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와 공산당 분열의 전조
    [필리핀 좌파운동] 피플파워와 아키노의 유산
        2016년 05월 19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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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바이, 페레스트로이카’ 링크

    제 20 장 새로운 고양

    1990년에 나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에 복귀했다. 결국 무산되고 만 쿠바에서의 임무 때문에 네덜란드의 유틀레히트에 머물다 마닐라로 돌아온 것이다. 동지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나에게는 곧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새로운 교육자료집 『기초대중강좌』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에 복귀했고, 당 사업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고 기뻤다.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개편

    그 무렵,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ABB)의 활동도 활성화되고 있었다. 새로운 작전들이 전개되었는데, 부패한 악덕 경찰(1980년대 후반에는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을 노려 처형하는 이전의 작전보다도 훨씬 창조적이고 인기가 있었다. 그로 인해 여단은 사람들에게 “로빈후드”라고 불리게 되었다. 작전은 대중들, 특히 중간계층 속에서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평판을 좋게 만들도록 목적의식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몇 개의 신문지상에 가로등 전봇대에 묶인 채 “나는 뇌물을 먹었습니다!”라든가 “나는 부패경찰입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경찰의 사진이 게재되었다. 이 불운한 경찰들은 대개는 노점상, 또는 지프니 운전사들로부터 돈을 뜯어내거나 괴롭히던 자들이었다.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은 자신들을 신인민군(NPA)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인민군 창설 기념일인 3월 29일에는 마닐라 수도권에서 작전을 벌이곤 했다. 작전은 주로 식료품을 실은 트럭을 탈취해 빈민가에 나눠주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주 전개되곤 했던 작전은 트럭에 실린 쌀을 탈취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한 대원에 의하면 이 작전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총을 트럭 운전사에게 들이대고 트럭에서 내리게 한 후, 차를 빈민가로 몰고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작 힘든 것은 빈민가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공평하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우선 이 사람들에게 이 물건이 공짜라는 것을 알려 주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난 후, 이번엔 모인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꽤 걸렸고, 그 사이에 탈취당한 트럭을 찾기 위해 경찰이 추격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러나 이 문제도 이윽고 해결됐다. ABB팀이 그 지역에 가기 전에 몇 명의 주민(대개는 그 지역의 연락원들이었다)들에게 보급품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를 미리 정해놓게 했던 것이다.

    식료품 운반 트럭의 탈취는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땐가는 아이스크림 운반차를 탈취하기도 했다. 이 날 주민들은 각종 아이스크림을 원 없이 맛볼 수 있었다.

    버스 방화

    1990년 10월, 여러 노동조합들과 교사연합, 지프니 운전사 등의 단체, 그리고 많은 대중운동단체들이 모여 「피플스 커커스」(People’s Caucus; 인민전당대회)라는 연합단체를 결성했다. 이 연합체는 노동자들의 일급 35페소 인상과 교사 급여 3,000페소 인상, 그리고 석유가격의 인하를 요구하는 3일간의 총파업을 조직하기로 했다.

    이 대중 총파업은 공장파업이나 교통파업 외에, 수업 보이콧, 출근 거부, 가두시위와 인간바리케이드 등 다양한 행동을 망라한 대중적 항의행동이었다. 목표는 정부에 최대한의 압력을 가해 도시경제 전체(사람과 물류의 흐름을 포함한)를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대중파업이 선언된 직후, 필리핀공산당 산하의 「전국 도시 대중 투쟁위원회」(전국투쟁위원회)에 속해 있는 여러 당 조직이 파업의 성공을 위해 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매스컴은 노동조건을 둘러싼 파업이라도 교통마비의 정도에 따라 그것이 성공했는가 아닌가를 평가했다. 그래서 정부는 공공교통이 마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 요원을 버스에 태워 “파업 선동자”가 버스 운전사에게 파업에 동참하라고 “협박”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군인들이 승차해 파업 대체인력으로 투입된 파업 파괴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전국통일전선위원회,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여타 지역위원회, ABB여단, 1명의 당중앙지도부 대표로 구성된 당의 전국투쟁위원회는 버스 소유자들이 파업 기간 중에 버스의 운행, 특히 군에 의한 운행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해 버스 몇 대를 방화하기로 결정했다.

    대중파업 첫날, 적어도 24만 명이 참가해 시위가 벌어지고 주요한 도시와 마을의 간선도로에서 인간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최대 규모의 가두시위는 만달류용 시의 쇼 대로와 엣사 대로의 교차로에서 행해져 3만명이 참가했다. 그들은 도로를 폐쇄시키고 타이어를 태우는 한편 곳곳에서 즉석 가두연설을 했다.

    이윽고 무선연락이 들어왔다. 마닐라 수도권과 기타 주에서 잇달아 버스가 방화되어 그 수는 2~30여대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많은 숫자였다. 마닐라 수도권에서만도 불탄 버스는 13대에 이르렀다. 작전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실행됐다. ABB팀 또는 시민그룹(마닐라 · 리잘 위원회는 그들을 “폭도부대”라고 불렀다)이 버스에 타고는 군인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버스 승무원과 승객들에게 내릴 것을 명령했다. 그리곤 버스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버스 방화는 운동권 내부에서도 물의를 빚었다. 파업 이틀째, 「피플스 커커스」는 버스 방화는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연합체의 부정적 반응과 매스컴의 비난에 직면한 공산당 중앙지도부는 당 전국투쟁위원회에 “중지” 명령을 내렸고, 위원회의 행동을 비판했다. 당 중앙은 버스 방화를 대중운동의 전진을 방해하는 “봉기주의적” 행동이라고 규정했다. 파업 3일째, 당의 여러 조직─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ABB, 민족민주전선─의 지하 지도부가 기자회견을 열어 버스방화를 과오라고 인정하고 「피플스 커커스」와 일반대중들에게 사과했다.

    미군기지의 철수

    1991년 9월 16일, 약 15만 명의 사람들이 마닐라의 상원 건물 주위를 행진했다. 「ATM」(조약반대운동)이라고 불린 좌파와 민족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연합의 기치 아래 조직된 이날의 데모는 일주일 동안 계속된 일련의 시위의 하이라이트였다.

    시위의 목적은 코리 아키노 정부로 하여금 미군기지의 주둔을 연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9월 16일은 미군기지가 필리핀 영내에서 기능하는 것을 인정한 대미 조약 효력의 최종일이었다. 또한 1987년의 신헌법(소위 코리 헌법)은 필리핀 내에서의 핵무기 보유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수빅 해군기지에 상시 정박하고 있는 미 함대에 핵무기가 탑재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미국과의 신조약은 향후 10년 동안 군사기지의 주둔을 연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헌법에 저촉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필리핀 상원의 승인이 필요했다. 코리 아키노는 1986년 2월 총선거 당시 미군기지를 반대했던 입장을 바꾸어 신조약을 찬성하도록 상원에 호소함으로써 “외국의 군사기지 및 군대의 재주둔을 요구해 상원에 대한 데모와 집회를 유도한 대통령”이 되었다. 이것은 1989년 12월에 있었던 코리 정권 전복을 노린 구테타에 대해 미국 정부가 팬텀 전투기로 “위력 시위”를 해 준 것에 보답하기 위한 코리의 액션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확신했다.

    12대 11이라는 근소한 차로 상원은 신조약의 승인을 부결시켰다. 법률에 의하면 상원의 승인에는 3분의 2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결과는 충분한 것이었다. 필리핀 영내로부터 외국의 군사기지와 그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좌파와 진보 진영에 있어 이날은 자축할만한 날이었다. 이 사건은 단지 좌파만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의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적 리더들이 코리 아키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으로부터 해방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제 21 장 분열의 전조 ; 의견불일치와 논쟁

    논쟁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그 활동과 조직력의 동원 등을 통해 새로운 활성화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당 중앙 지도부와의 관계는 잘 풀려나가지 않았다. 수년 후에 마닐라 · 리잘 위원회는 필리핀 공산당의 지역 조직과 계열조직으로부터 분열해 별도의 당을 만들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당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조직 전체가 빠져들었다. 필리핀 공산당의 규범은 논쟁을 되풀이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으나(“당은 논쟁클럽이 아니다”), 변동하는 정치적 · 이론적 분야에 있어 당내에서 토론해야 하는 문제가 많이 생겨나고 있었다.

    여기에는 동유럽과 소련 사회주의의 붕괴에 관한 이데올로기 논쟁이나 전략 · 전술에 관한 정치 논쟁, 혁명당의 행동규범에 관한 조직논쟁 등이 있었다. 나 또한 이러한 논쟁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그것은 포포이와 나, 그리고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가 마오주의의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논쟁의 주요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당 중앙기관과의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립지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됐다.

    1. 마닐라 수도권과 기타 주요한 도시부에 있어 노동자계급 운동의 방향성에 대하여 : “민족주의적”인 방향인가, “사회주의적” 방향인가?

    이 논쟁은 1988년의 메이데이 투쟁 때,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당 전국노동조합국 사이에 촉발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전국노동조합국의 노동자 내에서의 선전활동이 혁명의 “민족민주노선”에 국한되어 있어 노동자의 계급적 이익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닐라 · 리잘 위원회는 노동자계급은 민족민주노선이 아니라,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민주노선은 프로레타리아가 아니고 주로 민족 부르주아나 농민을 포함하는 프티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 혁명전략에 대하여 ; 「장기인민전쟁」(PPW)인가 「정치-군사적 전략」(Politico-military)인가, 혹은 단순한 「봉기전」인가?

    대중운동의 발전을 전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 당 전략이 제안됐다. 필리핀 공산당 마닐라 · 리잘 위원회와 민다나오 위원회는 농촌부의 게릴라전과 도시부의 도시게릴라 작전 및 공개부문에서의 대중투쟁을 결합하는 보다 좋은 전략적 방향으로 “정치-군사전략”을 제안했다. 다른 한편, 마티 빌라로보스는 필리핀 혁명운동이 1986년에 “버스를 놓친” 문제를 지적하며 장기인민전쟁보다는 “봉기전”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비밀 회람을 통해 시작하고 있었다.

    1.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및 동유럽에 있어서의 공산주의체제 붕괴에 대하여

    공산주의운동에 있어 스탈린주의와 그 전통에 대해, 그 중에서도 당의 민주집중제와 사회주의의 스탈린주의 모델(또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사회)에 대해서도 논쟁이 시작됐다.

    이러한 토의와 논쟁 속에서 마닐라 · 리잘 위원회는 보다 열띤 논쟁을 준비했다. 1991년에 『우리 기본원리의 재확인과 오류의 수정』이라는 필리핀 공산당의 문건에 대해, 또 1992년에는 필리핀 공산당의 “제2차 대정풍운동”을 둘러싸고 논쟁은 시작되었다. 마닐라 · 리잘 위원회는 자주독립을 선언한 첫 번째 당 조직이었고, 1993년에 필리핀 공산당으로부터 분열했다.

    마오주의와 레닌주의

    마오주의를 충실히 신봉하는 공산당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온전한 마오주의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를 중앙지도부와의 논쟁으로 이끌게 된 주요한 배경이었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에는 레닌의 저작을 학습하는 강력한 전통이 있었고, 특히 레닌을 각별히 좋아했던 포포이에 의해 그 경향은 도드라졌다.

    마닐라 · 리잘 위원회의 주요한 교과서는 45권짜리 레닌전집이었다. 포포이는 지하 아지트를 전전할 때조차도 반드시 이 레닌전집을 가지고 다녔다. 포포이의 글에는 레닌으로부터 인용한 구절이 풍부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우리의 정치활동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포포이는 레닌전집을 뒤져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적당한 구절을 찾아내곤 했다.

    필리핀 공산당의 여타 지도부가 정치적 · 사상적 조언을 마오 주석의 저작에서 찾고 있던 것에 비해, 마닐라 · 리잘 위원회는 레닌의 저작을 학습했다. 우리는 5권짜리 모택동선집(뒤에 다시 4권이 나와 9권이 되었다)에 담겨져 있는 저작 내용들이 농촌이나 산촌부에서의 혁명 활동이나 인민 지구전과 게릴라 전략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이트 에리어”(도시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간부에게 있어 마오의 문헌은 때때로 핀트가 맞지 않았고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류싸오치(유소기)의 문헌을 검토해보려고 했다. 유소기는 1925년~27년에 중국 노동운동의 조직화에 활약했던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마오의 홍위병으로부터 “배신자” 또는 “주자파”(走資派)로 비난받아 프로레타리아 문화대혁명 때 대부분의 문헌이 폐기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레닌의 저작에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었고, 우리의 경험과 직접 연결되는 것들이 많았다. 우리가 마오보다 레닌을 더 학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 공산당 지도부는 우리에 대해 “봉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우리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의 봉기 전략을 필리핀의 상황에 그대로 대입시키려한다는 것이다.

    필리핀 공산당 지도부는 몇 번이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했다─레닌의 볼셰비키당이 혁명을 지도했을 때, 러시아는 이미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혁명과 그 전략은 우리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필리핀은 아직까지 “반식민지 반봉건제”이기 때문에 중국혁명의 “인민지구전”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밖에 없다.

    기초대중강좌

    내가 쓰기로 한 「기초대중강좌」는 1991년에 완성되었다. 그것은 『빈곤의 처방전』이라는 제목의 130페이지짜리 소책자로 발행되었다. 집필한 것은 나였지만, 그 주요한 견해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다른 지도부들과의 거듭된 회의나 토론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우리는 마닐라 · 리잘 위원회의 수천명의 활동가가 참가한 교육 강좌를 활용했다. 파업 현장이나 지역, 학교, 공장에서 학습회, 학습토론회를 조직했다. 그것은 새로운 멤버의 정치적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마닐라 · 리잘 위원회가 행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 중에 있는 “노동자계급대중”에 대한 서술내용도 필리핀 공산당 내부에서 논쟁의 표적이 되었다. 마오주의의 카테고리에서는 노동자계급은 산업프로레타리아와 “노동예비군” 내지는 반(半)프로레타리아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근로대중”은 노동자계급과 소작농, 즉 프티부르주아의 하층부 모두를 지칭하고 있다. 프로레타리아라는 것은 “첫째, 산업노동자를 말하고, 둘째 기타의 임노동자를 지칭”(호세 마리아 시손 『필리핀 사회와 혁명』)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도시빈민층은 노동자계급의 일부인가 아닌가하는 논쟁이 항상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 운동 내에 노동자계급에 대한 “협의의 정의”(산업노동자와 임금생활자만을 말하는)와 도시빈민층이나 기타 반(半)프로레타리아(노점상, 지프니 운전사, 트라이시클 운전사, 점원, 기타)를 포함하는 “광의의 정의”의 두 가지 정의가 혼재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이전부터 도시빈민층을 노동자계급의 일부이고, 자본가가 산업 프로레타리아의 임금을 억제하기 위해 유지해 두는 산업예비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시빈민과 도시빈민지역은 불과 2~30년 전인 1960년~70년대부터 급증했고, 그것은 신식민지 또는 후진자본주의 체제(마오주의자들은 “반봉건제”라고 하겠지만)의 전 민중에게 직업을 안겨줄 수 없는 무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009년의 통계에 의하면 필리핀의 노동력 인구는 대략 3,80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취업자수는 3,500만 명으로, 그 중 1,900만 명은 시급, 또는 일급이나 월급을 받는 임노동자이고 1,200만 명은 자영 노동자, 400만 명은 무급의 가사노동자이다. 임금노동자 중 15%(530만 명)가 공업부문, 50%(1,750만 명)가 서비스 부문, 나머지 35%(1,230만 명)가 농업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자영」 내지 「무급 가사노동자」의 카테고리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통해 수입을 얻는 수많은 반(半)프로레타리아(노점상, 지프니 운전사, 목수 등)가 포함되어 있고, 도시나 지방의 빈곤층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자본가나 개인사업주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3,800만 명의 노동력 인구를 기준으로 해서 추정한다면, 산업예비군(실업자, 자영노동자, 무급 가사노동자)은 1,900만 명으로 임노동자수와 같다. 노동력 인구에서 제외되는 사람의 수(학생이나 주부, 신체장애자 등)를 더하면 산업예비군의 수는 더욱 커지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기본 정책의 수립에 있어 이러한 산업예비군의 증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반(半)프로레타리아의 수는 최근 수년에 걸쳐 증대일로에 있다. 그것은 도시빈민지역이나 “정체지역” “불법주거지” 등으로 불리는 지역에서 도시빈민층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퇴거반대투쟁이나 양질의 주택 · 일자리 · 복지를 요구하는 투쟁의 고양은 당의 조직화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했다. 도시빈민지구는 공산당의 조직화와 동원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고 산업노동자들 속에서의 당 활동을 능가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구조가 변화하고 있는 것에 의해 당 활동에 있어 도시빈민층과 공장노동자의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만약 도시빈민 지역 내의 당 가입자수가 공장노동자 가입자보다 상회한다면, 도시빈민지역을 우선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러나 공장노동자는 혁명에 있어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 있어서도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세력이다. 왜냐하면 공장노동자는 생산에 있어 중요한 역할(생산을 마비시키고 혹은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수행하고 있고, “사회적 비중”, 즉 자력으로 다른 세력의 지원 없이도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조직과 규율, 그리고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노동자는 공장의 자본가와 투쟁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고 있지만, 도시빈민층의 투쟁은 대체로 다른 계급에 속하는 지역의 리더나 기존의 정치가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공장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점하는 자신의 불가결한 역할을 활용해 생산을 마비시키는 파업을 일으켜 자본가나 동일산업의 자본가 그룹의 항복을 강제할 수 있는데 비해 도시빈민층의 고립된 투쟁은 곧바로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러한 이점이나 “사회적 비중”을 전망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도시빈민층은 많은 사람들의 지원을 통해 행동을 일으키거나 추방당하는 것에 저항하여 바리케이드를 구축함으로써 공장노동자들과 마찬가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아키노

    제 22 장 회고 : 코리 아키노의 유산 

    코리 아키노는 2009년 8월 1일에 운명했다. 코리는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그녀는 “엘리트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왜냐하면 코리는 1972년 마르코스 독재체제가 시작되기 이전의 리버럴한 지배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코리는 또한 독재자 마르코스를 퇴진시킨 “피플파워 혁명”의 상징으로도 여겨졌다

    코리는 증오의 표적이었던 마르코스 독재체제의 붕괴를 이끈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역사를 만든 것은 계급이지 개인이 아니다. 마르코스의 추방에는 다양한 여러 가지 요인들과 주체들이 관여했다.

    제1차 엣사혁명〔피플파워 혁명〕자체가 군 내부의 반란과 민중들의 봉기가 합세해 만든 것이었다. 제1차 피플파워 혁명은 좌익세력과 진보진영에 의한 수많은 항의행동과 희생, 그리고 소규모 반란의 축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독재체제 하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룬 좌파세력은 전략 · 전술에 있어 스스로 범한 과오로 인해 결국 정치적 고립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

    코리 아키노의 유산

    코리 아키노가 남긴 유산은 진정한 민중정부의 수립에 실패한 “피플파워혁명”을 리드한 것이었고, 나아가 중요한 혁명적 행위를 단 하나도 실천하지 못한 “혁명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코리가 수립한 “혁명정부”는 곧바로 마르코스 독재정권 하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엘리트 집단의 정부로 변신하고 말았다. 후계자인 라모스나 에스트라다 등 기성 엘리트 정치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글로리아 아로요의 정치는 어떤 의미에서는 코리 아키노 “혁명”의 한계와 굴절이 낳은 부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월든 벨로〔Walden Bello; 필리핀의 진보적 정치학자. 대표적인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학자 • 운동가로 반세계화 NGO단체인 「남반구의 초점」 대표. 「악바얀」(시민행동당) 소속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 2005년 무렵 필리핀 공산당 CPP에 의해 제거(살해)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는 코리의 유산이 두 가지의 “역사적 타협”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고 썼다(『반(反)진보국가─영속적 위기하의 필리핀 경제』 2004년).

    그 하나는 중요한 정책인 농지개혁을 통해 스스로의 도덕적 권위를 세우는 것에 실패하여 농지개혁법을 “1,001개의 허점투성이” 누더기 개혁법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두 번째는 대외채무의 변제를 필리핀 경제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성장을 위해 필요한 투자의 부족을 초래한” 것이었다.

    구조개혁의 결여와 자본 부족이 겹쳐 필리핀은 1986년에서 2000년에 걸쳐 불황에 빠졌다. 코리는 대통령 행정명령 292호를 통해 마르코스 체제 하에 제정된 채무자동지불법을 계승했다. 이 법은 채무지불에 국가 예산을 충당하는 것으로, 국내의 사회서비스나 복지에 투여해야 할 재원을 엉터리 국가프로젝트에 수십억 달러를 빌려준 해외은행과 국제금융기관에 쏟아 붓기 위한 것이었다.

    1986년에서 1993년까지의 경제위기 중에 약 300억 달러가 채무변제로 사라졌다. 1986년의 대외 채무 합계가 215억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에 월든 벨로에 의하면 이것은 “끔찍한 금액”이다. 채무변제에는 변동이자율이 적용되어 정부는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또 다시 부채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때문에 1993년까지 필리핀의 대외 채무는 290억 달러로 늘어났다.

    코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타협을 감행했다. 특히 대통령직 전복을 노린 구테타를 지속적으로 도모하고 있던 마르코스 수하의 군부세력과, 그리고 코리 정권에 대한 지지의 대가로 자신들의 지분을 요구하는 대기업과 타협한 것이다.

    반면 코리는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도 군부가 전투적 활동가들을 살해하는 것을 제지하지 못했다. 군이나 무장집단, 자경단, 반공조직에 의한 정치 살인, 말살, 납치 등의 불법행위는 코리 정권의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에레라(Herrera)법의 공포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악질적인 공격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것은 1989년의 공화국 법률 제 6715호의 제정이었다. 이 법률은 핵심 기초자가 당시 상원의원으로 필리핀 노동조합회의(TUCP)의 지도자였던 에르네스토 에레라였던 데서 에레라법으로 불렸다.

    이 법은 노동부 장관에게 파업을 금지하거나 파업 중의 노동자들에게 직장복귀명령을 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법권을 대행”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장관은 이러한 명령의 실행을 경찰에 대행케 하는 것도 가능했다. 장관은 또 노동법으로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도 하청을 합법으로 선언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반(反)파업법은 장관이 파업을 불법으로 선언함으로써 파업 중인 노동자 전원을 해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관의 사법권이나 강제중재명령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파업노동자를 형사고발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노동운동의 리더였던 자에 의해 이러한 반노동자적이고 반노동조합적인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코리 정권은 독재정권의 유물인 반노동자적 탄압 법령을 폐지하는 대신, 자신이 이끄는 여당의 공공연한, 또는 암묵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에레라법을 제정하여 오히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던 것이다.

    에레라법의 성립 직후, 「임금합리화법」이 제정되어 임금인상을 결정하기 위한 노사정대표로 이루어지는 지방임금위원회가 설립됐다. 이 법에 의해 의회의 결의에 의한 강제적인 임금 인상을 대신해 지방임금위원회가 임금의 조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노동자들로부터 최저임금의 권리를 박탈한 것이었다. 지방임금위원회가 지방마다 임금율을 결정하기 때문에 같은 노동을 하는 노동자가 지방에 따라, 그리고 주에 따라 다른 임금기준을 적용받게 된 것이다.

    이들 속박적이고 억압적인 기제들이 필리핀 민중과 필리핀 노동자들에게 남긴 코리의 유산으로 오랜 동안 남게 되었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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