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숭배의 추악함
[다큐 사진] 장국현과 '금강송 벌목'
    2016년 04월 27일 09: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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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봄, 사진계에서 해프닝이라기에는 심각하고, 심각하다고 하기에는 씁쓸한, 사진을 둘러싼 한국인의 문화 예술 풍토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일단, 사건을 재구성해보고,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16년 4월 12일부터 한 달여 동안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사진가 장국현의 금강송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장국현씨는 한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파리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진가라고들 언론에서 떠들곤 하지만, 정작 사진 비평을 하는 나에게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다.

다만, 몇 년 전에 경북 울진군 소재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에서 소나무 사진을 찍기 위해 불법으로 많은 소나무들을 벌목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주인공이라는 사실로 인해 이름이 떠오른 사진가다.

그가 예술의전당 측과 전시하기 위해 대관 계약을 맺었는데, 몇 년 전 사진을 찍기 위해 금강송 등 여러 나무를 수십 그루 베어 내버렸고 그로 인해 5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작품을 공공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계약 취소를 했다.

그러자 전시 주최 측인 ‘미술과 비평’은 전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재판부는 “미술과 비평이 상당한 금원을 투자해 전시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개최가 무산될 경우 큰 손해가 발생할 것”이라며 전시를 하도록 판결했다. 그러자 환경단체 회원들이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사진가의 전시를 인정할 수 없다며 소나무 훼손 퍼포먼스를 하였고, 이어 사진가들이 개인적으로 뜻을 모아 1인 시위를 지속적으로 열었고, 지금은 마무리되었다.

사진1

훼손된 소나무 밑둥이 처참하다. 이를 찍어 고발한 사진가야말로 참다운 사진가다
(한겨레신문 독자가 한겨레에 제공한 사진)

이 사건은 사진 혹은 예술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곪은 부분들을 잘 보여준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미술과 비평’이라는 잡지사의 파렴치함이다. 미술을 논하고, 감상하고, 비평하는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시를 기획하고 주최하는 일은 그 바탕에 예술성이 깔려 있어야 하고, 그 예술이란 돈의 맛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굳이 비평계의 일원이 아니라 할지라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꼭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는가, 라는 기독교의 논리를 가져올 필요조차 없다. 교회나 절이 썩고 문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그것들이 사람을 버리고 돈으로 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미술과 비평’ 안에 그 동안 보여주었던 그 현란한 예술과 인간 그리고 인문에 대한 글들이 모두 거짓이고 사기가 되어버렸다.

이건 규모와 비중은 다르지만 연전에 일어났던 소설가 신경숙 표절 사건을 창비사가 옹호하고 나선 것보다 더 파렴치 하다. 그것은 논쟁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것은 돈 벌기 위한 (혹은 예술과 자존감은 잃지만 돈을 잃지 않기 위한) 발버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전시를 반대하면서 나선 사진가들의 1인 시위는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로,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는 적절한 대처로 보인다. 그 동안 사진가들은 사진계에서 드러난 여러 비리와 추문 혹은 기관으로부터 억압 등에 대해서 대부분이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식으로 지내왔다.

연전의 최민식 사진상 문제가 만 천하에 공개되었음에도 아무도 일인시위 하지도 않았고, 제주시에서 사진가 권철의 야스쿠니 사진전을 아무 이유도 없이 폭력적으로 개최하지 못하게 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거대한 권력에 대들기 어려운 구조를 익히 알기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태도로 인해 내부와 외부로부터 많은 자조와 조롱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터지자 많은 사진가들이 크게 분노했는데, 그와 동시에 그 장국현이라는 사람이 사진계에서 권력과 연계되어 있는 인물이라 해도 그런 시위를 할 수 있었겠느냐는 뒷담화가 무성하다.

단언컨대, 그런 뒷담화는 옳지 않다. 큰 일을 못 한다고 작은 일마저 폄훼될 이유는 없다. 정작 해야 할 일은 이제 악행에 저항하는 작은 발걸음을 딛었으니, 앞으로는 더 큰 권력의 악행에라도 저항하는데 더 큰 용기를 내 무거운 발걸음을 딛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진2. 곽명우1인시위

사진가 곽명우의 모습. 무거우며 또한 발랄하다. 이 사건이 얼마나 웃기면서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채승우

사진1

사진=녹색연합

뭐니 뭐니 해도 이번 사건은 예술에 대한 한국인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씁쓸하다. 다들 잘 아디시피 사진은 복제품이다. 복제품이라 해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 복제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전시를 하거나 한 술 더 떠 숭배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야 하는 것이 본질적 성격이다.

예술에서 전시와 숭배를 구성하는 절대적인 요소로 아우라Aura가 있다. 아우라는 오로지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유일한 존재가 품어내는 신성한 기운이다. 경주 불국사 뒤 토함산 그 자리에 있는 석굴암이 아우라를 품지, 그것을 복제해 놓은 똑같이 생기는 것은 그 어떤 아우라를 품지 않는 것이다.

사진은 아우라가 없는 덕분에 인간이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독립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분위기가 좋아서 그 복제품을 사서 내 서재에 걸어놓고 즐기지만 그것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것들로 전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진에 아우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른바 전시가 만들어내는 아우라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향유하는 차원에서 전시를 하는 것에 대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마는, 그것이 규모로 환산되고, 돈으로 환산되면서 그것들은 작품을 넘어 돈이 되고 그 후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진가 장국현이 사진을 전시하여 아우라를 만들고 그 돈으로 만드는 아우라를 사람들이 숭배하는 세상의 이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진 이미지를 실물 사이즈로 프린트 해 전시한다고 했다. 이미지를 실체화 하는 것이다. 아무런 본질이 있을 수 없는 이미지를 마치 그것이 실체인 양 만들어 그 규모로 숭배 아우라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나무나 꽃 혹은 돌과 같은 자연을 채집해 자신의 집으로 옮겨 가지고 와 집에 두고 자기만 보는 것이 도둑질이라면 이미지를 실물 크기로 만들어 전시하는 것은 사기 행위다. 도둑질은 나쁘기만 하지만, 사기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 사기에 쉽게 현혹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나 예술이 아닌 비즈니스요 돈 숭배일 뿐이다.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즉 비싼 값으로 많이 팔기 위해 벌이는 그 비즈니스의 과정에는 판에 박힌 문법이 존재한다. 허영에 쉽게 넘어가는 한국 사회의 약한 고리다

그 판에 박힌 문법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프랑스’다. 지난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세월호 회장인 유병언씨가 비자금을 모으기 위해 사진을 찍어 프랑스로 가서 돈 주고 로비를 해 전시하고, 그것을 유령회사를 통해 비싼 값으로 사게 하고, 그것을 자신의 회사에서 더 비싼 가격으로 사게 만드는 사기 행각이다.

사진가 장국현도 이 문법에 충실하였다. 한국 사람들이 ‘프랑스’하면 쉽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역시 그는 주도면밀하게 이번 전시에 지난 번 프랑스 파리 전시 작품 10여 점도 함께 전시한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프랑스 미술비평가 장 루이 푸아트방이라는 사람이 장 작가의 작품에 대해,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걸작 소나무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힘, 우주의 힘, 신화적인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평했다고 보도자료를 뿌렸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라면, 대개가 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인데다 설사 전문가라 할지라도 프랑스의 비평가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푸아트방이라는 미술비평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로지 프랑스 비평가라면 깜빡 죽는 한국 대중의 수준을 계산해서 한 언론 마케팅이다.

사진 비평가로서 난, 단언컨대, 저런 비평가는 사진의 사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저 정도의 수준이 프랑스 비평계의 수준이라면 볼 장 다 본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누구든 전시할 수 있다. 돈만 있으면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돈만 주면 프랑스 국적을 가진 미술평론가들이 얼마든지 비평해 줄 수 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것을 언론에 알리고, 그것을 또 그대로 받아 신문에 알릴 것은 뭐란 말인가?

이 사건은 이미 도래해 버린 이미지의 홍수 시대에 한국의 시민들이 이미지를 읽을지 모르는 그래서 문맹자가 되어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심지어는 예술의전당이라는 굴지의 미술관마저 당했으니 얼마나 사진에 대해 무지했는가, 그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준 슬픈 사건이다.

소위 사진을 감상하거나 독해할 때, 사람들은 사진가의 말을 듣곤 한다. 사진가 장국현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선보인 적 없는 신령스러운 소나무들로 영적인 기운이 서려 있는 작품”이라며 “산의 정기와 소나무의 맑은 기운을 담아내기 위해 새벽에 산에 올라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전문가들은 50년 이내 소나무 개체 수가 반으로 줄어들고 100년 이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쯤 후손들이 제 작품을 통해 소나무를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라고까지 했다.

언어는 진실을 담지 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이미지와 같다. 그것으로 진실을 담보할 수 없다. 신령스러운 이미지를 담기 위해 신령스러운 나무를 해친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결국 돈과 명성을 위해서라면 법을 어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생명을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온갖 거짓된 언어로 사람을 속이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사진에 대한 비평은 사진 이미지 가지고만 할 수도 없지만, 사진가의 말만 듣고도 할 수도 없다. 사진가의 말을 듣되, 그의 행적을 반드시 크로스체킹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평가가 혹은 사진을 보는 이가 사진 공부를 해야 하고, 그 위에서 사진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사진가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이번 장국현 사진전 사건은 그가 사진 이미지 읽기에 눈 뜨지 못하고, 이미지에 현혹되고 돈 숭배에 굴종하는 한국인을 욕보인 사건이다. 천박한 한국인의 맘몬주의 세태가 빚어낸 참극이다. 이미지를 위해 실체를 훼손하는 것, 본질이 없는 이미지가 본질을 가진 실체를 구축해버리고 그 안에서 인간은 그 이미지에 예속되어 사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다.

필자소개
이광수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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