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진보적’이라는 것
[왼쪽에서 본 F1] 쉼 없는 도전
    2016년 02월 18일 09:17 오전

Print Friendly

F1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스포츠입니다.

F1 월드 챔피언십이 탄생한 1950년부터 지금까지, F1은 그 시대 가장 앞선 기술이 사용되는 최전선이었습니다. 그래야만 했습니다. F1은 모터스포츠, 즉 자동차 경주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였으니까요.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속도를 포함해 내구도와 조종성 등을 종합한 차의 성능을 사람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자동차 경주에서 승리해야 했고, F1은 그런 자동차 경주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기술이 집결한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이기기 위해선, 그저 잘 알려지고 확인된 기술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잘 알려진 기술은 다른 말로 모두가 아는 기술이고, 모두가 아는 기술로 경쟁한다면 잘해야 남들과 같은 수준에 그치고 맙니다. 결국, 남들과 경쟁해 이기기 위해선 남들이 아직 발을 들여놓지 못한 영역에 들어가야 합니다. 결국 F1에서는 기술적으로 진보적이어야만 승산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 월드에 전시된 F1 레이스카

메르세데스-벤츠 월드에 전시된 F1 레이스카

이런 이유로 F1 팀에는 최고의 기술자들이 모입니다. 동시대 가장 앞선 기술은 물론 아직 검증되지 않은 기술까지도 F1 레이스카 개발에 고려됩니다. F1에 사용되는 레이스카는 일반인에게 판매해 공공 도로에서 달리는 차량이 아닌, ‘프로토 타입’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모험’은 가능합니다. 물론 2시간 가까운 레이스를 몇 차례 달리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안 되기 때문에, 몇 분 쓰고 버리는 실험 재료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안정성보다는 성능 쪽에 조금이라도 더 비중을 두게 됩니다.

F1 레이스카의 공기역학은 항공우주공학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로 최첨단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최고 수준의 기술 연구가 동반됩니다. 덕분에 에어버스나 보잉 등 세계 유수의 비행기 제조사들이 F1 팀과 공기역학 부문의 제휴를 맺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F1 공기역학 기술자가 NASA에서 특강을 하기도 하니, F1의 공기역학 수준이 얼마나 최첨단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F1 레이스카의 엔진도 가공할만한 힘을 보여줍니다. 100kg으로 300km 정도를 달리니 연비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지만, V6 1,600cc의 가솔린 엔진이 900마력에 육박하는 힘을 뽑아냅니다. 터보와 하이브리드의 도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고성능 승용차의 엔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수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가장 강력한 승용차 엔진 중 하나인 현대자동차의 타우 엔진이 V8 5,000cc의 거대한 크기로 400 마력을 조금 넘기는 수준의 출력이란 것을 참고로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술적 도전 때문에, 때로는 F1 그랑프리를 우주 개발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항상 그 시대 최고의 기술이 적용되고, 과학 기술의 미개척 분야로 향하는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기술들이 다수 사용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면 바로 다음 목표를 바라봅니다. 많은 과학 기술 인력이 투입되어 오랜 시간 연구 개발에 매진하지만, 얻을 수 있는 성과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래도 도전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F1이든 우주 개발이든, ‘진보적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F1을 F1답게 만드는 레이스카의 공기역학

F1을 F1답게 만드는 레이스카의 공기역학

그런데 이처럼 ‘항상 진보적’이라는 것은 너무 무거운 말입니다. 실제로 늘 진보적이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목표를 모두 달성하고 안정된 위치에 올라서면, 누구든 그 안정적인 성과를 즐기고 이용하고 거기 머무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주하는 순간 ‘진보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늘 진보적이기 위해선 목표를 달성한 뒤 결코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F1 역사에는 엄청난 기술적 성과로 절대 강자로 군림하다가, 한순간 시대에 뒤처져버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은 발전하고 성장하고 이기는 와중에도 더 진보적이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피곤한 일이지만, 적당히 멈춰서 있으면 금세 다른 쪽에서 더 진보적인 기술적 도전과 함께 앞서나갈 수 있어 방심할 수 없습니다.

2014시즌 F1의 절대 강자였던 메르세데스(메르세데스-벤츠의 F1 컨스트럭터)는 이미 극한의 기술력을 동원해 정점에 다다른 듯했지만, 2015시즌에는 더 강력한 엔진/파워유닛과 레이스카를 준비해 다른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2014시즌 최악의 퍼포먼스를 보이던 페라리가, 2015시즌 (더 강력해졌다는) 메르세데스에 바짝 따라붙었다는 사실입니다. 메르세데스가 확실한 절대 강자의 위치에 안주했다면 바로 순위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제 한 달 뒤면 시작될 2016시즌에도 여러 팀이 어떤 의미에서 도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안정적으로 레이스를 마치기도 쉽지 않았던 팀들조차, 단지 안정을 찾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약적인 성능 향상을 노리고 있습니다. 실패한다면 타격이 크겠지만, 어차피 적당한 수준에 멈춰 선다면 승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난한 전개가 이어진다면 최강 메르세데스의 전력이 위협받을 일이 없겠지만, 상위권 팀 중 하나의 도박이 성공한다면 예상외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기술적인 면에서 F1이 가장 진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사투는 여러 차례 ‘이미 한계에 부딪혔다.’고 여겨지던 벽들을 허물어왔습니다. F1의 가장 진보적인 분야 중 하나인 공기역학 분야에서는 다운포스를 제한하는 규정 변화가 있을 때마다 더 많은 다운포스를 생성하는 새로운 기술이 선을 보이곤 했습니다. 한계가 주어질 때마다 그 한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F1은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스포츠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진보적’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정치 사회 분야에서 ‘진보적’인 것은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진보적이어야 하는 F1 팀과 달리, 현실 정치에선 ‘가장 진보적’일 필요는 없지요. 그러나 진보라는 가치 자체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라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동적이기 때문에 계속 진보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상당히 피곤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히 편한 선에 안주한다면, 더이상 진보적이지 않게 되는 것도 비슷합니다.

10년 20년 동안 계속 하위권을 맴돌면서 승산이 전혀 없어 보이는 F1 팀도 도전을 포기할 법하지만, 진보적이기 위한 노력에는 1등과 꼴찌의 구분이 없습니다. 당연히 1등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스포츠팀인데도 불구하고, 승산이 전혀 없는 팀이 도전을 계속하는 것은 진보적이기 위한 도전을 계속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 노력마저 없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0이 돼버리기 때문이죠. 현실 정치에서 진보가 진보적이지 않으면 승산이 0이 될 수밖에 없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멈추지 않는 진보가 계속되기 때문에, 저는 쉼 없는 도전이 조금 피곤하더라도 F1을 좋아합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