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사대천명’은 없다
[왼쪽에서 본 F1] 끊임없이 최선을 다할 뿐
    2016년 03월 15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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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F1 2016시즌이 개막됩니다. F1 레이스카의 공식 주행은 18일부터고 레이스는 20일입니다만, 어쨌든 이번 주 4개월 동안 겨울잠을 자던 F1 그랑프리의 막이 오릅니다.

하루 열두 시간씩 8일에 걸친 프리시즌 테스트가 끝난 지 3주 만에 본 게임이 시작되면, 지난 겨울 동안 가장 빠르면서 가장 안정적인, 그리고 가장 조종성이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F1 팀 엔지니어들의 노력의 결과물이 팬들에게 선을 보이게 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 )’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만, 이 표현이 썩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진인사는 좋지만 천명을 기다린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천명이란 것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나머지는 운에 맡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더욱 싫습니다. 굳이 그런 말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저 자신은 그런 표현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F1 드라이버 중 가장 좋아하는 키미 라이코넨이란 드라이버가 있습니다. 필자가 라이코넨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운’이란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입니다. 본인이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피해는 혼자 뒤집어써야 하는 상황에서 운을 탓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물론 운이라는 것은 관계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라이코넨 한 사람뿐인 것은 아닙니다. 다수의 드라이버가 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필연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말이죠. 운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덕분에 빈틈을 하나도 만들지 않으려는 드라이버들의 경쟁은 항상 치열하고 살벌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바라본다면 ‘F1의 승부에 운이란 없다’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얼핏 본다면, 자동차들이 경쟁하는 모터스포츠만큼 운에 크게 좌우되는 스포츠도 찾기 어렵단 느낌이 들지 모릅니다. 모든 걸 다 잘해내서 앞서나가다가, 자기 잘못이 전혀 없는데 승리를 놓치는 경우가 아주 많은 것이 모터스포츠입니다. F1도 크게 다르지 않죠.

[ 최고의 드라이버였지만 단 한 번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 스털링 모스 ]

[ 최고의 드라이버였지만 단 한 번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 스털링 모스 ]

F1 그랑프리에서 단 한 번이라도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빠른 차가 필요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속도가 높은 것이 아니라, 직진 가속력과 코너 공략 속도를 고르게 갖춰야 하죠. 물론 빠르다고 만사형통은 아닙니다. 조종성이 좋지 않으면 그 속도를 제대로 내 볼 수 없습니다. 주춤주춤하다가 뒤늦게 속도를 내면 이미 다른 차들은 저 멀리 사라져버린 뒤니까요.

빠르고 조종성이 좋은 차만 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차의 신뢰도가 높아야 한다는 큰 장벽이 있습니다. F1 그랑프리는 5분 달리고 끝나는 경기가 아니고, 최대 두 시간 동안 계속 달려 승패를 가립니다. 지정된 거리를 다 달리기 전에 차가 멈춰 서거나 문제가 발생한다면 우승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자동차라면 300km쯤 달린다고 문제가 생길 일이 없겠지만, 차의 한계까지 속도를 끌어올리고 이쪽저쪽으로 큰 힘을 받는 레이스카라면 무리가 많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나는 차를 잘 몰고 있는데, 누군가가 실수로 내 차를 들이받는다면? 역시 우승 기회는 사라져버립니다. 다른 차가 고장으로 내가 가는 길에 오일을 뿌려놨다면, 그 오일을 잘못 밟고 미끄러지거나 스핀 하면서 사고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비가 내릴 때는 갑자기 많은 물이 고인 곳을 밟고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드라이버의 개인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입니다.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겠냐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모두 F1 그랑프리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입니다.

F1에서는 핏스탑이라는 전략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레이스 중 적어도 한두 번은 피트에 들어와 타이어를 교체합니다. 그런데 이 타이어를 교체하는 스무 명 가까운 ‘핏 크루’ 중 한 명만 실수하더라도, 실수가 아니라 휠 건 등 장비에 문제가 있더라도 우승 기회는 허공으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실수 없는 핏스탑이라도, 전략을 잘못 수립해 좋지 않은 타이밍에 피트로 들어온 것 때문에 절대 우승할 수 없는 위치에서 달리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운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 있긴 하는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대표적으로 운이 없는 드라이버라고 이야기되는 모터스포츠의 전설 스털링 모스의 경우, 어떤 분야에서나 최고의 드라이버였고 F1에서도 마찬가지로 누구보다 빨랐지만, 정작 단 한 번도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우승 직전에 ‘자기 잘못이 아닌 이유로’ 멈춰선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스털링 모스는 여러 ‘불운’에도 불구하고 4년 연속 챔피언십 2위와 3년 연속 3위를 차지한 뒤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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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기적적으로 우승한 리지에의 올리비에 파니스 ]

스털링 모스의 경우는 그나마 나을 수도 있습니다. F1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가진 드라이버가 챔피언십은 물론 단 한 차례의 그랑프리에서도 우승컵을 들어보지 못하고 은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승은커녕 포디엄, 즉 시상대에 한 번 올라보지도 못하는 정상급 기량의 드라이버도 많습니다. 반대로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던 드라이버가 깜짝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목을 집중시킬 때도 있습니다.

1996년 전체적인 팀의 전력도, 레이스카의 성능도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정상급 드라이버라고는 보기 어려웠던 올리비에 파니스는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기적적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1명이 레이스를 시작했지만, 모두 17명이 사고나 차량 문제로 레이스를 포기하고 단 네 명만이 결승선을 통과한 희대의 서바이벌 게임이 올리비에 파니스와 소속 팀 리지에에게 기회를 준 셈입니다.

스털링 모스나 올리비에 파니스의 예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비슷한 예를 찾는다면 얼마든지 많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운이 중요한 것 아니냐고요? 부인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드라이버가 운을 탓하지 않습니다. 우승 직전에 타이어 펑처로 멈춰서야 했던 나이젤 만셀도, 선두를 달리며 한 바퀴만 더 달리면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바퀴 축이 부러져버린 키미 라이코넨도 운이 나빴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름 있는 F1 드라이버들이 운이 없었다고 푸념을 해도 누가 뭐라 할 리 없는 상황에서 결코 ‘운 탓’을 하지 않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완벽한 준비를 하는 것만이 승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문제가 생길만한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변수를 줄여나감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된다는 경험에서 우러난 믿음 같은 것이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불가항력에 의한 불운을 경험하면서 몸에 밴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인공 지능 ‘알파고’처럼 불확실한 길을 줄여나가면서 가장 승리 확률이 높은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느새 최강의 전력을 갖게 되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또 하나는 지나간 일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대비하기 위한 마인드 컨트롤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눈앞에 벌어진 불운을 누구에게 탓해봐야 얻는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내 레이스가 망쳐진 뒤에는, 잘못한 이에 대해 처벌이 있을 뿐 피해자에게 보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음 레이스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쓸데없는 많은 생각을 지우고, 운이 없었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F1에는 진인사는 있어도 대천명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진인사 후에 기다리는 것은 또 사람의 일일 뿐입니다. 레이스가 단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도전에 나설 텐데 운을 탓해봐야 얻을 것이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능력 탓을 하라는 얘기가 절대 아닙니다. 다만 도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도전할 생각이라면, 운이 어떻게 작용하든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자신의 최선을 계속해야 할 뿐이란 얘깁니다.

큰 도전을 앞에 두었다면 무릇 사람의 일을 다 해야 하고, 그 뒤에는 하늘의 뜻이나 운을 탓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다시 미래를 준비하는 것뿐이라는 마음가짐. 많은 드라이버가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는 F1을 좋아합니다. 어떤 다른 도전이라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겠죠.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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