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평화협정, 쟁점과 전망
    [전쟁과 평화] 평화운동, 무력감에 빠져서는 안 돼
        2016년 03월 30일 10: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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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가 발간하는 월간지 <오늘보다> 4월호에 동시에 실린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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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핵실험 이후, 평화협정 문제가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예를 들어 2월 17일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것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동시에) 병행해 추진하는 협상 방식”을 제안했다. 그렇다면 평화협정이란 무엇인가?

    정전협정과 평화협정

    평화협정 문제를 이해하려면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을 다시 보아야 한다. 정전협정은 5개조 63개항으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정화(停火)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쌍방 관계정부들에의 건의, 부칙으로 구성된다.

    특히 2조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중에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해 “한국국경 외로부터 군사인원을 들여오는 것을 정지한다”(13항 ㉢), “한국국경 외로부터 증강하는 작전 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탄약의 반입을 정지한다”(13항 ㉣)는 규정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군비증강을 통제하여 전쟁 재발을 방지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또한 정전협정 전문은 “최후의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력행위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한다”고 밝혔다. 이는 정전협정이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시적 성격을 띠며 전후에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과도적 성격의 협정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정전협정 4조 ‘쌍방 관계정부들에의 건의’에서는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여 “한국으로부터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를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60항)고 명시했다.

    정치회담은 1954년 4-6월 제네바에서 열렸다. 한국과 유엔 참전국 15개국, 북한과 중국, 소련 등 총 19개국이 참여했다. 그러나 정치회담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장이라기보다는 이미 결정된 분단을 정착시키는 수순이었다.

    예를 들어 유엔군 측은 중국군이 먼저 철수한 조건에서 유엔 감시 하에 남북이 인구비례에 의해 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국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공산군 측은 모든 외국군이 철수한 조건에서 남북의 대표들이 동수로 참여하는 전조선위원회를 구성해 선거법을 마련하고, 중립국 감시단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치르자고 주장했다. 정치회담은 실질적 타협점을 찾으려는 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전장으로 기능했다.

    그 후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에 대한 규정만 남아 있을 뿐, 그 외 전쟁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주요 규정은 사문화, 무력화되었다. 예를 들어 유엔군은 북한이 소련에서 신형 비행기를 도입했다고 비난하고 13항 ㉣이 무효라고 주장했고 1950년 후반 남한에 곡사포, 미사일, 핵배낭·핵지뢰 등 전술핵무기를 순차적으로 도입한다. 당시 미국 아이젠하워 정부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팽창한 재래식전력은 감축하되 대량살상 보복을 위해 핵무기 우위를 확보하고 국지전에서도 전술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뉴룩 정책’을 추구했다.

    또한 남한은 1953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이 계속 주둔했다. 북한의 경우 1958년 중국군이 철수했지만, 1961년 소련, 중국과 ‘우호협력과 상호원조 조약’, 즉 군사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소련과 조약 효력기간은 10년이고 5년씩 연장할 수 있었는데, 1992년 러시아가 북한에 폐기를 통보했다. 중국과 조약 효력기간은 20년이고 20년씩 연장할 수 있다. 중국과의 조약은 “양국이 효력의 상실에 대해 합의하지 않는 이상 효력이 유지된다”고 하여 쌍방이 합의해야만 폐기될 수 있다. 2011년 중국 CCTV는 조약이 2021년에 효력만료라고 보도함으로써 그 의도에 대한 여러 추측을 낳았다.)

    한편,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쌍방은 해상 군사분계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남과 북의 어선이 상대방에 끌려가는 수많은 사건이 발생했고, 1999년과 2002년에 서해교전이 발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오늘까지도 비무장지대는 가장 무장도가 높은 지역으로 남아 있다.

    국군

    사진 출처(링크)와 설명 : 어네스트 존(Honest John)은 핵공격이 가능한 지대지 로켓으로 미국이 최초로 개발한 핵 미사일이다. 최초 발사는 1951년, 실전 배치는 1953년 1월에 있었다. 어네스트 존에는 W31 핵탄두가 장착되며, 1960년대 후반에는 사린 신경가스 탄두가 장착되었다. W31 핵탄두는 ‘증폭핵분열탄’으로 어네스트 존에 장착되기 위해 총 1,650기가 생산되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증폭핵분열탄’ 실험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는데, 미국은 이미 이러한 핵폭탄을 수천 기 생산하고, 나아가 미국은 생화학무기 탄두도 장착했던 셈이다.

    평화협정, 무엇이 쟁점인가

    평화협정이 어떤 내용이 반드시 담겨야 한다는 미리 정해진 규정은 없다. 따라서 평화협정에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하느냐 그 자체가 쟁점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개입한 평화협정 사례를 살펴보면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후 처리의 일환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경우. 1951년 미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이 일본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그 사례다. 이 경우 패전국에 대한 승전국의 요구가 담긴다.

    둘째, 미국이 개입한 전쟁에서 실패하고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약을 체결한 경우. 1973년 베트남 전쟁 당사자가 체결한 파리평화조약이 그 사례다. 조약 체결 후 미국은 직접적인 전투 참여를 중단했고, 1975년 사이공이 북베트남군에 함락되었다. (이는 미국 상원의 비준이 필요한 조약이 아니라 행정협정의 형태를 띠었다.)

    셋째, 미국이 중재자이자 증인으로 서명한 경우. 1993년 ‘오슬로 협정’이 그 사례인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이 서명당사자가 되고 미국과 러시아가 증인으로 참여했다.

    이와 비교하면, 한반도 평화협정은 이 어떤 경우에도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참여국의 합의가 필요하다.

    다만 앞서 언급한 1954년 제네바회의 당시 북한이 제시한 의제는 평화협정에서 다뤄질 쟁점의 원형을 제시했다. 당시 북한은 ‘한반도에서 평화적 조건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 개 항을 제시했다.

    첫째, 외국군대의 철수. 둘째, 남북한의 군사 10만 명 이하로 축소. 셋째, 남북 군대의 평화 상태로의 이전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위원회 구성. 넷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염두에 두고) 외국과의 군사 관련 조약이 평화통일과 양립할 수 없음을 인정. 다섯째, 남북교류를 위한 전조선위원회의 설치. 여섯째, 조선의 평화적 발전을 제네바회의 참가국이 보장하며 통일과정을 위한 여건을 조성할 것.

    이러한 제안에서 특히 외국군의 철수와 군사동맹의 해소, 남북 군축이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당시는 아직 미국의 핵무기가 한반도에 도입되기 전이므로 핵 문제가 별도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정전협정 이후에도 군사적 대결이 오히려 강화된 한반도 현실을 반성해 본다면, 평화협정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하나?

    첫째, 무엇보다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통제하고 본격적인 군비축소로 나아가기 위한 합의가 담겨야 한다. 둘째, 그리고 한미 군사동맹과 한일 군사협력, 즉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강대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가 담겨야 한다. 셋째, 또한 미국이 한반도에서 선제 핵공격 옵션을 전통적으로 유지해왔고 최근에는 한미일 삼국이 미사일방어망(MD)을 증강배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의 핵무기 정책 뿐 아니라 한미일 삼국의 핵무기 정책의 공식적 변화가 포함되어야 한다.

    평화협정 전망

    그렇다면 평화협정 논의가 빠르게 진척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2016년 2월 21일,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 ‘미국은 북한의 최근 핵실험 전에 북한과 평화회담을 합의했다’가 발표되면서 놀라움을 던졌다. 보도에 따르면 “북한이 핵폭탄 실험을 하기 얼마 전, 오바마 정부는 한국전쟁을 공식으로 종식하기 위한 회담을 열기로 비밀리에 합의함으로써 북한이 핵보유고를 삭감하는 조치를 우선 취해야 한다는 오랫동안 유지된 조건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무부 대변인 존 커비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평화협정을 논의하자는 제안은 북한이 제시한 것이다. 미국은 그들의 제안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어떤 대화에서도 비핵화가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북한은 우리의 응답을 거부했다.”

    미국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가? 국무부 대변인의 말을 들어보면 “미국은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6자회담이 우선이다”라는 것이고, 미국의 정책에는 변화가 없는 셈이다. 이미 2005년에 발표된 9·19 공동성명에 따르면,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다”라고 명시했다. 이는 성공적인 6자회담 협상으로부터 평화체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반면 지난해 북한은 미국이 ‘신뢰구축’ 조치로서 평화협정을 우선 협상해야 한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2015년 10월 19일 유엔안보리 의장에 보낸 서한을 요약하면 “북한은 과거에 (6자회담에서) 핵 문제와 평화보장 문제를 동시에 논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논의는 헛된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는 주로 미국이 계속 대북 적대정책을 추구하고 대규모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핵타격수단을 남한에 도입하며 군사적 도발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악순환을 확실히 끝내기 위해서는 그 무엇에 앞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북한은 평화협정을 논의하기 위해서 “북한과 미국의 원칙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의 제안은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비핵화에 관한 어떤 약속도 없는 상태에서 정치관계의 정상화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북미 양자협상에 대한 요구는 남한과 중국이 배제된다는 뜻이다.

    2007년 10월 4일 발표된 남북정상회담 선언에 따르면,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3자라면 남한, 북한, 미국이고 4자라면 중국이 추가된다. 따라서 현재 북한의 제안을 미국이나 남한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 이후 역사적 과정을 보면, 미국은 합의 이행 과정에서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고, 이에 북한은 장거리로켓 발사나 우라늄농축, 핵실험과 같이 더욱 강도 높은 조치로 대응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미국의 불성실한 태도나 북한의 고강도 조치는 각국 정책집단 내부에서 ‘상대방은 역시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불신을 강화하고 협상에 회의적인 목소리를 키우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현재로서는 평화협정 논의에 참여해야 할 당사국이 빠른 시일 내에 접점을 찾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한국의 평화운동이 무력함에 빠질 이유는 없다.

    1970년대 서유럽의 평화운동은 군축협상이 군비를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군비증강의 변명이나 눈가리개로 주로 기능했다고 결론을 맺었다. 협상 참여국이 협상 실패의 원인을 끊임없이 상대방에 전가하고 오히려 군비증강의 불가피성을 선전하는 계기로 활용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유럽의 평화운동은 일방주의적 군축, 즉 타국과의 협상에 따른 다자적, 동시적인 군축이 아니라 자국 정부가 단독으로 취하는 군축을 지지했다. 냉전의 논리를 따르다 보면 군축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한미 군사동맹의 호전적인 핵전쟁 훈련(전략자산 배치), 핵전쟁용 무기도입(사드 미사일)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이 그 출발점이다. <끝>

    필자소개
    임필수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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