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과 북조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삶
    [책소개]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김시종/ 돌베개)
        2016년 04월 02일 10:0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는 8·15와 4·3을 중심으로 평생의 이야기를 풀어낸 재일조선인 김시종 시인의 자전이다. 긴 세월 가슴에만 묻어둔 채 세상에 내놓지 않았던 기억들을 편집자의 오랜 설득 끝에 이와나미 월간지 『도서』(圖書)에 3년간(2011년 6월~2014년 9월) 연재, 가필을 더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저자 특유의 문체가 드러나는 생생한 문장들은 그 당시와 현재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역사적 시간들을 증언해내고 있다. 이 책은 2015년 12월 제42회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4·3사건의 당사자였던 시인은 더듬댈 수밖에 없는 고뇌를 품고 깊이 봉인해온 많은 기억들을 여든을 넘겨서야 가공할 정교함과 치밀함으로 꺼냈다. 황국소년, 민주화운동과 민주청년동맹의 투사, 그리고 재일외국인 최초의 공립고교 교사로 살아간 가운데 영혼의 묘상(苗床)이 둘로 찢기게 된 시인은 “그리워해서는 안 될 그리움 속에서 내 소년기가 이처럼 어슴푸레 바래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참극을 그려내면서도 바닥에 밀착한 그 시선에는 부끄러움과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 ―와시다 기요카즈鷲田淸一(철학자)

    일본과 조선, 남한과 북조선, 공산당·조총련, 그리고 온전히 정치적 인간이 되지 못한 또 한 명의 자신… 몇 겹으로 갈기갈기 찢긴 ‘재일’이라는 실존을 골신(骨身)의 일본어로 자아내 우뚝 세운 휴머니즘의 궤적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전 아사히신문사 주필)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상은 아사히신문사가 제정한 문학상으로 탁월한 산문작품을 가려 수여된다. 오에 겐자부로와 시바 료타로,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도 수상한 바가 있으며 특히 김석범은 제주 4·3을 그려낸 소설 『화산도』로 1984년에 제1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김시종은 과거에도 평론집 『재일의 틈에서』(在日のはざまで)로 1986년 제40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1992년에는 시집 『원야의 시』(原野の詩)로 제25회 오구마 히데오 상 특별상을 받았으며, 2011년엔 시집 『잃어버린 계절』(失くした季節)로 다카미 준 상을 수상하는 등으로 작가이자 시인으로서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아왔다.

    장편시집 『니이가타』(新潟)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일본어로 썼으면서도 반일본적 서정성과 리듬을 강조한 독특한 글로 응축된 표현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이다. 이번 회상기에서 그는 자신의 생애가 통과해온 수많은 사건과 상황들, 유년 시절 연을 좇아 달리던 즐거운 기억에서부터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강렬한 장면들을 신중하게, 때로는 일렁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힘 있는 글로 써냈다.

    조선과 일본에 살다

    조선으로 떠밀려온 황국소년, 다시 일본으로 떠밀려간 적색분자

    김시종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태어나, 4·3사건에 휘말려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소년 시절 대부분을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에서 보냈다.

    해방 전까지 그는 그야말로 황민화 교육이 길러낸 제국의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일본 동요와 군가에 흠뻑 빠졌으며,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지 않는 부모를 답답해했고, 전차병 학교에 지원하여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 했다. 한글은 한 글자도 쓸 줄 모르고 ‘식민지 지배’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외골수 ‘황국소년’이었다. 그러던 1945년, 열일곱의 그는 자기 나라라는 의식조차 없었던 조선으로 ‘떠밀려오듯’ 해방을 맞이한다.

    두려움과 바닥 모를 후회를 가슴 밑바닥에 쑤셔 넣은 채 기억을 가라앉히듯 나는 일본어로 표현활동을 해나갔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언어는 의식의 밑천입니다. 내 의식의 밑바탕을 만들어낸 언어가 내게는 식민지를 강제했던 종주국의 언어였습니다. 그럼에도 내게 식민지는 가혹한 물리적 압박과 수탈이 아닌 너무도 다정한 일본의 노래, 소학교 창가와 동요, 서정가라고 불리는 그리운 노래로 다가왔습니다. 그만큼 온전히 식민지가 된 시대였습니다.

    김시종에게 일본어란 자신의 감성과 사고체계를 길러낸 정다운 모국어와도 같은 언어였던 동시에 ‘국어’로서 강제되었던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조국의 현실과 사회의식에 눈을 떠 민족의 말과 글, 문학을 왕성하게 배워나갔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학생운동과 남로당 활동에 투신하는 등 커다란 사상적 전환을 겪는다. 그러나 그런 그가 ‘해방’되어 떨어져 나왔던 일본에서 결국은 생의 대부분을 살아가며 일본어로 말과 글을 써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재일시인 김시종이 끊임없이 의식하고 대결해야 하는 쓰라린 조건이자 아이러니였다.

    해방으로부터 7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나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라는 자문은 지속됩니다. 1945년 8월 15일을 기해 그때까지의 내 일본어는 어둠 속에 갇힌 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어둠의 말을 겉으로 꺼내가며 인생 대부분을 일본에서 지내고 있으니 이것은 자신과의 지독한 숨바꼭질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일본어로 시를 쓰는 자신에게 해방이란, 소년기를 뒤틀어가며 익힌 일본어의 정감과 운율을 스스로가 끊어내는 일이라 김시종은 말한다. 유려함을 베어내고 ‘어색하게’ 직조한 자신의 일본어로써 일본어에 보복하는 과정, 그 어눌한 일본어로 생각과 말을 자아내야 했던 과정이 이 회상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였다는 것이다.

    이번 한국어판은 그러한 맥락과 의도까지 포함한 김시종의 일본어를 다시 한국어로 제대로 옮겨내기 위해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의 대응을 각별히 고민하고 여러 세대 한국어 화자의 검토를 거치는 등 신중을 기하여 최선의 번역본이 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끝나지도, 아물지도 않은 4·3의 아픔

    이 연재를 계기로 내가 어떤 관계로부터 ‘4·3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갔고, 나는 어떤 상황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던가, ‘공산폭도’ 나부랭이의 한 사람이었던 내가 밝힐 수 있는 사실은 어디까지인가를 재차 직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식민지 통치라는 업의 깊이에 이를 갈았습니다. 반공의 대의를 살육의 폭압으로 실증한 중심세력은 모두 식민지 통치하에서 이름을 얻고, 그 아래서 성장한 친일파 인간들이며, 그 세력을 전적으로 떠받쳐 준 것은 미국의 혁혁한 민주주의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는 무엇보다도 그간 저자가 오랫동안 속으로만 삼켜온 제주 4·3에 대한 기록이다. 육십여 년이 넘게 그 어디에도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되새길 수밖에 없었던 참혹한 일들까지, 민주화의 영향으로 정리된 기록들을 참고함으로써 정확하게 되살려 비로소 글로 옮겨냈다. 그만큼 이 책에는 당시에 관한 놀랄 만큼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 책 전체가 4·3과 그 전후라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 4·3사건은 한반도의 남북분단과 점령통치에 반대하는 1948년 4월 3일의 주민 무장봉기로 본격화되어 약 6년 반에 걸쳐 일어났다. 1947년의 3·1절 도민집회 무력진압과 우익의 백색테러에 대한 민중의 울분으로 더욱 고조되었던 항쟁에 군과 경찰이 민간인에게까지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탄압을 자행한 결과 제주도의 전체인구 약 28만 명 중 3만 명 이상이 희생되는 참사로 이어졌다.

    저자 김시종은 당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여러 활동에 가담하고 한창 4·3사건이 벌어지던 시기에도 제주 성내에서 연락활동 등에 종사하는 등 4·3사건 한가운데 존재했던 사람이다. ‘우체국 사건’의 실패 후 1년여간 숨어 지내던 그는 1949년 5월, 가족을 남겨두고 학살의 광풍을 피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그는 그때 스스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오해했거나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망라해 기억의 복원을 시도한다. 독자는 슬픔과 분노, 후회가 뒤얽힌 그의 증언을 놀랄 만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쫓아온 경관이 지근거리에서 카빈총을 연사해 후두부가 날아간 H는 그 문에 매달린 채 절명했습니다. 마치 으깨진 두부처럼 깨진 유리에 뇌수가 선을 그으며 늘어졌습니다. 큰길에 있던 경관도 달려왔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동쪽 근처의, 빈 가게가 된 옛 공설시장 안으로 달려 들어가, 좌측의 깨진 창틀을 통해 이웃인 지사 관사의 뒷담을 뛰어넘고, 폭이 20센티미터 정도 되는 돌담 위를 따라 가지가 얽힌 벚나무 가로수 수풀로 빠져나가, 지사 관사의 뒷마당과 등을 맞대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바로 아랫집의 좁은 뒷마당에 뛰어내렸습니다. 바깥쪽 길은 바로 왼쪽이 북국민학교 정문입니다. 수년 전까지 어머니가 가게를 하시던 대각선 방향이 절친한 집입니다. 소학교 삼 년 선배인 고 씨는 해방 전에 오사카로 건너와있어 노모 홀로 사는 집이었습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이틀간이나 숨겨주시고, 문 소년과도 직접 연락해주셨습니다.

    “다음 배 계획도 마련해뒀다. 모레 이 시간, 바위밭 근처로 배가 접근할 것이다. 그다음 조금 더 힘내서 견뎌라.” 드디어 어선에 오를 때가 되어 아버지는 재차 고했습니다. 지금도 가슴을 파먹는 한마디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마지막 부탁이다. 설령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마라.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김시종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4·3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조차 숨김없이 털어놓지 못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남로당 당원으로서 참가했다는 이야기가 엄연한 ‘인민봉기’였던 4·3사건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이를 ‘공산폭동’이라 강변한 미군정과 군사정권의 논리에 동원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불법입국했다는 자백인 셈이 되는 증언을 함으로써 남한 군사정권으로 강제송환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1954년에 이르러서야 청년기의 분기점을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난 세월 깊은 두려움과 후회를 안고, 그 부채를 갚기 위한 여러 활동에 힘써온 그는 자신을 “4·3사건의 빚을 앞으로도 계속 짊어지고 살아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남한과 북조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삶

    목숨을 걸고 사지에서 탈출한 김시종은 밀항 끝에 오사카의 재일 집단거주지 이카이노에 깃들여 살게 된다. 불안과 가난이 뒤얽힌 디아스포라의 공간 속에서 차츰 삶의 자리를 잡아나가게 된 그는 한국전쟁이 치러지던 1950년 무렵에는 고향에서 도망친 사람으로서 빚을 갚고 힘을 보태고자 일본공산당에 가입하고 스이타 사건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사회, 문학 활동을 이어나갔다.

    일본으로 탈출하던 당시 김시종은 본래 ‘북조선’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김일성 우상화와 조총련의 북한 편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57년 조총련으로부터 조직적 비난을 받고 1959년에는 일본공산당에서도 이탈하면서 그는 결국 ‘귀국선’을 타지 못한 채 일본에서 살아왔다. 그는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재일조선인’으로 남았고, 재일외국인 최초의 공립학교 교사가 되어 조선어를 가르치고 시작(詩作)과 강연 활동 등을 계속해왔다.

    일본이라는 ‘한곳’을 같이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실존이야말로 남북대립의 벽을 일상 차원에서 넘어서는 민족융화를 향한 실질적인 통일의 장이라는 것이 ‘재일을 산다’는 내 명제의 요지입니다.

    어디까지나 총칭으로서의 ‘조선’에 매여 살아가는 것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소생은 재일조선인으로서 한국적의 사람입니다.

    고향을 떠나온 지 49년 만인 1998년, 김시종은 비로소 제주를 다시 방문했고, 1년에 한두 번 성묘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국적을 취득했다. 과연 이제 김시종은 대한민국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은 역의 각도에서도 던져져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김시종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단지 김시종에게 한국적을 부여해 한국인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김시종의 4·3을 복권하고 김시종의 재일을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김시종이라는 존재와 사고가 어떻게 한국사회 일부가 되느냐의 문제다. 8·15는, 4·3은 김시종에게 무엇이었나.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이것이 ‘조선’과 ‘일본’, 그 어느 쪽에도 안착하지 못했으며, 안착하지 않겠다는 뜻을 품은 이 책의 제목이 묻는 바일 것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