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와 자본 중 선택?
    [왼쪽에서 본 F1] 어떤 왜곡된 상식
        2016년 02월 26일 01: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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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시즌 F1 드라이버 라인업이 확정됐습니다.

    전문 기자가 아니라면 자주 뽑는 기사 제목대로라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22명의 드라이버’가 정해졌습니다. 올 시즌 F1 월드 챔피언십에 참가하는 스물두 명의 드라이버가 결정됐다는 이야기인데, F1을 조금 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현재 참가자들이 꼭 가장 빠른 드라이버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위권 팀이라면 어느 정도 최고의 드라이버를 뽑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위권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6시즌 라인업을 가장 늦게 확정한 팀은 지난해 최하위를 차지한 매노어였습니다. 순위만 최하위인 것이 아니라, 예산도 팀 규모도 가장 작습니다. 심지어 올해 처음으로 F1에 뛰어드는 미국의 하스와 비교해도 자본력에서는 더 뒤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덕분에 다른 팀이 지난해 말에 대부분 확정했던 라인업을 2월이 되어서야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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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네시아 최초의 F1 드라이버, 리오 하리안토 ]

    그런데 매노어의 드라이버 라인업이 재밌습니다. 두 명 모두 루키, 그러니까 F1에 처음 참가하는 젊은 드라이버들입니다. 그리고 두 명의 배경이 상당히 다릅니다. 가장 늦게 스물두 번째 F1 티켓을 손에 넣은 리오 하리안토의 경우, 인도네시아가 배출한 최초의 F1 드라이버입니다. 매노어의 시트를 사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가 직접 나서 수십억 원의 지원을 보증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인도네시아 정부가 돈으로 시트를 산 셈이죠. 덕분에 재능 있는 미국 출신의 드라이버 알렉산더 로씨는 F1 챔피언십에 참가하지 못하고 인디카 출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돈으로 시트를 사는 ‘페이 드라이버’는 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습니다. 실력은 없는데 돈 때문에 명예로운 (최하위 팀에서 늘 꼴찌만 하더라도 F1 그랑프리에 출전하는 것만으로 영광이니까요) 위치를 차지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동시에 재능 있는 드라이버가 기회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터진 셈이죠. 특히 파스토르 말도나도의 경우처럼 (필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한 국가가 뒤를 봐주고 지원해주는 드라이버라면 F1 팬들에게 상당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하리안토의 팀메이트가 된 파스칼 베를라인은 큰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독일과 모리셔스의 이중국적을 가진 베를라인의 경우, 지난해 DTM(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가 격돌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투어링카 레이스입니다)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한 젊고 유능한 유망주이기 때문입니다. 재능 있는 드라이버가 시트를 차지했으니 팬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페이 드라이버를 극도로 혐오하는 만큼, 베를라인과 같은 경우는 필요 이상의 환영을 받습니다. 개인적인 예상으로도 베를라인은 실력이 뛰어난 만큼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팬들의 하리안토와 베를라인에 대한 엇갈린 반응은 조금만 따져보면 이상한 부분이 드러납니다. 하리안토는 인도네시아에서 불규칙한 지원을 등에 업고 시트를 차지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를라인은 순수하게 능력만으로 아무 지원 없이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를라인은 독일 드라이버를 키우고 싶어 하는 독일 기업 메르세데스가 애지중지 키워 온, 그러니까 뒤를 봐주고 돈을 대준 드라이버입니다. 그런 지원이 없었다면 올 시즌 시트 확보도, 지난해 DTM 챔피언 타이틀도 없었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하리안토는 (지원이 조금 부실하긴 했지만) 한 국가가 키운 드라이버고, 베를라인은 한 회사가 키운 드라이버입니다. 어떤 회사가 뒤를 봐주는 드라이버가 전형적인 페이 드라이버라는 점에서, 베를라인도 경우가 엄청나게 다른 건 아니란 뜻입니다. 다만 F1에 참가하는 회사의 지원을 받는 드라이버라면 많은 부분 양해를 해주는 팬들의 관점이 반영됐기 때문에 베를라인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뿐입니다. ‘어색하게 국가의 지원을 받는 드라이버보다는 F1에 참가하는 대 자본의 지원을 받는 드라이버가 낫다’는 명제가 무의식 중에 유럽 F1 팬들에게 깔렸다고도 볼 수 있죠.

    [ 메르세데스가 공을 들여 키운 유망주 파스칼 베를라인 ]

    [ 메르세데스가 공을 들여 키운 유망주 파스칼 베를라인 ]

    아쉽게도 베를라인을 단지 재능있는 드라이버인데 자본이 선택한 것뿐이니 자본은 관계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누가 뭐라든 베를라인은 자본이 키운 드라이버입니다. 자본이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하리안토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리안토의 국가(인도네시아)의 지원은 오락가락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베를라인이 꾸준한 ‘페이’가 가능했던 드라이버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력서에 올라오는 성적을 얻을 수 있었던 셈이죠.

    그렇다면 결국 하리안토와 베를라인이 좋은가 싫은가 하는 이야기는 ‘국가냐? 자본이냐?’의 문제로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질문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주 이상한 프레임에 가둬버리는 질문이기 때문이죠. 마치 북한의 로켓 발사 이후 바람직한 대응을 묻는 설문에 ‘1) 사드 배치, 2) 우리도 핵무장.’ 이렇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바보 같은 프레임이죠.

    물론 F1의 시스템 대부분이 어느 정도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팬들이, 필자가 F1을 좋아하는 것은 자본이 좋아서도, 국가가 좋아서도 아니고, 돈으로 얘기하는 현실이 마음에 들어서도 아닙니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조금이라도 순수한 스피드에 대한 열정과 도전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죠. F1을 좋아하는 것은 F1의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모습이나 잔인한 생존 경쟁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하리안토와 베를라인 두 명 모두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 혹은 자본이라는 배경이 있긴 하지만, 반대로 이들에게는 지지해줄 만한 이유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리안토의 모국 인도네시아는 상당한 재력으로 F1 드라이버를 ‘만들었지만’, 어쨌든 유럽인들의 기준으로 인도네시아란 나라는 변방이고 제3세계일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주류 시스템 밖에 있던 하리안토의 도전은 비주류의 주류에 대한 도전입니다. 응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베를라인은 모리셔스의 혈통을 반쪽 가지고 있는 드라이버입니다. 아무리 유럽 지역에서 인종적인 편견을 표출하는 것이 금기시된다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특히 독일에서 독일 드라이버를 키운다는 대명제 아래 큰 드라이버가, ‘순수한 아리안’이 아니라는 점은 누군가에겐 상당히 기분 나쁜 얘기일 겁니다. 그렇게 모리셔스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고, 순수한 혈통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편견이나 인종적 공격의 타겟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실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는 베를라인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한 프레임에 갇혀버릴 만한 상황은 늘 함정을 만들지만, 프레임을 벗어나서 보면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관점이 보인다는 사실. F1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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