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끝없는 싸움
    [왼쪽에서 본 F1] 혐오‧편견, 소수의 문제 아니다
        2016년 05월 03일 09: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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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3일 치러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는 여러모로 씁쓸했습니다. 단순히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의 결과 문제가 아니라, 선거를 전후해 나타난 ‘용납할 수 없는’ 행동 때문입니다. 그중 두드러진 것이 ‘혐오와 차별’에 대한 것들입니다.

    노골적인 혐오와 차별을 자신들의 모토로 내세운 기독교 정당이 3%에 가까운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당연히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 내용을 지지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주류 정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여야 대표 정당에서 온갖 차별적인 언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소수자들을 차별함으로써 얻게 될 표를 의식한다는 것이 너무 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혐오와 차별 앞에 속수무책이란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여러 가지 혐오와 다양하게 나타나는 차별은 어느 곳에서나 싹틀 수 있고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어느 곳도 예외는 아니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아쉬운 것은 ‘단호하게 혐오와 차별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현실 정치의 축소판이라는 F1에서도 혐오와 차별을 둘러싼 문제들은 자주 등장했었습니다. 최근에는 F1의 실질적 지배자인 버니 에클스톤이 여성 차별적인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이외에도 지난 십 수 년간 ‘전 세계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F1 무대에는 적지 않은 혐오와 차별의 이슈가 오르내렸는데, 그중 가장 큰 이슈가 됐던 것은 지난 2007년 최초의 흑인 F1 드라이버인 루이스 해밀턴이 데뷔한 이후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던 인종 차별 문제가 아니었던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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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 최초의 흑인 드라이버 루이스 해밀턴

    놀랍게도 1950년 F1 출범 후 57년 동안 정상적으로 F1에서 경쟁한 흑인 드라이버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것부터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2007년 루이스 해밀턴이 데뷔하면서 F1에도 흑인 드라이버가 함께 경쟁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것은 물론 개성이 뚜렷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그리고 매우 공격적인 드라이빙을 펼치는 루이스 해밀턴의 데뷔는 뜻밖의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2007년 F1 데뷔 당시 해밀턴의 단 한 명뿐인 팀메이트는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로 손꼽히던, 2년 연속 챔피언 타이틀에 빛나는 디펜딩 챔피언 페르난도 알론소였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알론소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페라리와 미하엘 슈마허의 아성을 무너뜨린 장본인으로 더 높이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어느 면으로 보나 최고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파란 신인 해밀턴은 알론소와 치열하게 경쟁했고, 점차 이들의 경쟁은 과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팀 내 문제가 양산됐고 해밀턴의 꾸밈없는 발언과 행동들은 알론소 팬을 자극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두 드라이버가 갈라선 이후 벌어졌습니다. 2008년 초 F1 시즌 개막을 앞두고 스페인에서 테스트 주행이 진행되던 중, 테스트가 진행되는 써킷을 찾은 일부 팬이 인종차별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입니다.

    얼굴에 흑인을 조롱하는 듯한 색칠과 가발을 쓰고, 해밀턴과 흑인을 비하하는 메시지가 관중석에 가득했습니다. 시즌 전 테스트라고는 하지만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편견에 뿌리를 둔 해밀턴에 대한 비판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건방지고 안하무인이라거나 대선배를 존중하지 않고 이기적이라는 일부의 비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문제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의 일부 팬들은 분명 전적으로 잘못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관점이라면 단지 ‘팬들의 개별적인 행동’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F1은 단호하게 움직였습니다. 공식 성명을 통해 ‘용납할 수 없는’ 행동들을 비난하는 한편, 일부 팬의 인종차별적 행동을 제재하는 의미에서 스페인의 F1 개최권을 박탈하려는 전례 없는 계획까지 논의됐습니다. 다행히 F1과 모터스포츠의 최고 기관인 FIA가 단호하게 움직인 덕분인지 이후 더는 차별적인 언행이나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았고, 최고의 인기 그랑프리 중 하나인 스페인 그랑프리도 명맥을 유지하게 됐습니다.

    해밀턴은 연초 문제가 있었던 문제의 2008년 첫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고, 2014년과 2015년에 두 차례나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며 F1 최고의 스타가 됐습니다. 차별적 행동을 막기 위한 빠르고 단호한 대응이 아니었다면, 일부의 문제라며 대충 넘어갔다면, 해밀턴이 F1 무대에서 이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해밀턴은 문제의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나서도 당시의 혐오와 차별이 가득했던 스페인에서의 일에 대해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이러니하게도 한 때 차별의 피해 당사자였던 해밀턴이 인종 차별의 가해자로 논란의 중심에 서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xxxx during the Formula One Grand Prix of China at Shanghai International Circuit on April 12, 2015 in Shanghai, China.

    2015 중국 그랑프리에서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였던 루이스 해밀턴

    문제는 2015년 중국 그랑프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우승을 차지한 해밀턴은 마냥 즐거운 상태에서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모터스포츠라면 의례적으로 진행되는 샴페인 세레머니, 즉 레이스에서 1, 2, 3위로 레이스를 마친 드라이버들이 주변에 샴페인을 뿌리는 세레머니 중 옆에서 대기하던 그리드 걸에게 샴페인을 뿌렸습니다.

    그저 살짝 지나치듯 샴페인이 뿌려졌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겠지만, 누가 봐도 ‘모르고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리드 걸의 얼굴에 직접적으로 샴페인을 뿌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장면을 본 많은 사람이 바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동양인이 아니라 유럽의 그리드 걸이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일단 피해 당사자였던 그리드 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1, 2초 정도 지나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인터뷰가 중국 매체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해밀턴의 경우는 한 주가 지나도록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밝히며, 자신의 행동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혐오와 차별과 관련된 문제에서 늘 그렇듯, 가해자가 딱히 의도했다는 증거가 없고, 피해자가 괜찮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가해자가 한때 피해자였다는 이유로 자신의 차별적인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해밀턴의 세레머니가 정말 차별적인 행동이었는지 아닌지는 쉽게 단젓짓기 어렵지만, 그간 서유럽을 중심으로 오래 지속돼 온 동양인에 대한 비하와 차별적인 언행들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다시 뒤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2008년 스페인에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저지르던 사람들도, 어딘가에서는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평범한 민중일지도 모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차별을 당하던 사람이 차별에 앞장서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마음 한가득 혐오와 편견을 채우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현실 세계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당연히 그 배경이 어떻든, 혐오와 차별은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됩니다. 누구라도 알게 모르게 어느 순간 혐오와 차별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니, 모든 사람이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저를 포함해 누구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삐뚤어진 사람만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는 게 아니라, 한없이 순박해 보이던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한순간 광기에 휩싸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F1과 FIA는 차별에 단호히 대응하고 일말의 여지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혐오와 차별에 단호히 대처하고,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제도와 시스템이 어서 갖춰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뿌리까지 뽑아 없앤 것 같아도 어느새 다시 자라나는 잡초처럼 고개를 드는 것이 혐오와 차별이기 때문에, 이에 맞서는 싸움 역시 끝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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