇게 일개 소로를 서울의 대표적인 간선도로로 만드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양쪽으로 많은 도로 부지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많은 건축물의 철거가 필요했다. 덕수궁 궁장을 일부 훼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태평로 공사의 신속한 진행에 비례하여 도로변의 지가가 하루가 다르게 폭등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공사가 진행된 을지로(당시의 이름은 황금정통)와 비교하여 두드러진다. 종로와 평행한 동서 간선도로로서 을지로 공사 역시 조선시대의 소로를 간선도로로 확장하는 작업이었지만, 이 부근은 이미 병합 이전부터 일본 상인들이 많이 진출하여 지가가 상승해 있는 상태였다. 그에 비하면 태평로는 ‘새롭게 개발’되는 곳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도로 공사에 연동한 부근의 지가 상승은 그냥 자연발생적인 현상만은 아니었으며, 이른바 토지 브로커 등이 개입하여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이는 아마도 자본주의 시대 도시 개발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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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지도에 보이는 정비가 완료된 태평로(太平通)의 모습

    그리고 브로커의 개입과 같은 것은 짐작할 수 있듯이 사건, 사고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12.11.10)는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보도하고 있다. 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현대어로 바꾸었으며, 독자의 편의를 위해 줄 바꿈을 했다. 좀 길지만 한 번 천천히 읽어보자.

    경성 중부 농포동(현재 종로구 권농동․와룡동 일대) 사는 전 조선총독부 속屬(하급관료의 일종) 설기하는 나이 지금 30세인데 명치44년(1911년) 5월 총독부 속이 되는 동시에 토목과 근무가 되었는데 본년(1912년) 3월경에 구리개길(을지로) 개축에 당해 그 길에 들어가는 가옥을 훼철케 하라는 임무를 받은 바 초전골(현재 중구 초동 부근) 등지에 있는 백작 민영린씨 집이 그 길에 들어가는 고로 이것을 훼철하라고 독촉하기 위해 동대문 밖 민영린씨 집에 가서 민 백작에게 가옥 훼철을 독촉할 때에

    민 백작은 피고 설모에게 그 집은 이익을 볼 작정으로 매수했는데 다 도로에 편입되어 낭패가 적지 않은 즉 그대가 요행히 토목과에 있으니 이후 시구를 개정할 때에 예정선을 미리 알 터이니 그것을 좀 알려달라. 그러면 그 토지를 매수하여 이익을 분배할 터이라는 부탁을 받고 기회를 기다리다가 본년 5월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시구개정(태평로 공사)의 예정이 됨으로써 이 기회를 잃지 말라 하고 민 백작에게 통기하여 태평통 부근 토지를 매수하라고 권했으나 민 백작은 매수 자본금을 변통치 못해 시기를 잃어버렸는데

    피고는 본년 8월에 민 백작을 방문하고 이왕 말하던 계획을 실행하느냐 안하느냐 질문하니 민 백작은 돈을 변통치 못해 약조대로 실행치 못했노라고 하고 이후에나 계획을 해볼 터이니 이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기화로 알고 민 백작에게 금전을 편취할 계획으로 민 백작에게 말하기를 이 계획은 토목국 공무과 내지인(일본인) 기수에게 어떻게 안하면 형편이 좋지 못하다고 거짓말을 하여 돈 내기를 권함에

    민 백작은 그러면 그 내지인에게 상당한 사례금을 주리라 하니 피고는 이왕부터 친히 알던 내지인 모에게 말하여 민 백작이 경영하는 종로 공다옥에서 사례금으로 150원을 편취한 일이 총감부에 입렴되어 경성지방법원 료카쿠 검사가 심사하는 중인바 지난 7일 사기 취재取財로 기소되었다더라.

    토지 투기에서 출발하여 사기로 확대된 사건의 전말을 다룬 기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사에는 검사를 제외하면 두 사람이 등장한다. 먼저 총독부 토목과 관리 설기하. 관리로서 얻은 혹은 얻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정보를 내세워 토지 소유자의 투기를 부추기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기까지 치는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은 백작 민영린. 서울 시내 곳곳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시구개수에 따른 지가 상승을 기화로 득을 보려고 동분서주하는 인물이다. 이익에 눈이 멀다 보니, 일본인 실권자와의 안면을 과시하는 설기하에게 청탁을 넣고, 그를 계기로 결국 사기를 당한다.

    그런데 일개 하급 관리인 설기하는 그렇다 치고 민영린은 누구인가? 병합 이후 백작 작위를 받았다면 본래 꽤 지체 높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른바 민씨 척족 세력의 한 사람인 민영린(1872~1932)은 1892년 과거에 급제한 이래 고종․명성황후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04년 이후 대체로 일제 침략에 순응하는 길을 걸었다. 병합 직전에는 도박죄로 체포된 적도 있으며, 1910년 10월 공포된 「조선귀족령」에 의해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7년 아편 복용 혐의로 또 다시 체포되어 작위를 박탈당했다.

    이 사건은 1912년 서울 풍경의 이모저모를 알려준다. ‘그 때, 그 곳’은 과연 어떠했을까? 막연한 상식선의 역사상은 늘 이분법적이다. 1912년 서울의 한국인은 둘로 나뉘어져야 마땅하다. 반일 저항 운동을 꿈꾸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제 막 개시된 식민통치에 의식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들. 아니면 일제 통치 노선에 적극 영합하여 출세를 꿈꾸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건이 보여주는 풍경은 그렇지 않다. 총독부는 식민지 수도의 새로운 외관을 꾸미기 위해 서울을 대대적인 공사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로지 사익 추구의 욕망으로 들끓는 자들의 아사리판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기하나 민영린이 과연 ‘예외적 개인’이었을까?

    이런 ‘역사’는 반복되어 왔다. 더욱 대대적이고 더욱 폭력적으로. 1970~80년대 강남에서, 그리고 2천년대 청계천에서, 용산에서. 1912년 벌어진 한 사기 사건에서 우리는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에서 무엇인가를 얻는 일은 이런 발견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소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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