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안하다, 아이들아
    [텍사스 일기] '생존의 채찍'에 휘둘리는 우리 20대
        2016년 03월 22일 11: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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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사스일기 – 1917년생 두 남자 링크

    댈러스는 전형적인 상업도시다. 대형빌딩들만 우후죽순일 뿐 삭막하기만 하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케네디 유적지 외에는 별다른 관광지도 없다. 낯선 도시 낯선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기차를 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K교수님 생각이 났다.

    K교수님은 댈러스 옆 도시 포트워스(Fort Worth)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친다. Texas Christian University가 풀 네임이지만 TCU란 통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이 대학은, 교명이 주는 선입견과 달리 상당히 큰 규모의 종합대학이다.

    K교수님은 페이스북 친구다. 2013년 가을 부산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열렸을 때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 적이 있다. 반나절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공감대가 컸다. 오스틴으로 연구년 갈 거라니까 꼭 연락하라 했다. 그래서 텍사스이글 기차가 포트워스를 경유할 때 전화를 드렸던 게다.

    너무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신다. 중고차 사러 댈러스에 왔다 하니 마침 잘 되었단다. 저녁에 학교에서 리얼그룹(The Real Group)이란 이름의 스웨덴 가수들 아카펠라 공연이 있다는 거다. 구입한 차 몰고 와서 구경하고 오스틴으로 가면 좋겠다는 말씀이다. 댈러스와 포츠워스는 지척이라면서. 리얼그룹은 처음 들어봤는데 알고 보니 세계적 명성의 혼성 5인조 그룹이었다. 2011년에는 성황리에 내한공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정이 이리 되었으니 내 발로 찾아갈 도리가 없다. 호텔 잡기 직전에 전화를 드렸더니 일단 포트워스로 건너오란다. 마침 자기 연구실 조교가 댈러스에 직장이 있으니 오는 길에 픽업을 부탁하면 된다고. 텍사스 어느 시골마을 출신이라는 이 헌헌장부는 의대를 다니다가 신학 전공하러 대학을 옮겼다 한다. 등이 곧고 마음도 곧은 활달한 미국 청년이었다. 박사과정과 전문 피트니스 트레이너 일을 병행한다는 그의 소형트럭을 얻어 타고 노을녁의 텍사스 벌판을 가로지른다.

    저녁 어스름에 도착한 TCU. 교내 극장에서 열린 공연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수준급이었다. 학생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주민들에게 표를 파는 본격 공연이었다(사진 1). 특히 싸이의 ‘젠틀맨’을 패러디한 말춤 아카펠라는 기교와 표현력에서 절정이라 할만 했다. 관객들 모두가 리듬에 맞춰 어깨춤을 들썩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사진 2. 어두운 곳에서 폰카로 찍어 화질이 이렇다. 양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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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저렇게 K교수님께 큰 신세를 졌다. 옆 집 할머니와 공연을 함께 보기로 약속하셨는데 불청객 탓에 약속을 미루셨다 한다. 굳이 호텔 갈 필요가 있냐며 자기 집으로 가잔다. 2층 손님 침실을 우리 부부에게 제공해주셨다. 다음날 아침에는 김치국과 밥, 거기에 맛난 샐러드와 빵까지 구워주신다. 오스틴 가서 먹으라고 흑미, 멕시코 좁쌀의 일종인 레드 퀴노아(red quinoa, 사진 3), 아즈텍인들이 먹었다는 건강보조식품 치아씨드(chia seed)를 바리바리 챙겨준다. 안 쓰는 빨간 색 조지루시 밥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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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고마움을 어찌 갚으랴. 오스틴에 돌아와서 감사 전화를 드렸더니 이리 말씀하신다. “저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받은 도움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중에 교수님도 다른 분께 다시 갚으시면 됩니다.” 앞으로 미국 생활 동안 심중에서 잊지 말아야 할 말이다.

    포트워스 발 오스틴 행 <텍사스이글>은 오후 2시 10분 출발. 시간이 남으니 아침 먹고 TCU를 구경시켜주시겠단다. 1873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2015년 기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 대학랭킹에서 76위. 주립대 가운데 최정상급인 UT 오스틴이 53위인 것과 비교하면 꽤 좋은 대학이다. 역사가 오랜 학교답게 캠퍼스 곳곳에 자리 잡은 건물들이 아름답고 정연하다. 모든 건물이 100여 년 전부터 일관된 건축디자인 기준을 준수하고 있단다. 그리 높지 않은 지상고에 하나같이 연한 크림색 벽돌로 지어졌다(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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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퍼스를 안내하면서 K교수님이 말한다. 미국대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3가지라고. 첫째는 도서관, 둘째는 학생들 먹이는 것, 셋째는 운동시설이다. 지식을 익히고 좋은 식사를 하고 몸을 튼튼히 하는 것. 어찌 보면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것이 교육의 기초라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인상적인 것은 학생회관 2층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수백 명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대형 카페테리아다. 학생이나 교직원은 5달러, 외부인은 9달러를 내면 마음대로 메뉴를 고를 수 있다. 요일마다 바뀌는 메뉴가 백여 가지에 가깝다. 닭고기와 칠면조와 소고기 요리가 있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종류별로 진열대에 가득하다. 과일을 골라 가면 스무디(smoothie)를 만들어준다. 면 요리와 볶음요리 재료를 선택하면 불판 위에서 즉석요리를 해준다. 심지어 채식주의자 전용 메뉴까지 마련되어 있다. 시간이 촉박해서 도서관과 체육시설은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 하지만 학생식당 규모와 시스템을 미루어 그 내실이 충분히 짐작된다.

    방문교수 가기 전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이 나라가 딱히 부럽지 않았다. 그 판단은 귀국한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 나라와 우리가 흑과 백처럼 대조적인 부분이 있었다.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바로 대학이다. 사회 전체가 대학에 기대하는 역할이 다르고, 대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자체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분명히 기울어가는 나라다. 중국의 강력한 추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늦어도 2030년이 되면 국민총생산에서 역전이 이뤄질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예를 들어 PC 제조업체 레노버가 29억 1천만 달러에 모바일의 전설 모토롤라를 인수하는 등, 중국 기업들이 미국 업체들을 속속 흡수합병하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베이징시가 100명의 억만장자를 보유함으로써 미국 뉴욕(95명)을 제치고 세계에서 억만장자가 가장 많은 도시로 등극했다는 뉴스까지 나올 정도다.

    하지만 대학이란 영역만 놓고 봤을 때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하버드대학이 최초로 세워진 것이 1626년.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북동부 대서양 해변에 도착한 것이 1620년이니 고작 6년 만에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그 후 400년 동안 대학은 경제, 과학, 문화 모든 분야에서 이 나라의 경쟁력을 책임지는 산실이 되어왔다.

    규모와 명성, 학문 수준, 연구 실적 등에서 명실공히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넘버원이다. 나라 전체가 대학 시스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특급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사립, 주립, 국공립을 막론하고 대학에 투자하는 천문학적 비용은 접어두자. 무엇보다 확고부동한 것은 대학 설립, 운영, 교육 내용의 원천적 자율성을 존중하는 범사회적 합의다.

    교환교수로 온 텍사스 주립대학, 내가 사는 도시의 UT 오스틴에 이어 세 번째로 살펴보는 캠퍼스다. 하지만 반나절 구경만으로도 지난 1세기 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한 이 나라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를 선명하게 눈치 채게 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국립과 사립을 막론하고, 재정지원을 무기로 관료집단이 대학을 제 것처럼 주무른 지 수 십년이 넘었다. 그러한 지독한 관치를 넘어 이제는 재벌이 직접 대학을 점령하고 있다. 천박한 자본의 논리를 아이들 머리에 반강제적으로 주입시키고 있다.

    미국 대학이라고 문제가 없겠는가. 1980년대 레이거니즘 이후 신자유주의적 기업논리가 캠퍼스를 잠식하고, 과도한 등록금과 교육비대출이 학생들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는 것이다. 대학을 대학이도록 만드는 최소한 안전장치가 작동하는 나라와 그러한 방어막이 완전히 무너진 나라. 이 둘은 외형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여도 본질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부 최고의 명문대로 손꼽히는 스탠포드 대학의 경우 교양학부에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학 과목이 200개 이상 개설되어있다. 대학교육의 가치를 당장 손익계산을 넘어선 긴 안목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순수학문 연구를 통한 사회공헌의 최후 보루가 대학이라는 합의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거시적 엔트로피 관점에서 기초학문의 유지와 발전이 국가 전체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현상이다.

    1년 동안 미국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늘 그리고 저절로 한국 생각이 났다. 문사철의 퇴조는 이미 거대한 쓰나미가 되었다. 고유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국어국문학과가 속속 문을 닫고 있다. 강의의 주요 부분을 맡았던 외래강사들이 대거 퇴출됨에 따라, 국내 대학원 중심의 학문공동체가 완연히 시들어가고 있다.

    그를 대신하여 현금출납부 작성과 부기과목을 교양필수로 집어넣겠다는 천박한 장사꾼 발상이 기어이 대학을 휩쓸고 있다. 정부와 대학재단 모두 돈독이 오른 게다. 국가 백년대계를 구축하는 기초 학문 및 인문학 육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졸속의 극치다. 저능하고 천박한 위정자와 눈 앞 돈벌이에 급급한 자본이 대학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타날까? 두려움을 넘어 무력감이 들 정도다.

    캠퍼스 곳곳을 살피는 내 마음 속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출렁인다. 놀랄만한 장서량과 편의시설을 자랑하는 도서관. 웃통 벗고 캠퍼스를 뛰어다니고, 드넓은 레크레이션 센터에서 땀 흘리는 아이들. 학생식당의 풍성한 메뉴를 여유 있게 즐기는 학생들을 보며 내 머리에 떠오르는 건, 지금도 맹맹한 라면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있을 제자들이다. 도서관은 그저 시험 때 자리잡기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불과한 우리나라 대학의 모습이다.

    스펙 광풍에 내몰려 소용될 곳도 없는 몇백 점 토익점수와 자격증에 목을 매는 아이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양떼처럼 “생존의 채찍”에 휘둘리며 20대의 빛나는 시기를 정신없이 통과하고 있는 제자들. 그래도 선생이라고 나를 믿고 따르는 그들에게 자꾸만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필자소개
    동명대 교수. 언론광고학. 저서로 ‘카피라이팅론’, ‘10명의 천재 카피라이터’, ‘미디어 사회(공저)’, ‘ 계획행동이론, 미디어와 수용자의 이해(공저)’, ‘여성 이야기주머니(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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