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
    [왼쪽에서 본 F1] 알론소와 하스
        2016년 04월 01일 01: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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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그랑프리를 시작으로 F1 2016시즌의 대장정이 시작됐습니다. 새 시즌 개막전에서는 누가 우승을 차지했느냐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두 가지 큰 이슈가 더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재밌게도 호주 그랑프리에서 많은 관심을 끈 두 가지 사건은 모두 ‘살아남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페르난도 알론소가 겪은 큰 사고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레이스가 시작되고 전체 경기의 1/4 정도가 지났을 무렵, 맥라렌 소속 페르난도 알론소와 신생팀 하스 소속 에스테반 구티에레스의 레이스카가 충돌했습니다. 문제는 이 사고가 무려 300km/h에서 일어났다는 점이었습니다.

    구티에레스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알론소의 차량은 충돌 직후 왼쪽 앞바퀴 쪽이 완전히 부서지면서 통제 불능 상태가 됐습니다. 거의 속도가 줄어들지 않은 상태로 왼편 콘크리트벽을 직격한 알론소의 레이스카는, 잠시 후 잔디밭을 벗어나 자갈밭으로 밀려나는 과정에서 뒤집히면서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허공에 뜬 알론소의 차량은 그대로 수십 미터 밖 타이어 월(타이어를 겹겹이 쌓은 벽)에 꽂혔습니다.

    일반 자동차였다면 절반의 속도였다고 해도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 아찔한 사고였습니다. 운동량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300km/h의 사고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큰 사고였습니다. 알론소의 맥라렌 MP4-31은 휴지조각처럼 부서졌고, 원래 F1 레이스카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알론소는 자기 힘으로 콕핏에서 빠져나왔고, 잠시 안정을 취한 뒤 관중석의 팬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자기 발로 사고 지점을 벗어났습니다. 써킷의 메디컬 센터로 옮겨져 정밀 진단을 받은 페르난도 알론소에게선 아무 부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충격은 받았겠지만 다행히 외상은 없었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F1의 상상을 뛰어넘는 안전 기준을 확인할 수 있는 소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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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m/h의 사고 직후 휴짓조각처럼 찢어진 알론소의 레이스카

    다행히 부상은 면했지만, 알론소의 사고는 물리적으로 F1의 사고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100년을 훌쩍 넘긴 그랑프리 레이싱의 역사를 돌아보면 너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제대로 된 안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지 채 40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방위적으로 안전을 강화하는 실질적인 조치가 이뤄진 것은 채 2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자율경쟁이라는 것의 위험성

    전 FIA 회장 맥스 모슬리는 “드라이버에게 차 두 대를 보여주고, 한 대는 매우 위험하지만 다른 한 대는 매우 안전한 대신 2초가 느리다고 한다면 어떤 차를 고를까? 모두가 2초 더 빠른 차를 고를 것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빠른 차가 있다면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고, 결국 F1에서 안전 문제가 뒷전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마치 현실 사회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건강도 챙기지 못하고 해로운 환경에 스스로 뛰어들게 되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들립니다.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해놓고, 스스로 위험한 쪽을 선택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더없이 무책임한 소리입니다. 그래서 F1은 강제로 안전 기준을 강화했습니다. 자율 경쟁으로 풀어놓아서는 모두가 위험에 빠지고 그중 적지 않은 수가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kg짜리 헬멧을 쓰지 않는다면 레이스에서 2초 더 빨리 갈 수 있지만, F1에선 가혹한 기준을 통과한 헬멧에 목과 머리를 함께 보호하는 HANS라는 시스템까지 번거롭고 무거운 장치를 강제합니다. F1 레이스카의 안전 기준이 강화됐고, 써킷의 안전 기준이 강화됐습니다. 이렇게 강화된 기준 속에서도 2년 전 쥴스 비앙키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현재의 기준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알론소도 마찬가지입니다. 300km/h의 속도에서 충돌해 차가 산산조각 났지만, 수많은 충돌 시험을 통과한 레이스카는 드라이버가 들어있는 ‘서바이벌 셀’을 완벽히 보호해냈습니다. 부서질 곳은 부서지면서 사람의 생명을 지켜낼 최소한의 공간은 지켜내도록 한 시스템이 정확히 기능한 것입니다. 이런 드라이버 보호를 위한 구조와 복잡한 시험 절차들은 F1 팀의 운영 자체를 어렵게 할 정도로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고 차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지만,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생각에 이런 시스템이 강제된 셈입니다.

    어쨌든 알론소는 살아남았습니다. 드라이버가 스스로 잘한 것이나 못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드라이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F1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FIA의 의무이고, 그들이 연구하고 실험을 거듭해 정한 엄격한 기준이 알론소의 생명을 지켜낸 셈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F1 전체의 경제적인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공감대와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알론소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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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쟁한 기성 팀들을 제치고 F1 데뷔전에서 포인트 획득에 성공한 하스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한 두 번째 얘기는 하스라는 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신생 F1 팀 하스는 호주 그랑프리에서 무려 6위의 성적을 거두며, 포인트 피니시로 화려한 데뷔에 성공했습니다. 올해 하스로 이적한 로망 그로장은 6위가 확정된 뒤 “이것은 우리에게 우승과 마찬가지다!”라고 소리치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팀메이트 구티에레스는 앞서 알로소와의 사고로 레이스에서 이탈했지만, 그로장은 모두 57바퀴를 도는 레이스에서 포스인디아와 윌리암스, 토로로쏘 등 기성팀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페이스를 보여주며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군소팀으로서 살아남기의 절절함과 그 의미

    F1 팬들이 하스의 데뷔 성적을 큰 충격으로 여기는 것은 이전까지 신생팀이 F1에서 어떻게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최근의 신생팀이었던 로터스 레이싱(케이터햄), 버진(마루시아), 히스패니아(HRT)는 F1 데뷔 후 포인트는 꿈에 꾸지 못한 채 팀의 간판이 바뀌거나 팀 해체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마루시아로 이름이 바뀐 버진의 경우에만 데뷔 5년차에 단 한 번 8위로 포인트를 얻은 것이 최근 신생 3팀 중 최고이자 기적으로 여겨졌던 성적이었습니다. 마루시아는 다시 한 번 매노어로 이름을 바꾸고 세 팀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시계를 조금 더 돌리면 ‘수퍼 아구리’라는 팀이 있었습니다. 혼다라는 대기업이 F1 팀을 운영하면서 사실상의 B-팀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순수한 신생팀으로 보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수퍼 아구리 역시 데뷔 첫 해 단 1포인트도 따지 못하고 하위권을 전전했습니다. 대형 팀의 B-팀이라는 든든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수퍼 아구리가 포인트를 딴 것은 21번째 그랑프리에서 8위를 차지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최근에 하스처럼 데뷔전에 포인트 획득에 성공한 것은 2002년의 신생팀이었던 토요타의 예가 있습니다. 하지만 토요타는 처음부터 기존 F1 대형 팀을 뛰어넘는 엄청난 돈과 자원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에, 신생팀으로 살아남는 것부터 걱정해야 하는 다른 팀들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습니다. 실제로 토요타는 F1에서 철수할 때까지 10년 동안 그 어떤 팀보다도 풍요로운 배경 속에서 경쟁에 임했습니다.

    어쨌든 과거의 예는 하스가 2016시즌 데뷔전부터 6위에 오른 것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결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하는 부분에 있습니다.

    신생 하스는 F1 출전을 선언할 때부터 기존 F1 팀들과는 접근 방법이 달랐습니다. 규정이 허용하는 모든 부문에서 페라리의 부품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섀시, 그러니까 레이스카의 기본이 되는 틀은 달라라는 레이스카 전문 회사에 맡겼습니다. 나머지, 스스로 해결해야되는 부문에만 전력을 집중해 최선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이런 하스의 접근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페라리의 B-팀이냐는 비아냥이 나왔습니다. 엔진을 포함한 파워 유닛 등 차의 핵심 요소를 포함한 상당 부분이 모두 페라리의 것이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같은 페라리 파워 유닛을 구입해 사용하는 자우버와 토로로쏘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부품을 스스로 설계, 제작하고 엔진 등 극히 일부만 페라리로부터 받아 쓰기 때문에 비교가 됩니다.

    엄연히 페라리의 B-팀이 아닌데 차의 상당 부분을 남의 것을 쓴다는 것은, ‘정통 F1 팀’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기도 합니다. 자존심뿐 아니라 영혼까지 팔아버리고 무엇하러 F1에서 경쟁하는가 하는 비난이 나오기도 합니다. 같은 페라리 파워 유닛을 사용하는 자우버의 경우,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렵고 능력이 모자라도, 엔진 계통 외의 핵심 요소는 직접 개발하고 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F1 팀으로서 버릴 수 없는 마지막 긍지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스는 긍지도 자존심도 내세우지 않은 셈입니다. 하스의 F1 진출을 진두지휘한 진 하스는 인터뷰를 통해 “하스 F1 팀의 첫 번째 목표는 3년 동안 F1에서 살아남는 것이다”라고 인터뷰했습니다. 아무리 약체에 만년 하위 팀이라도 하스와 같은 태도로 접근하지는 않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하스는 정도를 벗어난 것이고, 좋게 말하면 기존 상식의 틀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군소 정당이 선거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F1에서도 중소 팀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아이덴티티를 버리지 않고 자긍심을 지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중소 팀이 스스로 해체하고 대형 팀에 편입해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살아남았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간도 쓸개도 내어주고 살아남는 것과 살아남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의 경계가 모호하긴 합니다.

    어쨌든 살아남기를 목표로 한 하스의 선택은 일단 성공했습니다. 토요타처럼 큰돈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데뷔 직후 중위권의 전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첫 경기에서 이미 2010년 신생 3팀의 한계를 훌쩍 넘어버렸으니 이것도 성공합니다. 앞으로 단 하나의 포인트를 쌓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2016년의 목표는 달성해버렸습니다.

    하스의 성공은 F1에서 새 팀을 만들려는 이들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시작부터 위신과 긍지, 아이덴티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이전까지의 F1 신생팀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살아남기에 성공한 하스는 생존을 위한 타협의 한계와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치 현실 정치의 진흙탕에 홀연히 뛰어든 진보 정당의 고민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타협할 수 있는 부분이고, 어느 것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이전까지의 생각이 시대착오적인 관성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 속단하기 어렵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의 무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해 하스의 성공 사례는 많은 고민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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