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화쟁의 중도는 중재가 아니다
‘불편한 진실’은 디테일에 숨어있다!
    2016년 03월 31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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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민주노총의 총파업, 총궐기 투쟁으로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에 피신하고, 정부의 탄압과 압박으로 자진출두를 해서 지금은 구속이 된 상태이다. 그 과정에서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정부와 민주노총 사이의 중재 역할을 자임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의 화쟁, 중도, 중재라는 것의 의미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문제에 대해 전비연(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전 집행위원장이었고 지금은 귀농해 농사를 짓고 있는 김종호씨가 기고 글을 보내왔다. 이견과 토론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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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의 ‘살인 노동법’ 저지 싸움이 2016년 3월 말, 19대 국회에서 마무리 돼가고 있다. 지난, 조계종과 화쟁위원회 그리고 도법스님(이하 화쟁위원회), 한상균 위원장을 중심으로 벌어진 논쟁이 이광호 레디앙 전 대표의 주장 글을 마지막으로 이어지질 못했다. 필자의 주장하는 글이 좀 늦은 감은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사회적 의제이고 투쟁이 마무리 돼 가는 시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평가와 더불어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작업을 아프지만 해야 할 것 같다.

그 동안 주장 글을 통해 드러난 것을 요약하자면 이도흠 교수(15년 12월 9일)는 한상균을 내치면 부처를 내치는 것이고 피신한 생명을 내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탈하는 것이라 일갈했다. 우희종 교수는(15년 12월 12일) 한상균 위원장을 경찰에 넘겨준 도법 스님은 화쟁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며 조계종·정부 빼고 약자들만 손해를 본 것이라 보았다. 이광호 대표(15년 12월 16일)는 조계종-도법-한상균 프레임에 빠지는 논쟁은 불필요하며 살인 노동법을 막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화쟁의 본질을 한국 상황에서 잘 설명해 준 이도흠 교수와 ‘불교의 중도는 중간이 아니다’는 우희종 교수의 주장 글에 대체로 동의하며 이광호 대표의 선택하고 집중하자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다만 화쟁위원회의 12월 10일 전후 행보에 대해 우려가 되고 그런 점에서 몇 가지 의미 있는 점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한상균-도법

조계사 피신 시기의 한상균 위원장과 도법 스님(노동과세계)

먼저, 한상균 위원장 경찰출두 이후 화쟁위원회가 ‘사회적 실천을 담보했느냐’

지난 해 12월 10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경찰에 자진출두 형식으로 조계사를 떠났다. 다음날 11일, 노동법 정국과 연동해 화쟁위원회는 사회적 대화를 제안했다. “노동 관련 법 개정을 잠시 유보하고 정부(여당), 야당, 노동계, 종교계 등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마당을 제한하며 화쟁위원회도 적극적 역할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위 제안은 11월 19일, 24일 그리고 12월 8일에도 비슷한 기조로 기자회견을 통해 이미 밝힌 것이어서 새로운 것이 없고 반복된 측면이 있다. 11일 이후, 정부와 새누리당의 거부로 사회적 대화마당은 구체화되지 않았으며 종교계에도 ‘노동개혁 원탁회의’를 제안했지만 아직까지 ‘열렸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조계종 종단 전체도 아니고 더욱이 일개 위원회가 정부여당을 압박해 사회적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야당, 노동계, 종교계 등으로 구성된 사회적 대화마당이라도 개최해 노동법 정국을 서로가 지혜를 내고 모아서 정부를 압박하는 카드로 사용했어야 했다. 의지의 문제다. 이제 흔한 말이 되었지만 약자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두 번째, 화쟁위원회는 정부의 노동법 개정과 관련해 어떠한 입장도 내지 않았다.

화쟁은 중재가 아니다. 권력의 비대칭적 구조에서 노동자들은 사회적 약자다. 작년 말에서 올 초까지 노동법 정국은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집회로 이어지는 일대 전쟁이었다. 이런 시대의 화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입장을 내지 않는다면 화쟁위원회의 화쟁은 공염불이며 존재 이유를 다시 물어야 한다.

지난 해, 1차 민중총궐기대회(이하 민중대회) 이후 한상균 위원장 등 15명이 대량 구속되고 5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소환조사를 받았다. 중간 통신사찰 결과이고 앞으로 더 추가될 가능성이 높지만 1차 발표에 의하면 조합원 94명에게 681회에 걸쳐 통신사찰을 했고 그것도 1차 민중대회를 기점으로 집중되었다. 한국의 권력기관들이 노동법 개정을 어떻게 보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증명하는 예다.

“화쟁은 강자나 약자의 편을 떠나 중재자로서 해야 할 역할에 중점을 두는 입장이다. 사회 평화를 위한 화쟁위의 노력이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도법 스님이 지난 2월 23일 평가 토론회 모두 발언에서 한 말이다. 진영의 논리를 떠나 사실만 보더라도 약자는, 진실은 누구며 무엇인지 정리된다. 대중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화쟁위원회의 위치는 어디인가?

세 번째, 체류기간 이후 두 달 보름 동안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평가도 필요

화쟁위원회가 지난 2월 23일 연 ‘한상균 위원장 조계사 체류 24일, 이렇게 봤다’는 평가 작업을 거치며 나름, 위원회의 활동을 돌아보고 이후 사회적 대화와 관련해 고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12월 10일부터 평가 토론회까지 정부와 새누리당은 끊임없이 경제활성화를 위해 노동법 개혁안을 국회가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규직 전환의 길을 차단하고 비정규직을 더 늘리고, 사용자에게 자유로운 해고를 보장하는 정책이 박근혜 정권의 이른바 노동개혁의 핵심이다.

이 거짓말을 그대로 두고 정웅기 화쟁위원회 기획위원은 토론회 기조발제에서 “화쟁위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 사회적 갈등을 평화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역할에 매진하겠다”고 화쟁의 목적이 중재에 있다며 문제의 본질을 흐렸고 두 달 보름 동안의 평가도 화쟁위원회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임에도 이렇다 할 평가가 없다.

화쟁의 목적은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중생을 넉넉하게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도흠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일심은 현대사회 삶에서 진리와 정의로 통한다. 진리와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화쟁이 아니다”라며 “화쟁은 방법이 아니라 목적일 때 기능한다”고 해석했다. 합당한 지적이다.

네 번째, 권력과 자본에 중재라는 이름으로 한상균 넘긴 건 거두절미하고 잘못

도법 스님은 12월 10일,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화쟁 정신으로 조계사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전제한 뒤 “우리 사회가 기본규칙은 있으나 심판 없이 선수(정부, 국회, 노동계)들이 규칙을 무시하고 경기를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여기에서의 선수는 주연급 선수(정부, 국회)들을 의미하며 한국의 노동자들은 엑스트라도 못 되는 존재고 사회적 약자다. 노동자들을 주연급 선수로 포장해 화쟁위원회가 중재해 어려운 상황을 잘 풀어냈다는 자기 공치사다. 거듭 언급하면 ‘권력이 비대칭적일 때 화쟁은 필연적으로 지배자의 논리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화쟁위원회는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힘없는 노동자들을 대표한 한상균 위원장을 내칠 때 붓다로 살기란 요원하다. 불교의 법회 시작과 끝에 배치되는 삼귀의와 사홍서원에는 부처님에게 귀의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이 있다. 불자면 누구나 맹세하듯 이 발원문을 노래한다. 중생, 즉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지 못하면 부처로 살기도 어렵고 공동체로 살기도 힘들다. 일반적으로 어려움을 피해 절에 들어온 사람은 하물며 도둑이라 하더라도 내치지 않는다. 이게 불교요 경전이다.

집회시위 권리가 침해당할 때 화쟁위원회 역할은 권리 확장의 의미 가져야

12월 5일 2차 민중대회 전부터 경찰은 집회가 신고제인데 허가제로 인식해 불허를 통보했으며 집회가 열린다면 불법집회로 판단했다. 이에 야당과 종교계가 화쟁위원회의 평화집회 기조와 노력에 동의하면서 어려움 없이 집회를 치를 수 있었다. 다만, 평화냐 폭력이냐는 이분법에 1차 민중대회가 노동자들의 폭력집회로 재단됐다. 살인적인 물대포에 백남기 선배가 쓰러졌고 지금도 깨어나지 않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이상 다섯 가지 정도로 필자의 소회를 밝혔다. 정보의 한계로 인해 위의 것들이 자칫 평론가적이고 표피적 평가일 수 있다. 이 글과 관련한 어느 글이든 환영한다. 19대 국회에서 20대 국회로 넘어가는 길목을 걷고 있다. 힘없는 노동자들의 힘든 하루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 중재를 열심히 하는데 말이다.

지금도 유효하지만 그 옛날 1980년대 유행했던 거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그러나 자세하게 보진 못한다’라고 했던가. 바꿔 말하면 불교 등 종교의 가치와 이념이 사람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종교는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거다. 종교적 거룩함과 황금성에 살아있는 권력들과 수평적으로 노동자들이 함께 할 수 있을 때 불교의 화쟁 정신은 의미가 있다.

20대 국회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노동법’ 전선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3월 말이고 4월 13일 자정쯤이면 총선 결과가 나온다. 큰 정치적 변수와 없는 한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을 넘어 개헌 의석수(200석)까지 가능하다는 것이, 차이는 있지만 선거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개헌 의석수를 확보하면 살인 노동법 등은 손 안대고 코 풀 수 있다. 노동자들이 총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드러나는 이유다. 어느 누구도 지금의 헬조선에서 구원해 주지 못한다. 여기에 화쟁의 중재와 중도는 더더욱 없다.

필자소개
전비연 전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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