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기와 슬픔의 과거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자기파괴
        2016년 02월 17일 08: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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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플파워와 선거보이콧’ 링크

    제18장 운동을 사로잡은 광기

    1988년에 필리핀 혁명운동의 끔찍한 중단이 발생했다. 그것은 혁명적 지하활동을 괴멸시킨 자폭과도 같은 것이었다. 공개와 비공개 부문, 그리고 게릴라 부대 등 모든 영역에서 다수의 활동가들이 납치 · 억류되고 살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실행자는 반동 군부가 아니라 혁명세력 자신이었다.

    이 가공할 사건은 군 첩보부대의 “프락치 공작”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심어진 “잠입 프락치”에 대해 필리핀 공산당이 전개한 작전에 의한 것으로, 지하활동을 하고 있던 수백여 명의 간부 · 당원과 지지자들이 살해됐다. 이 끔찍한 “숙청”은 마닐라 수도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시작됐다.

    숙청운동은 남(南)타갈로그 지방〔루손 섬의 남부와 민다나오 섬에 걸친 지역〕에서 1982년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 때는 희생자의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당은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5년에서 86년에 걸쳐 민다나오 섬에서 “아호스(마늘)작전”이란 이름하에 숙청운동이 또 다시 재개되면서 그 규모는 최악이 되었다. 몇몇 자료에 의하면 “살해된 사람의 수는 적어도 600명, 많게는 900명”으로, 이는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한 대숙청이나 1975년~78년에 캄보디아에서 자행된 폴포트 정권의 킬링필드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간헐적으로 발생했던 광기가 1988년에 본격적으로 머리를 들어 마닐라 수도권까지 잠식했다. 남(南)타갈로그 지방 공산당 조직이 “잃어버린 링크 작전”(Operation Missing Link)이라는 프락치 색출작전을 개시하면서 그것이 마닐라 수도권과 다른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남 타갈로그 지방에서 잠입 프락치가 “떼를 지어” 출몰하는 놀랄만한 실태가 보고됐다. 이에 경악한 필리핀 공산당 지도부는 프락치 색출작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 작전은 당내에서는 “작전계획 올림피아”로 알려졌고, 또 “당 중앙 방어작전계획”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닐라 수도권에서는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ABB)〔필리핀공산당의 게릴라 부대〕의 첩보요원과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간부 중에서 선발된 요원으로 구성된 연합팀이 프락치 용의자를 체포해 북부 또는 남부 루손의 게릴라 지역으로 연행했다.

    당시 벌어진 일들은 『동지의 희생─혁명은 어떻게 자멸했는가』(2001년)라는 로버트 가르시아의 책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거기에는 당내에서 벌어진 동지에 대한 고문과 살해, 잔학행위의 소름끼치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정당화 할 수 없는 야만행위

    우선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혁명운동 내에서 고문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러한 행위는 스탈린의 적색 테러에서 시작되어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에서의 징벌운동, 폴포트에 의한 대량 학살 등 혁명이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소름끼치는 처참한 사건으로 이어져 왔다.

    나는 당시 전개된 프락치 색출작전의 전모를 알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당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실질적으로 해체된 상태였고, 일부 남은 극소수의 지도부 멤버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 지도부가 연합팀을 형성해 남 타갈로그 지방위원회와 연계를 취하면서 마닐라 수도권의 잠입 프락치 색출작전에 임했기 때문이다. 남 타갈로그 지역위원회가 작전의 핵심이었다.

    당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지도부의 거의 대부분이 일상활동에서 격리되어 지하에 잠행하도록 명령받았다. 나 역시 지시에 의해 조직과의 관계를 끊고 마닐라의 산타 메사에 있는 아파트에서 잠수하고 있었다. 당으로부터의 연락은 그곳을 방문하는 동지를 통해 받았다. 어느 날 프락치 색출작전에 참가했던 한 동지가 와서 그들이 했던 체포작전과 프락치 용의자가 억류되어 있는 남 타갈로그의 캠프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나는 초현실주의적인 풍경 속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지들과의 접촉이 끊긴 채 프락치나 그 색출작전에 얽힌 얘기를 들으면서 모든 것이 음모 투성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동지의 보고에 의하면, 현재 행해지고 있는 프락치 색출작전은 남 타갈로그 지역위원회가 행한 어떤 조사가 계기가 되었다. 잠복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신인민군 간부 한 명이 등 뒤에서 쏜 총을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신인민군 내에 저격범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사보고서는 그 사건이 작전 중에 발생한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남 타갈로그 지역위원회는 조사 결과에 근거해 사건 당시 총을 맞은 신인민군 간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한 멤버를 체포하고 그의 경력과 인척 관계를 심문했다. 그 결과 용의자에게 군인 친척이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 후 용의자에 대해 “철저한 심문”이 행해졌고, 결국 그 용의자는 자신이 잠입 공작원으로 신인민군에 들어오기 전 학생운동 시절에 프락치가 되었음을 자백했다. 그의 “조종자”는 마닐라 수도권의 당 청년학생부에 소속된 학생활동가였다.

    이것은 잠입프락치 색출작전이 어떻게 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는가를 말해주는 극히 작은 예에 불과하다. 남 타갈로그 지역의 예를 들면, 프락치 색출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보고되고 있었다. 즉 신인민군이 남 타갈로그 지역에 진출하기 훨씬 전부터 그지역에 주둔하는 군부대가 잠입 프락치를 심어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잠입프락치가 떼거지로 신인민군에 들어와 적군 병사가 되었다. 그 중의 한 명이 돌연 심경변화를 일으켜 혁명 투쟁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자신이 프락치였음을 자백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사태가 명확하게 되었다.

    청년·학생부와의 커넥션

    잠입 프락치를 공급하는 근원지가 마닐라 수도권의 당 청년학생부라는 것이 밝혀졌다. 당 청년학생부는 당 간부나 적군 병사를 각 지방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남 타갈로그 지역위원회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에 대해 이미 체포된 잠입프락치 및 그 “조종자”와 동료 공작원에 대해 그들이 현재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에 있건 없건, 또는 다른 지구로 전출되었건 관계없이 그들에 관한 뒷조사를 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청년 학생부를 통해 당 조직과 신인민군 전체가 프락치에 오염되어 있고 당 조직 전체에 잠입프락치가 암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락치 문제는 바야흐로 위험수위에 달했다.

    내 조직에도 한 명의 프락치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주요 용의자는 아니었지만, 프락치 잠입 범위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이 동지를 체포하기 위한 팀이 구성됐다. 그의 집은 감시 하에 놓여졌다. 체포팀은 금명간에 그를 체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그 얘기를 듣게 된 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지가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감쌌다. 내 조직에 있던 그가 국가권력의 앞잡이였다는 것에 화가 나기도하고 또 어떤 피해가 있었을까 자문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당내에서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품성은 프락치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다른 동지들에게 예의바른 태도로 일관했고 또 아주 개방적이었다. 우리는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그곳은 그 동지의 부모님 집에 증축된 원룸 타입의 작은 건물이었다. 나는 그에 관해 조금도 이상한 느낌이나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 첩보부에 의하면, 남 타갈로그 지역위원회는 그를 프락치의 네트웍에 연결시킨 다른 프락치의 자백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나는 심한 충격으로 허탈했으나, 좀처럼 그 보고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그를 비방하는 보고서가 당내에 배포됐다.

    보고서에는 그가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인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술이 취해 그의 부인에게 폭력을 휘둘러 그 부인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나 자신은 그 사건을 알지 못했고, 이 보고를 한 인물도 이 정보의 소스를 확인해 주지 않았다. 이 사건이 다소 과장되어 퍼진 얘기라고 하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당내에서 부부 사이에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당 활동가가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당은 그런 문제에 대해 명확한 방침을 가졌어야 했고(당시의 당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원칙이나 규정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또 개인적으로 나는 자신의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동지에 대한 징벌에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문제와 잠입프락치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또한 나는 그 동지가 보여준 부인과 자식들에 대한 마음씀씀이와 애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부인에 대해 폭력행위를 자행했다면 왜 내 눈에 띠지 않았을까라고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는 처음에 체포조로부터 용의자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도록 그와의 만남을 세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 동지가 나서서 나를 그의 체포에 끌어 들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해 계획이 변경되었다. 결국 케손시의 한 대학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연극을 상영하는 중에 그를 체포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프락치 색출작전이 벌어지기 전에 그 동지와 나는 이 연극의 각본을 써서 감독을 도와 준 일이 있었다.

    염려 혹은 경고

    어느 날 밤, 나는 그 동지에게 전화를 해 연극의 리허설과 평가회의 밤에 내가 참석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원래 나는 거기에 참석해서 코멘트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화로 대화를 하면서 그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 팀에 잡혔을 때 그의 신변에 일어날 일들이 머리에 스쳐갔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에게 마닐라 수도권에서도 군이 동지들에 대한 체포작전을 펴고 있다는 보고가 있으니 신변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가 나의 이 말을 동지들 사이에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보위에 대한 주의환기나 우려로 들었을지, 아니면 특별한 경고로 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고맙다면서 충분히 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자신이 무슨 행위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경고를 한 것일까? 그를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가 잠입프락치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때 그는 용의자였지만 곧 체포되게 되어 있었다. 그건 도리에 맞는 일인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마음속에서 당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잠입프락치가 동지들에게 가한 무서운 피해에 대한 인식과 가까운 동지가 잠입프락치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또 다른 인식과를 타협시켜 보려고 애써보았다.

    내가 전화한 며칠 후, 그 동지는 체포됐다. 뉴스 보도에는 한 각본가가 마닐라 수도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유괴되었다고 보도됐다.

    「안가」

    체포된 동지는 지하 「안가」로 연행됐다. 체포조는 나에게 그에 대한 심문에 입회해도 좋다고 알려왔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으로 구성된 팀은 체포자를 고문하지 않고 취조만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입회를 수락했다. 나는 체포된 동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다른 한명의 동지와 함께 어떤 레스토랑 앞에서 차를 타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검은 시트로 창을 가린 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후부좌석에 앉자 안에 있던 안내요원이 아지트의 안전을 위해 눈가리개를 하겠다고 말했다.

    거의 한 시간 후, 안내요원이 도착을 알렸다. 문이 열리고 차가 주차장에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눈가리개를 벗었을 때는 이미 차고 문은 닫혀있었고, 밖의 경치는 보이지 않았다. 낡은 2층집 안으로 안내되었다. 1층과 2층에 몇 개인가의 방이 있었고 창문에는 모두 검은 골판지가 붙여져 있었다. 집 안은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어 시원했다. 권총과 소형 손전등을 휴대하고 있는 몇 명의 동지가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또 다른 동지들이 경계태세를 취한 채 방 주위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우리를 2층에 안내해 억류자가 있는 방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본 광경을 잊을 수 없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의 남성 동지가 눈가리개를 하고 나무 기둥에 양 손과 양 다리를 묶인 채 매트에 누워있었다. 다른 방에는 여성 동지 한 사람이 마찬가지로 눈가리개를 한 채 옆으로 누어있었다. 사슬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기묘하게 조용했다. 그게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잠자고 있는 걸까? 쉬고 있는 것일까?”

    나는 문득 자신이 이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던 때를 생각했다. 그것은 1977년에 군에 의해 체포되어 군의 안가에 연행됐던 때의 일이다. 나는 같은 상황을 목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눈가리개를 하고 침대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을 때, 나도 이들처럼 조용히 있었나?” 저항하게 되면 다시 또 고문을 당하게 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자신이 체포되었을 때 마음속에서 생각한 것을 떠올렸다. 마음은 그 사람이 놓인 상황을 육체보다 더 잘 설명해준다. 억류된 자들은 외견은 조용히 있으나 마음속에서는 절규하고 있다. 그 심장은 종처럼 고동치고 있고 육체의 모든 신경과 근육은 격렬히 요동치면서 자신이 받고 있는 비인간적인 취급에 항의하고 있다. 그들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잠들고 싶어도 잠들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충분히 각성되어 있고 감각은 불에 달구어져 있다. 나는 생각해 냈다─이것은 군의 「안가」에 잡혀있었을 때의 감각이다.

    억류자들을 보고 있던 우리는 서로 얘기하려 했다. “저들은 괜찮은 것일까?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 것 아닐까?…” 놀랍게도 우리는 모두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자문했다. 내 목소리를 억류자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 그런 것일까? 그들의 휴식을 방해한다고? 그들의 육체는 휴식하고 있을지라도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절규하고 울부짖고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 않는가?….

    안내원은 우리를 커다란 방으로 안내했다. 방 한 가운데에는 책상이 있고 주위에 의자가 줄지어 있었다. 안내원은 잠시 방에서 나가더니 몇 명의 동지와 함께 연극 도중에 체포된 그 동지를 데리고 왔다. 그는 사슬에 묶여있지는 않았으나 눈가리개를 한 채였다. 그는 지쳐보였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었으나 동시에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 잡혀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물음에 그는 온순하게 군 첩보부대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한 동지가 그의 눈에서 눈가리개를 벗기자 그는 눈을 찌푸렸다. 밝음에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윽고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턱을 당겼다.

    그가 최초로 나에게 던진 말은 “왜 여기 있어? 당신도 체포된 거야?”였다. 체포조는 자신들이 당의 잠입프락치 색출작전에 종사하고 있다고 설명했으나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에 아련한 고뇌의 표정이 흘렀고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나 그가 전에 소속되어 있던 청년학생부에서의 잠입프락치 활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말하라는 추궁에 그는 “낙카카말리 카요, 낙카카말리 카요”(당신들은 실수하고 있다)라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나는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었고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억류된 동지에 대해 동정적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몰려왔다. 나는 슬픔과 곤혹스러움으로 가득찬 그 곳을 빠져나왔다. 나와 같이 간 동지 역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이 동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프락치 혐의로 체포된 동지들 중 일부는 게릴라 캠프에 연행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격리된 지하 아지트에 유치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 후 우리는 마닐라 · 리잘 위원회로부터 잠입프락치 색출작전 중지명령이 내려졌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이 광기가 당이나 혁명운동에 미친 데미지는 너무나도 컸다. 당의 일부 동지들은 이 작전이 “광기의 극치”였다고 총괄했다. 당 지도부에 의해 작전은 중지되었지만, 100여명, 혹은 그것을 상회하는 당원, 적군병사, 지지자들의 생명이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프락치 색출작전을 총괄하고 남 타갈로그 지역위원회와의 관계를 재검토하기 위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를 통해 우리는 전율할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작전이 계속되었더라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의 지도부도 거의 대부분 체포되어 조직이 괴멸될 뻔 했던 것이다.

    우리는 몰랐지만 남 타갈로그 지역위원회 지도부와 프락치 색출작전을 실시하고 있던 다른 몇몇 조직으로부터의 지령이 있었다. 그것은 전에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소속이었던 한 멤버의 자백을 근거로 잠입프락치 또는 “슬리퍼”(필요한 때까지 활동하지 않고 잠입해 있는 프락치)라고 지명된 동 위원회의 리더들을 체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전 멤버는 이러한 광기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농민 공작을 위해 남 타갈로그 지방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는 당 지역위원회와 상담을 하기 위해 남 타갈로그의 게릴라 캠프에 갔으나 그곳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며칠 동안이나 양팔을 묶인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자백”했고, 그 자백을 근거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 거의 전원을 잠입프락치 연결망의 주모자로 단정하는 어처구니없는 보고서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 자백을 근거로 남 타갈로그 지역위원회 지도부는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과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원정팀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들은 만약 저항을 하는 경우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천운이 따랐다. 원정팀이 마닐라로 출발하려 했을 때, 대장이 총기 수입을 하다 실수로 자신의 다리를 쏘는 사고가 발생했다. 원정은 연기되었고, 운 좋게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아니 필리핀 공산당 전체가 파멸에 이르기 직전에 프락치 색출작전은 중지됐다.

    당의 최고지도부 중에 그나마 정상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사람에 의해 중지가 결정된 것이다. 체포되어 처형된 “첩자”들에 대한 고문과 폭력에 의해 얻어진 “자백”에는 의문이 던져졌다. 특히 마닐라 · 리잘 위원회 지도부와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 지도부에 관한 자백에 관해서는 그것이 거짓 자백이었다는 것이 자백한 사람 본인의 입으로 확인되었다. 그것은 잠입프락치 색출작전이 얼마나 정상궤도를 이탈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는지를 반증해주는 것이었다.

    몇 년 후 나는 안가에서 만났던 그 동지를 만났다. 내가 마닐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잠입프락치 색출작전의 피의자가 되었던 다른 두 명의 동지와 함께였다. 그들의 표정에 아무런 분노와 원한의 느낌이 없는 것에 나는 놀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아무 것도 정당화할 생각은 없다고 말하자 그들은 알겠다고 말했다. 나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그들과 헤어졌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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