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부처님 계신 곳, 영주 흑석사
    [목수와 함께 가는 옛집 나들이③] 영주 흑석사, 부처님 뵈러 가자
        2012년 07월 30일 04: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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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석사

    문화재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자들도 거의 모른다. 심지어 흑석사가 있는 영주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한다. 이런 무명의 절집에 국보 1점, 보물 1점, 지방문화재자료 1점이 있다. 흑석사, 오래된 건축물은 없지만 좋은 부처님(불상)이 여러 분 있어 소개한다.

    흑석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폐사되었는데 1950년대에 상호 스님이 중창하였다. 상호 스님은 해방전까지 소백산 국망봉 아래 초암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6.25때 소백산 일원의 소개령으로 초암사를 나와 폐사지인 흑석사터로 옮겨 와서 자그마한 초막을 짓고 절을 새로 열었다. 이때 상호 스님은 초암사에 봉안되어 있던 목불을 직접 업고 왔는데 이 불상이 바로 국보 제282호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다.

    목조아미타불좌상

    이 목조아미타불좌상은 조선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15세기 중엽 조선초기 불상의 대표작이다.

    불상의 복장 유물에서 명확한 기년이 확인되었는데 원래 정암산 법천사(원주의 법천사지로 추정)에 삼존으로 봉안되었던 불상이다.

    불상은 계란형의 좁고 살이 빠진 상호에 전체 불신은 아담하고 다소 마른 듯하다. 고려 후기의 화려하고 우아한 불상과는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머리는 나발이 뚜렷하고 수인은 아미타중생인을 하고 있다.

    옷주름은 신체 표현에 비해서는 높고 큰 편이나 유연하고, 세장한 신체에 동감을 주고 있다. 상체에 비해 하체는 조금 더 살이 오른 편이다. 왼쪽 팔굽에도 Ω형의 겹친 표현이 있으나 고려 후기의 불상이 변한 새로운 양식의 불상이라 할 수 있다.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불상과 같이 정형화되거나 화려한 부처님이 아니다. 억불숭유를 내세운 조선 초기 불교의 처지를 아시는 듯 약간 마른체형에 번뇌를 이기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국보 제282호)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특수한 금고에 봉안되어 있다. 직육면체의 특수방화금고 외부에 닷집 문양을 덧대어서 이질감을 없앴다. 금고의 전면은 특수유리로 제작하여 외부에서 볼 수 있게 했다. 한번 수난을 겪은 불상이라 도난방지를 위한 감시카메라와 화재감지기도 설치되어 있어 국보에 맞는 대우를 받는다.

    목조아미타불좌상 및 복장유물이 국보가 된 내력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993년 11월 05일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그 과정이 재미있다.

    때는 1980년대 후반 어느 가을날.

    당시 목조아미타불좌상은 열 평쯤 되는 허름한 목조 전각에 모셔져 있었다.

    지금도 흑석사에 계시는 부봉 스님이 아침 예불을 드리려 가보니 불상이 없다. 낭패다. 상호 큰스님께서 팔십여리 산길을 직접 업고 온 불상이 아니던가. 즉시 경찰서와 시청에 연락하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날 오후 절에서 삼백미터쯤 떨어진 논바닥에 불상과 여러 복장유물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게 발견되었다. 조심스럽게 수습하여 흑석사로 옮겨왔다. 여태까지 누구도 불상의 내부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복장유물의 존재를 몰랐는데 도둑이 복장유물을 모두 헤쳐 놓은 것이다.

    이를 수습하여 다시 목불의 복장으로 봉안하려고 보니 그냥 넣어둘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문화재청 관계자와 관련 학자들을 흑석사로 불러 불상과 복장유물을 자세히 하나하나 살펴보니 이건 국보급이었다.

    이후 체계적인 연구와 고증,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1993년에 이 불상과 복장유물은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아쉬움

    나는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볼 때면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첫 번째는 그 도둑놈에 대한 원망이다.

    이 목불은 세조4년(1458년) 조선왕실과 종친들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다. 발원자들의 신분으로 보아 금이나 은으로 된 사리함과 작은 불상이나 탑도 함께 복장에 봉안하였을 것인데 이것이 없다.

    이 불상이 조성되기 약 육십년전 세조의 증조부인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기 1년 전(1391년) 역성혁명을 위한 발원문을 금동사리함에 담아 금강산 월출봉 아래 묻지 않았던가. 그 정도의 사리함과 소불, 소탑 등이 있었으니 도둑은 그것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버리고 갔을 것이다.

    아~~~ 생각할수록 너무 아쉽고 열 받는다.

    두 번째 아쉬움은 복장유물이 대구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목조아미타불좌상은 더 이상 화를 입지 않기 위해 특수금고 속에 봉안되어 흑석사에 있다. 하지만 복장유물들(아미타삼존복장기』등 7종, 불상조성권선문, 『불설대보부모사중경목판본』,『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금니묘법연화경권이변상도』,『감지은니묘법연화경』3권 등의 전적과 보자기, 번 등의 직물류, 복장용의 사리, 칠약, 오곡 등)은 당시 자세한 분석과 보존처리를 위해서 대구박물관으로 가져간 후 지금까지 반환되지 않고 있다.

    대구박물관은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 유물이 종이, 천, 곡식 등이기에 보존하는데 항온, 항습시설이 필수이고,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기에 보존시설이 없는 흑석사에 반환할 수 없다고 한다.

    비록 흑석사에는 그런 시설이 없지만 인근의 부석사 성보박물관, 소수서원박물관 등도 있는데 왜 대구박물관에서 보관해야만 하는지…

    세간에는 이 유물을 흑석사에 반환하면 대구박물관에는 국보가 하나도 없게 되기에 절대로 안 내어 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화재 약탈은 국가간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안에서도 진행중이다.

    흑석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 머리는 소라모양의 나발로 표현되어 있으며 정수리에 육계(상투 모양의 머리묶음)가 솟아있다. 둥근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불상의 목에 표현된 3개의 주름)가 표현되어 있다. 법의는 양어깨에 걸쳐져 있는 통견이며 결과부좌를 하고 손의 모양은 항마촉지인(오른손을 무릎 위에 얹어 손가락 끝으로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은 모양. 부처가 마귀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상징)이다. 부처에게서 나오는 빛장식인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였으며 연꽃잎과 구름무늬를 새기고 두광 안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 신체의 비례감이 좋으며 조각수법도 뛰어나 9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석조여래좌상

    흑석사 법당 뒤편 가장 높은 곳에 전각이 하나 있다. 앞뒷면은 벽이 없고 전면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흑석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이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왼손에 자그마한 약함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인데 뒤편에는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흑석사 부근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발굴하여 모셔 놓았다. 아무래도 임란 때 폐사 되는 과정에서 묻혔던 것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리라.

    석조여래좌상은 흑석사에서 가장 높은 마애삼존불상 앞에, 좌대는 한단 아래 극락전 앞에 여러 석물들과 함께 쌓아 탑처럼 야외에 놓여있고, 광배조각은 범종각 뒤편 경사지에 반쯤 묻혀있다.

    석불의 얼굴은 마모가 심하나 전체적으로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만 어깨가 약간 움츠려 들었고, 무릎 폭이 좁아진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 나타난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얇은 옷은 자연스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양발 앞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대좌는 8각으로 상대석이 없고 중대석·하대석만 남아 있는데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해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표현했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 넣었다.

    장식적인 대좌와 광배의 표현으로 미루어 9세기의 석불좌상 양식을 이어받은 귀중한 작품으로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상, 대좌, 광배가 여전히 따로 놓여져 있는 점이 아쉽다.

    흑석사 석물 이 석물은 석탑이 아니고 보물681호인 흑석사석조여래좌상의 좌대와 다른 석탑의 부재를 섞어서 놓아둔 것이다. 광배는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범종각 뒤편에 반쯤 묻여있다. 하루빨리 석조여래좌상과 좌대, 광배를 한 곳에 봉안해야만 한다.

    마애삼존불

    국보와 보물이 있지만 흑석사의 백미는 마애삼존불이다. 통일신라의 정형화된 석조여래좌상도 좋다. 조선 초기 불교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한 고뇌의 목조아미타불좌상도 명작이다.

    그렇지만 당시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자연암반에 새긴 보살상이 더욱 좋다.

    흑석사 가장 높은 곳에 너비3.5m 높이6m의 우뚝솟은 바위가 있는데, 전면은 평편하고 앞으로 약간 숙여있어 마애불을 새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지금은 마애불 앞에 약사여래좌상이 있어 전체를 보는데 방해가 된다.

    바위의 전면에 얕게 새긴 삼존은 상반신은 보존상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나 하체는 불분명한데 원래 하부는 간략히 생략한 것 같다. 마애삼존불에는 붉은색의 채색 흔적이 남아 있는데 왼쪽 협시보살의 광배와 입술이 특히 선명하다.

    중앙 본존상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두부에 육계가 크고 이목구비의 표현은 간략하다. 머리가 어깨 위에 바로 얹혀있어 상체를 심하게 움추린 듯 보인다. 간단히 말하면 목이 없다.

    옷주름이나 수인, 세부표현은 확인이 어렵다. 본존에 비해 낮게 새긴 협시상은 삼면형의 보관을 쓰고 본존과 같은 형태의 원형 두광만 표현되었다. 그 외는 본존과 마찬가지로 세부표현이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시대추정이 어렵지만 대체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이 마애불은 바위 전면에 비가림막을 덧대어 놓은 것을 십여년 전 제거하고 보호각을 지어 눈, 비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흑석사 마애삼존불1(경북문화재자료 제355호) 마애불 전면에 석조여래좌상이 있어 눈에 거슬린다.

    흑석사 마애삼존불2(경북문화재자료 제355호) 마애불은 백성의 염원을 담아 자연암반에 새겼다.

    절집만 지을 일이 아니다.

    요즘 들어 연세 높으신 부처님만 계시던 흑석사에 불사가 한창이다. 국보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모실 대웅전은 재작년 새로 지었다. 부봉 스님이 기거하실 아담한 요사채도 작년에 새로 지었다.

    절집만 지을 일이 아니다. 도둑이 무엇을 가져갔는지 이십년도 넘은 지금,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뱃속에서 빼어낸 복장유물 만큼은 제자리로 와야 한다. 자연암반의 마애불만 볼 수 있게 하자. 불사를 하는 김에 약사전도 한 채 새로 지어 석조여래좌상도 옮기자. 이때 대좌와 광배까지 제짝을 찾아야 한다.

    흑석사에는 오래된 부처님이 여러분 계신다. 그리고 인자하신 부봉 스님도 계신다.

    필자소개
    진정추와 민주노동당 활동을 했고, 지금은 사찰과 옛집, 문화재 보수 복원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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