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의 ‘지적 전투’
그에 대한 방어와 고백
테리 이글턴의 『비평가의 임무』
    2016년 04월 13일 08: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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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의 책 <비평가의 임무>에 대한 비평 글이다. 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100호에 실렸는데 편집부의 허락을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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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번역된 테리 이글턴의 저작들 『이론 이후』, 『성스러운 테러』, 『신을 옹호하다』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는 쉽게 믿기지 않을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자신의 텍스트에서 진리, 정의, 비극, 숭고, 믿음, 신 등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논의와 정치적 저항과 혁명을 뒤섞고 있다.

이글턴은 유물론과 형이상학을 마르크스주의로 종합하는 독특한 비평 이론가라는 점에서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되는 위치에서 작업하는 학자이다.

이글턴의 대담집 『비평가의 임무』(민음사, 2015)는 이와 같은 이글턴의 독특한 이론적, 정치적 입장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텍스트이다. 이 책은 이글턴의 저작과 정치적 삶, 그의 시대가 어떻게 얽혀졌는지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대담자 매슈 보몬트는 이글턴의 모든 저작들의 핵심적인 쟁점을 끄집어내고, 그 의미를 되물으며, 텍스트의 공백과 모순, 당대인들의 비판, 현재의 관점에서 이 저작들에 대한 이글턴 자신의 평가를 이끌어 낸다. 더불어 1960년대 이후 진행된 영어권 마르크스주의와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과의 지적 조우와 갈등을 이글턴의 육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평가의 임무』는 2000년대에 들어와 이글턴이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에 맞서 ‘신’을 옹호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해방의 정치를 접목하려는 이유를 알려준다.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계급 가정 출신의 카톨릭 사회주의자로서 도미니크 수도회의 영향 하에서 지적, 정치적 삶을 시작한 급진주의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아니 신학은 이글턴의 뿌리이다. 이글턴 자신은 60년대 초반, 자신을 카톨릭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규정한다. 뿐만 아니라 신학은 그의 전 작업에 영향을 미친 근본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신앙인이 되는 것은 형용모순인가? 이글턴에게 유물론적 관점과 신에 대한 믿음은 어떤 곤란함을 유발하지 않는가?

이글턴에게 신은 무한한 사랑, 이성의 경계 너머에 있는 사랑을 표상한다. 그것은 초월과 숭고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 이 무목적적인 무한한 사랑은 화폐, 권력, 이해관계, 공리주의와 반정립되는 가치이다.

이글턴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신앙의 공동체는 자본주의적 관계를 초월할 잠재력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존재는 노동하는 신체들이 겪는 고통, 억압받는 가련한 존재들의 삶을 넘어서는 가치들 즉 정의, 사랑, 공동체를 곧장 드러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관심은 비극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된다. 비극은 욕망하는 존재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좌절, “현실 자체의 불가능성의 기표”들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 비극들을 넘어서려는 우리들의 의지를 불태우게 한다. 그 의지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면 혁명”이다. 비극이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을 주체로 생산하듯, 신앙공동체도 동일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비평가의-임무-입체북

이글턴의 저작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다. 『비평과 이데올로기』,『비평의 기능』, 『미학의 이데올로기』, 『문학이론 입문』 등 그의 주요한 이론 저작은 모두 이데올로기 개념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이데올로기란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담론들의 체계’라 할 수 있다. 권력은 다차원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미시적 공간에서 신체에 작용할 수도 있지만 공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존재한다.

이글턴은 텍스트의 무의식(작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되 의식의 조건이 되는 것)에 작용하는 이데올로기의 분석 통해 정치적 효과를 생산해 내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즉각 이글턴에게 미친 알튀세르의 영향을 상기시킨다.

이글턴에 따르면 ‘미적인 것’ 역시 이데올로기와 연결된다. 미학은 예술이 일상의 삶(노동, 기술, 기예)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출현한다. 만물을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로 그 시점에서 미학은 숭고의 대상을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적 윤리학’을 창조한다.

미학은 부르주아 사회의 균열된 질서에 상징적 통일성을 부여함으로써 분열을 치유하려 한다. 이런 미학의 시도는 “정치를 거부하는 일종의 페티시즘”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탈정치의 환상을 조장하려 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예술은 또한 유용성과 상품미학에 대한 “부정을 통한 저항”을 대표하기도 한다. 비평은 예술적 실천들에 허구적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미학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해방적 잠재력을 급진화시키는 개입의 수단이기도 하다. 예술에 정치를 개입시키고 예술이 지닌 유토피아적 잠재력을 급진화하는 개입 말이다.

행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글턴이 말하는 비평은 내용을 통해 드러나는 텍스트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술적 실천이든 비평이든 조잡한 ‘이데올로기적 선전’으로부터 우선 벗어나야 한다.

이글턴에게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란 어떤 교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저작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명시적으로 드러나기보다 모든 곳에 편재되어 있다. 이글턴의 마르크스주의는 그 자체로 징후적 독해의 대상이다.

이글턴은 카톨릭 사회주의, 60년대의 인간주의적 사회주의, 알튀세르주의,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심지어 자유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의 그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적 자원들을 흡수하며 자신의 비판적 개입을 지속해 왔다. 그는 동료들의 장점뿐만 아니라 적들의 장점조차 자기 이론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수용해 왔다. 이 과정에서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잡종’이 되었지만 그가 추구해 온 것은 일관된 ‘해방의 정치’였다.

그는 이론적 저작은 물론이거니와 시를 짓기도 하고, 소설과 희곡, 영화 대본을 썼다. 그의 글쓰기(에크리튀르)는 그 자체로 그의 존재양식이었고 정치적 개입의 수단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은 구별되지 않았다.

『비평가의 임무』는, 그가 20대가 된 이래로, 지난 50년간 수행해온 지적 전투에 관한 “방어이자 고백”이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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