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등만 기억하는 사회
    [학교야, 뭐 하니?] "타의 모범"
        2016년 02월 22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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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만큼 소란을 피우는 학생이 있다. 설득해도 나아지지 않을 때, 종종 상담실로 불러 한 시간 이상 얘기를 들어보기도 했다. 시간은 많이 걸리더라도 수업 분위기를 좋게 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 학생을 위해 수차례에 걸친 상담 시간을 확보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만났던 한 학생은 엄마에 대한 불만을 잔뜩 쏟아냈다.

    “정말 엄마를 때려주고 싶다니까요.”

    그 학생은 초등학교 때 엄마에게 상처 받은 일을 생생히 묘사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라고 했다. 식탁에서 엄마가 시험 점수를 물어봤단다. 대부분 90점이 넘었는데, 수학이 60점이라고 하자, 엄마는 갑자기 아이가 먹고 있던 밥그릇을 빼앗아, 앞에 있던 깍두기에 밥을 비벼서 다시 먹으라고 내밀었단다. 어리둥절해서 그냥 먹었더니, 밥을 뺏으며 ‘그 점수로 지금 밥이 넘어 가냐’고 호통을 쳤다고 했다.

    부모가 성적 때문에 자녀를 혼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다.

    한 번은 교무실에 있는데, 나의 초등학생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험을 못 봤다며 수학 점수가 80점이라고 했다. 그래서 80점이면 못 한 게 아니라고 위로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옆에 있던 부장 선생님이, “선생님 정말 대단하다. 그 나이에는 다 백 점 맞아야 되는 거 아닌가?”라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또 다른 선생님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초등학생 친척 아이가 ‘뇌호흡’을 배우러 다녀서, 저 나이가 되면 다 저런 걸 배워야 하나보다고 자기도 생각했단다. 그러나 지금 자기 아이가 공부를 잘하니 이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애가 공부를 잘하면 그런 곳에 왜 갔겠느냐’고.

    교실에서 소란을 피웠던 학생의 엄마나, 교무실의 두 선생님 모두 ‘백점이나 90점 이상을 맞지 못한 아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다.

    나는 우등상에 있는 ‘타의 모범이 되는 학생’이란 구절을 보면 항상 의문이 들었다. 성적이라는 결과만 놓고 상을 주는데,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이 ‘타의 모범’이 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나? 물론 좋은 성적으로 미루어 수업 태도나 학습 태도가 좋았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학교 시험은 상대평가인데다가, 사교육이 과도한 현실에서 좋은 성적은 학교에서의 성실한 학습을 말해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시험을 잘 본 것을 상을 주려 한다면, ‘그냥 성적이 우수함’이라고만 쓰는 게 맞지 않을까?

    한국의 어른들은 은연중에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전교 1등은 전교생의 0.1~0.5%에 해당하는 특별한 학생인데, 그 학생이 ‘모범’이고 ‘표준’이기에 모두 그 학생을 닮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0.1%의 학생을 표준으로 삼고, 나머지 99.9%의 학생들은 모두 개선이 필요한 ‘잘못된 상태’라는 가치관, 그런 가치관으로 양육한 아이들은 커서 어떻게 될까? 나는 이것이 두렵다.

    한번은 한 학생이, 시험 기간 중 부담감 때문인지 자살을 했다. 학생의 죽음은 쉬쉬 됐고 곧 잊혀졌다. 그 무렵에 학교에서 했던 회의가 자살학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의고사 성적 향상 방안, 1,2등급 학생 관리 방안이었던 것이 나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중3 학부모들이 고등학교에 대해 제일 먼저 하는 질문은, 대부분 ‘서울대 몇 명 보냈느냐’이다. 자신의 아이가 성적이 매우 나쁜 경우의 부모들도 똑같은 질문을 많이 한다. 부모건 교사건 최상위 명문대 합격권에 있는 학생들을 제외한 대다수 학생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정도로 여길 때가 많다. 상위권이 아닌 학생들을 뭔가 잘못된 사람, 게으르고 나태해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일류대학에 못 들어간 낙오자라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이 유행했을까. 나는 전교조 교사조차도 ‘공부도 못하고 일류대도 못 나온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돈도 많고 잘 사는 걸 봤는데, 그게 말이 되냐?’고 말하는 걸 들은 일이 있다.

    성장기 내내 이런 믿음을 내면에 각인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당당한 삶을 살기는 어렵다. 학교에서 존재를 부정당했던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승자 독식’의 가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 중 대부분은 공부를 못해서 더 화려한 스펙을 가지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부당한 노동 조건에 처해도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사회에 행복한 일자리가 적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모두 선망하는 대기업 사무직 사원이라 해도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을 하면서 정리해고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나는 시험이 끝나고 채점한 시험지를 구겨버리거나 성적표를 숨기는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곤 했다. ‘시험을 못 본 것은 창피한 게 아니다. 시험은 너희의 인격이 아닌 학습을 평가한 것이니, 공부하는데 유용한 참고 자료일 뿐이다. 친구의 성적과 시험지를 보고 충고해준다는 심정으로, 너희 자신의 시험지와 성적표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분석하고 다시 공부해 보자.’

    그러나 속상해 하는 아이들에게 나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어느 하루 나는 좌절감에 휩싸인 고3 교실에서 대졸자, 석박사가 환경 미화원이 되기 위해 자루를 나르는 실기 시험을 보는 사진과 여러 통계자료 화면을 보여줬다. 그 동안 엎드려 자던 학생들이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매우 현실적인 얘기들을 쏟아냈다. 막막하다는 것이다. 암담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수업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밝았다.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 친구에게 말하듯 소리쳤다. “에이, 이제 수업 좀 그만해요. 우리 저 자루 나르는 데 도움도 안 되고.”

    그날 농담을 주고받으며, 현실에 가깝고 솔직해질수록 오히려 학생들과 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대학만이 전부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면, 입시의 실패가 이렇게 절망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거라는 한 20대의 절규를 떠올렸다.

    ‘줄세우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내면화된 수치심과 자괴감은 사회에 나가서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해도 견디는 능력을 길러준다. 우리 아이들에게 잘 되라고 윽박지르고, 몰아세우고, 창피를 줬던 초중등 10년 남짓의 세월과, 한국의 높은 ‘학력 간 임금 격차’는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갈수록 무한 경쟁의 심화 속에 사라지는 교육의 공공성을 바라보며, 그런 교육 현실이 이 땅의 청춘의 암울한 미래와 겹쳐진다.

    그래도 청소년기의 에너지는 가끔 이런 현실을 누른다.

    모의고사 등급이 나와 있는 성적표를 받으며 학생들이 농담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한우냐? 등급을 나누게?”

    학생들을 등급을 나눠 차별하고, 수치심과 좌절감을 심어주는 교육. 일부 전문직들을 제외하고는, 선뜻 선택하고 행복하게 몸담을 만한 일자리가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일까?

    필자소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23년간 국어교사로 일했다. 현재는 마을과 대안학교에서 청소년들과 책을 통해 만나는 다양한 모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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