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참사 2년,
    기억과 약속의 힘으로
    [기고] '함께 하자'는 416운동 강령
        2016년 04월 15일 09: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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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2014 0416.

    전 국민이 스마트폰으로 참사를 구경해야 했던 충격적 기억은 아직도 그대로다. 2년 전. 우리는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구경꾼 정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국가와 국민. 21세기와 첨단의 현대 민주사회.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큰 배 안에 304명이 그것도 섬 가까이 연안에서 아무런 안내와 구조도 없이 수장되는 동안 대통령은, 군대는, 공권력은 없었다. 전원 구조라는 지상파 언론의 오보 혹은 각본같이 보인 어떤 오보를 그대로 믿고 싶었던 우리만이 있었다. 언론도 없었다.

    참사를 두고 살인마, 학살 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논란이 된다는 표현들이기도 했다. 사실 살인마라는 표현은 4월 19일 당시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가자’고 결심한 다음날 공권력이 그들의 청와대 행진을 막았던 4월 20일 새벽 가족들의 입에서 나왔다. ‘정부는 살인마, 아들딸 살려내라!’

    학살. 고의적 수장 외에는 달리 해석이 안 되는 사태에 대한 직관은 학살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오직 두 눈으로 보게 된 광경을 통해 얻은 연상이었다.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참사가 일어난 해역의 지점이 손에 잡힐 듯 너무 가까운 거리어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동거차도. 그곳에 가면 화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는 것을 느끼고 제2의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살고 있는 섬에서 너무나 가까운, 양식장 주변인데 못 구하다니. 안 구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학살은 여전히 논란인 상태다. 침몰 원인, 구조 방기, 침몰된 세월호,이에 대한 확인과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피해자 가족의 단결된, 역사적인 투쟁과 헌신. 수 없이 많은 노란리본의 물결과 국민적 공감대. 그러나 이 원고를 써야 하는 이유는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처럼 방송은 교묘히 감췄고 심지어 세월호 피로도 조작까지 가하니 우리는 여전히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참사가 불과 2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도 제대로 알기가 어려운 상황에 늘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정부여당은 2014년 총력적으로 방어했다. 유병언의 미스터리가 아마도 방어의 절정이었다고 믿는 이는 여전히 많다. 국정원과 청해진해운의 사이는 상관과 부하의 관계처럼 수백의 지적사항이 미주알고주알 한글 파일에 깨알같이 수록되어 있었다. 선거개입도 마다않는 대통령의 충직한 감시자 국정원은 세월호 실소유주라는 치명적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는 성역 없는 조사, 수사는 사력을 다해 막으라는 지령을 실제 내렸고 확인되었다. 해수부 사주 문건이 그것이다.

    2014년 5월, 세월호 가족은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외쳤다. 그리고 천만 서명을 호소했다. 수백만의 서명의 물결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정부여당은 설마 했다. 보상과 지원에 관한 특별법도 아닌 수사권과 기소권까지 담겨진 진상규명 특별법 조문이 눈앞에 보이자 정부여당은 총력을 다해 막기 시작했다. 특검을 대안으로 타협을 종용하던 정부여당의 압박에 야당은 굴복하고 말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가족은 특검 추천에 관한 가족의 동의권을 끝으로 조사권, 청문회권, 특검요청권을 가진 특별법 입법을 받아 들 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이 바로 14년 11월 7일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비협조권을 발동하며 특조위 구성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것은 바로 15년 1월 16일 김재원 당시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의 ‘특조위는 세금도둑’이라는 공개적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특조위는 무려 10개월의 시간을 버리며 출범을 작년 하반기에 비로소 제대로 할 수 있었다.

    특별법을 무력화하려는 절정은 정부시행령의 기습적 예고로 비롯되었다. 이 시행령 때문에 유승민도 버림받았다. 상위법의 입법취지를 흔드는 정부시행령의 폐단이야말로 위헌이기 때문에 유승민은 국회법 개정을 야당과 합의했다가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쫓겨났다.

    이른바 쓰레기 시행령이라고 불린 박근혜 대통령‘령’의 요지는 이렇다. ‘특조위 운영과 결정의 권능을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민간인으로 구성된 17명의 특조위원에게 주어야 한다는 특별법의 조항을 무력화’하라는 게 정부시행령의 요체였다. 박근혜 대통령‘령’은 특조위원 밑으로 파견하는 고위 공무원들에게 자기 지휘관인 특조위원보다 높은 업무기획행정 총괄권을 주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가족과 시민은 분노했고 작년 4월 16일 1주기에 시행령 폐기 싸움은 일파만파 되었다. 결국 가족과 시민의 헌신적인 저항으로 총괄권은 조정되었고 특조위 17명의 권능은 간신히 유지되었다. 하지만 장기 말판의 왕과 사는 건졌지만 정부는 차, 포, 마, 상, 졸의 상당수를 빼앗고 차지해버렸다.

    이 즈음해서 정부는 세월호 인양 무용론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다시 새누리당 공천을 받은 춘천지역구의 국회의원이라는 김진태는 ‘돈이 많이 드니 세월호 인양을 포기해야’한다고 말했다. 김진태뿐만이 아니라 보수언론, 세력은 세월호 인양 포기론, 무용론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이상 방어가 어려웠던 박근혜는 작년 4월 16일 팽목항에서 인양하겠다고 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

    1주기가 지나면서 2015년은 본격적인 정부여당의 세월호 지우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정부여당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실질적 출범을 지연시켰다. 작년 추석이 지나서야 특조위는 조사신청과 개시를 간신히 본 궤도의 출발점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정부여당은 15년 9월 30일로 법으로 보상신청 마감 기한을 정해 놓고 가족들을 돈으로 정리시키려고 했다. 사실 이것이 작년 세월호 지우기를 위한 정부의 핵심적 카드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산산이 부서졌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 342명은 정부 보상을 거부하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으로 하여 보상을 오히려 제대로 못 받을 수도 있었지만 가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참 신기한 피해자 집단이라는 이야기를 늘 들어야 했던 가족들. 그들은 중졸, 고졸. 여당을 주로 찍었다고 하던 가난한 공업도시로 온 외지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그야말로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다.

    평생소원은 그저 시키는 대로 살며 모나지 않고 운이 그렇게만 나쁘지 않으면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 좀 크면 여행도 갈 수 있고 그리고 결혼할 때 전세자금, 살림장만 도와줄 수 있으면 그만이고 정말 잘 되면 늙어서 고향 땅에 온 식구가 모일 수 있는 집하나 있었으면 한다는 그런 우리 가족들. 말 그대로 우리 가족과 다르지 않았던 그들은 똘똘 뭉쳐 몇 년 몇 십 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겠다며 변함없이 늘 우리의 곁에 있어 왔다.

    가족들은 항구적인 싸움을 위해 사단법인 설립을 2015년 1월에 계획했지만 정부 해수부와 국회의 불가방침으로 사단법인 설립을 하지 못했다. 무려 1년 가까이를 끌어오다 결국 박원순 시장이 있는 서울시에서 가족들의 사단법인 조직 건설을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부 보상을 비롯한 각종 가족 흔들기는 끊임없이 펼쳐졌다. 가족을 갈라놓으려고 하는 불순한 흔들기는 이른바 보수언론과 세력에 의한 ‘세월호 피로도’ 조작으로 가일층 심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지우기 작업은 여론 몰이가 아닌 물리적 지우기로 전환됐다.

    4.16연대 압수수색과 박래군 상임운영위원의 구속 사태는 진상규명 운동에 대한 응징이었으며 국민들을 향한 겁박이었다. ‘애도는 곧 죄’라고 선포한 것이다. 박래군 상임운영위원과 김혜진 상임운영위원 그리고 수백여 명의 시민들을 향한 소환장과 벌금 기소. 탄압은 거셌고 이로 인하여 실제로 진상규명 운동은 위축될 위기에 처했다.

    특별조사위원회를 향한 지우기 작업도 매우 노골적이었다. 해수부 사주문건은 청와대 조사를 결정하려들면 사퇴도 불사하라는 지침이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을 향했고 5명의 새누리당 추천위원들은 빈틈없이 수행했다.

    해수부 작성 문건은 소름 그 자체였다. 적당히 협조 하는 척 하다가 도가 지나치면 방해하라는 것이 문건의 요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은 진상조사 신청을 굴하지 않고 강행했고 또 특조위는 작년 12월 1차 청문회를 개최하여 정부 구조 책임자를 증인으로 소환하여 청문회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방해로 국회 개최를 비롯한 지상파 생중계 등 국민 알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15년 11월 대법원의 판결문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판결문은 살인죄 여부로 조명됐지만 검찰의 침몰 원인 기소를 부결시킨 중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알 수 없는 침몰 원인’이 판시되며 대법원 역시 침몰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구조책임에서도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나온 것이다.

    삼권분립이 제대로 되어 있는 나라라면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한계가 있음이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에 특검을 즉각 실시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헌법에 보장된 삼권분립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가 되어 버렸다.

    작년 12월 민간잠수사에 대한 1심 무죄 판결 역시 국가에게 구조수색 책임이 있는 데도 이를 마치 민간자원 잠수사에게 있다고 기소한 검찰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한 것이다. 무죄탄원 서명 등 국민의 여론에 부합한 판결로 민간잠수사들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말 4.16연대는 탄압 속에서도 작년 6월 28일 창립한 이래로 반년 만에 4,160명의 회원 모집을 돌파하였다. 4.16연대 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가족을 돕는 일이며 진상규명을 위한 일과 다름없다. 가족과 시민이 함께 지도부를 구성하고 운영을 하는 4.16연대를 위축시키려 했던 정부의 의도는 끝내 실패했다.

    올해 4.16연대는 2기 총회를 거치며 2016년 정부여당의 이른바 ‘세월호 없애기’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채비를 갖추며 2주기 노란리본의 물결을 준비하고 있다.

    2016년, 그리고 기억과 약속의 힘

    올해 16년 세월호 없애기의 절정은 특조위 해체와 인양 주도권을 통해 드러나게 될 전망이다. 특조위는 그 실질적 구성과 조사가 보장된 시점은 작년 하반기였다. 이에 따라 특별법에 보장된 총 18개월의 조사기간으로 계산하면 특조위는 적어도 연말 연초까지 조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올해 6월 달까지라고 못 박고 있다. 정부는 작년 1월1일을 시작이라 우기고 있다. 그런데 특조위 임명장 전수 수여는 작년 3월 9일에 이뤄졌으며 예산 첫 지급은 8월이고 조사관 채용은 그 후였다. 정부의 의도는 명백하다. 7월~8월로 예정된 세월호 인양 전에 특조위 조사를 해체시켜야 인양 후 정밀조사와 증거보전에 관한 사항을 정부 주도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특조위가 두 번의 요청권한에 따라 국회 의결을 요구한 특검 역시 마찬가지다. 여당은 정부 주장의 특조위 조사기간 중에 특검을 처리할 의사가 없음을 이번 2월 임시국회에서 명백히 보여주었다. 특검의 동력을 상실시키려는 의도가 명백하다. 19대 국회에서 여야는 문서상으로 합의한 바 있다. 특검을 하고 특검 후보에 관한 추천 합의사항까지. 5월 30일이 19대 국회의 마지막 기한이다. 그러나 특검을 위한 본회를 열지는 미지수다.

    올해의 핵심 정국은 인양을 둘러싼 세월호 종결 구도일지도 모른다. 정부는 세월호 인양 후 정밀조사에서 특조위를 비롯한 민간인과 가족을 배제하거나 제한시킨 다음 세월호의 보존처리 역시 정부 주도로 처리하고 이제 합동영결식을 해서 세월호 종결을 선언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세월호 없애기의 끝판왕인 것이다.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고 정부 책임자는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국정원 통화기록, 지적사항이 나왔음에도 그 유착 여부가 수사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세월호 종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몇 년이 걸리더라도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은 반드시 이뤄져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국민이 제대로 국민대접을 받는 안전사회로 가자는 우리의 약속이었다.

    우리의 기억은 살아있다.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앞에 둔 광화문 416광장과 안산 합동분향소, 기억저장소와 단원고 기억교실, 팽목항 분향소와 동거차도 감시 천막까지 세월호 현장은 건재하다. 참사의 현장을 지키고 기억하려는 가족의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은 변함없으며 이를 지지하고 그 곁에서 함께하는 시민의 행렬도 끊임없다.

    이러한 기억은 참사의 현장과 관련된 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100여 거점과 해외의 전세계적 거점에서 시민과 교포의 기억하기는 만 2년이 되는 지금까지 소멸, 소강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성을 향한 여러 조치들이 시도되고 장기성을 위한 연결과 방안으로 심화 발전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노란리본 나눔과 피켓팅, 서명을 비롯한 종교의식, 영화보기, 문화예술적 확산 등 기억의 힘은 그대로이고 더 발전할 것을 스스로 요구하고 있다. 기록과 연구는 시민에게 확산되고 있으며 다양한 힘에 의해 진상규명을 연구하고 확산하는 노력은 416가족협의회, 특조위, 4.16연대 뿐만 아니라 시민의 힘으로 다양, 다각화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4.16운동이자 4.16 기억과 약속의 힘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4.16연대는 4대 약속의제를 제시하고 기억하고 심판하여 투표할 것을 호소했다. 더민주, 국민의당 등 여러 정당들이 약속을했고 450여명의 후보자들도 약속을 했다. 세월호 막말 후보자 정보 공개를 비롯한 낙선 후보도 선정했으며 또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독하고 악랄한 지우기, 없애기 작업은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한 바 있다.

    80년 광주의 학살을 지우고 없애려는 그 폭압은 지금에 비하자면 비교 불가다. 물론, 21세기는 더욱 교묘해지고 교란역시 매우 정교하게 일어나고 있다. 80년대 기억하기 위한 학생과 국민의 처절한 투쟁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사진슬라이드를, 비디오를 몰래 보며 눈물을 집어 삼키며 잊지 않고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 다짐했던 그 무수한 세월 끝에 두 전직 대통령을 심판대에 세워 사형과 무기징역 구형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배운 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4.16연대를 결성했고 4.16연대의 대학생 부문조직도 건설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80년 5.18이 15년 끝에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 비로소 되었다면 2014년 4.16 세월호 참사는 그보다는 빨라야 한다. 이것이 역사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반복은 안 된다. 역사는 국민의 힘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는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그 절규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민의 외침이었고 4.16운동의 강령인 것이다.

    이 글은 부경대 민주동문회 소식지에 실렸던 글입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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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4.16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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