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코뮌’의 웅장한 서사
[책소개] 「그래픽노블 파리 코뮌」(자크 타르디/ 서해문집)
    2016년 03월 26일 01: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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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3월 18일, 새벽 3시. 무장한 군인들이 몽마르트르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공격한다. 이 고요한 밤, 지저분한 파리의 포석돌 위로 눈송이들이 조용히 떨어져 사라지기가 무섭게, 이 무리들은 국민방위군(시민군)의 대포를 손에 넣기 위해 기습작전을 펼쳤다. 정부 수반인 티에르의 명령이었다.

혼돈스런 시대였다. 프로이센과의 보불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가 패한 뒤, 프로이센군이 베르사유 궁을 점령하고 파리까지 입성한 터였다. 나폴레옹 3세가 체포되고 프랑스 임시정부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티에르는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해 파리 곳곳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지만 잇달아 진압당하고, 민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티에르 정부는 시민들의 손에서 대포를 빼앗기 위해 비열한 기습작전을 펼친 것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에 격렬히 저항했다. 동이 트자, 파리는 혁명의 기운으로 눈을 떴다. 함성, 반란, 불끈 쥐어지는 주먹…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이날 ‘코뮌 혁명’은 시작되고 있었다.

파리코뮌

이 책은 1871년의 파리 코뮌을 무대로 한 장 보트랭(Jean Vautrin)의 역사추리소설 《민중의 함성》(1999)을 프랑스의 국민 만화가인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가 그래픽노블로 각색한 작품이다. 보트랭의 소설은 거친 호흡의 작가가 그려낸 활기와 숨결, 열정으로 가득한, 19세기 신문 연재 소설에 대한 오마주였다.

그 표지를 맡아 그리게 된 타르디는 이 생동감 넘치는 시대에 대한 광대한 묘사에 반해버렸다. 게다가 이미 오래 전부터 파리 코뮌을 만화로 이야기하고픈 마음을 갖고 있었으니 소설을 만화로 각색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2004년 전4권으로 완간된 이 장대한 그래픽노블은 2001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데생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2011년 합본된 장정으로 재탄생했다.

어느 날 밤 파리의 알마 다리에서 의문의 여인 변사체가 발견되는 사건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젊은 코뮌 전사 지케와 릴리가 페르 라셰즈 담을 넘어 사라지는 5월 28일로 막을 내리기까지 두 달여 시간 동안, 파리 코뮌의 성립에서부터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무너질 때까지의 하루하루를 숨차게 그리고 있다.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의 코뮌 시기를 주 무대로 그렸지만, 코뮌의 배경이 된 보불전쟁을 비롯해 코뮌 정부와 티에르의 베르사유 정부와의 갈등, ‘피의 일주일’ 동안 폭풍처럼 몰아친 살육과 저항의 풍경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타르디는 이 책에서 파리에 대한 사랑, 서민들에 대한 애정과 함께 여성 혁명가 루이즈 미셸이나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쥘 발레스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존경심 등을 한껏 펼친다(실존 인물들이 이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또한 권력에 맞서는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을 숨기지 않고 코뮌의 잊혀진 전사들과 함께한다. 그리고 스산한 거리와 음침한 골목을 무대로 넝마주이, 혁명가, 공증인, 밀정, 불량배, 탈영병, 창녀들이 뒤엉킨 대서사가 펼쳐지면서 코뮌의 파리, 그 시대의 기쁨과 수탈, 무절제와 사랑, 억압된 에너지를 강렬하게 되살려내고 있으며, 사회 정의에 대한 환상적인 희망의 출현, 인간 사이의 우애, 자유의 절대적 가치를 호소력 있게 웅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학을 통해 파리 코뮌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일 뿐만 아니라, 타르디 특유의 아나키스트적이고 민중적인 해석을 음미할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가로로 긴 독특한 판형은 우연한 선택이 아니다. 이 판형 덕분에 타르디는 이야기가 전개되어감에 따라 ‘피의 일주일’과 같은 거리 전쟁 장면을 광대한 더블 페이지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크 타르디, 레종도뇌르 훈장마저 거부한 아나키스트

타르디는 1970~8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그래픽노블의 가장 걸출한 작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타르디의 만화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은 1976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아델 블랑섹의 기이한 모험》 연작이다.

이 시리즈는 뤼크 베송 감독이 2010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여기서 파리는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로 가득 찬 환상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설국열차>의 원작자 뱅자맹 르그랑과 함께 《바퀴벌레 죽이는 사람》(1984)을 발표하기도 했다.

타르디의 또 하나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1914~19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그것은 참호전이었다(C’?tait la Guerre des Tranch?es)》(1993, 한국어판 출간 예정)가 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만화계의 오스카 상으로 불리는 아이너스 상 두 개 부문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한편 타르디는 2013년 1월 ‘레종도뇌르’ 훈장을 거절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가 《리베라시옹》을 통해 밝힌 거절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상과 창조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나는 현 정권이든 어떤 종류의 정권으로부터든 아무것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큰 각오를 하고 이 훈장을 거절한다.”

타르디는 아나키스트인 자신이 어떻게 국가가 주는 훈장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한 작품들로 칭송받아온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포로였던 부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그래픽노블 《내 이름은 르네 타르디-포로수용소(Moi Ren? Tardi, prisonnier de guerre)》(2012, 한국어판 2014)를 출간했다. 또 2015년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개막작이었던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캐릭터를 그렸으며, 배경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1980년 5월 18일 광주

1871년의 파리 코뮌을 다룬 이 책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홍세화 선생은 ‘옮긴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규부대에 의해 궤멸될 숙명이 예정된, 민중 전사들로 이뤄진 비정규부대. 이것이 광주항쟁과 파리 코뮌을 연결하는 열쇳말의 하나일 것이다. 벼랑 끝 전망 속에서도 낮에는 토론하고 밤에는 춤을 추었던, 두 달 남짓의 대동(大同) 세상. 하지만 그것은 ‘피의 일주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일주일이 광주항쟁의 일주일과 그대로 포개지는 것은 역사의 우연일까. (…중략…) 우리는 어쩌면, 이미 새로운 세상을 향한 더듬이 자체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파리 코뮌의 좌절된 꿈과 이상은 더 소중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마지막 바리케이드’라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독자라면 그 꿈과 이상에 동의해주지 않을까. 그런 독자들이 적지 않기를 바란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으로 다시 회귀하는 듯한 이 시대에, 이 책에 등장하는 장바티스트 클레망의 시 <피의 일주일>의 한 대목은 커다란 여운을 남긴다.

내일이면 다시 경찰 나부랭이들이
거리에서 활개를 칠 것이다.
자기들의 복무를 뽐내듯
목줄에 권총을 차고서.
빵도 일자리도 무기도 없이
우리는 지배당할 것이다.
밀정과 경찰과
폭력적인 권력과 성직자들에 의해.
그래… 그것은 흔들리고
최악의 날들은 끝날 것이다.
그리하여 설욕전을 조심하라,
가난한 자들이 모두 함께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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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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