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
    [책소개]『폐허를 보다』(이인휘/ 실천문학사)
        2016년 02월 06일 11: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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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지난 한 시대가 만든 인물이며,
    여전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기도 하다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활화산』을 시작으로,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파헤친 『내 생의 적들』,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다룬 『날개 달린 물고기』 등 노동자들의 삶을 짓누르는 어둠과 그 안에서 움트는 투쟁의 불꽃을 기록해온 노동자 출신 작가 이인휘의 신작 소설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직권조인으로 노조가 투쟁에 실패하자 낙심하고 쓸쓸하게 죽어간 남성 노조원, 죽은 남편이 일하던 공장을 찾아가 회사와 노조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며 굴뚝에 오르는 여성 노동자, 사장의 교묘한 술수로 일터에서 쫓겨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늙은 기술자,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착취당하고 술집을 전전하다가 병사(病死)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생을 파괴당한 이들과 그들을 양산한 한 시대의 그림자를 소설로 기록한다.

    전작들에서 우리 사회의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을 돌보는 작업을 계속해온 작가는 이번 작품집 『폐허를 보다』를 통해 파괴된 인간의 상처를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폐허를 보다

    두 개의 시간, 하나의 고통

    『폐허를 보다』에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의 시간은 80년대 노동자들의 것이다. 그들은 가슴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인간 해방, 노동 해방이라는 대의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거칠 것이 없었다. 심지어 목숨마저 그 길에 기꺼이 바치고자 했다.

    작품 「시인, 강이산」에 등장하는 박영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985년 구로구 독산동에 있는 신흥정밀에 입사하여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경찰과 사측의 공작으로 투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동지들마저 경찰에 연행되었다. 1986년 3월, 위기감을 느낀 박영진은 남은 동지들과 함께 파업을 선언하고 식당을 점거했다. 사측과 경찰이 온갖 폭력 수단을 동원해 식당으로 난입하자 옥상으로 올라가 경찰들과 대치하며 공권력의 극악한 탄압에 대항했다. 노동자들의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소와 자극으로 일관한 경찰과 사측을 향해 그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분신 13시간 만인 다음 날 새벽 “전태일 선배가 다 못한 것을 이루려 했는데…….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소설 「공장의 불빛」의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계속되는 고된 노동 속에 죽음이 코앞에 와 있는 것을 깨닫는다. 두 개의 시간 중 다른 하나는 오늘날 노동자들의 것이다. 몸을 혹사하는 노동과 공장 안을 가득 채운 합판 부스러기 먼지, 본드 냄새가 노동자들의 생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그럼에도 사장은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정부 지원을 받아가면서도 숙련된 노동자의 월급을 한 푼도 올려주지 않는다. 오직 “지 말만 잘 듣는 놈을 데리고 현장을 족치려” 할 뿐이다. 여성 노동자들 또한 끔찍한 환경에서 생을 이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소설 「폐허를 보다」의 그녀들은 섭씨 200도가 넘는 철판에서 온종일 호떡을 뒤집고 펄펄 끓는 기름에 핫도그를 담그며 온몸이 식용유 기름에 범벅이 된다. 생산량 목표치는 매달 경신되며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사장의 폭언 또한 점점 도를 넘어간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숙련된 기술을 가진 노동자가 아니라 낡은 기계처럼 언제든 미련 없이 교체해버릴 수 있는 부품 같다. 80년대나 지금이나 노동자의 생활은 한 치 달라진 바 없이 여전히 짐승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만들어놓은 세상
    그곳에서 살다 가는 폐허의 삶

    이인휘 소설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다수가 실존 인물들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노동자들의 삶의 향기를 오롯이 품고 있다. 이인휘는 야학에 다니며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해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자퇴한다. 제대 후 농촌을 떠돌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들어가 노조 활동을 시작하고, 노동운동 과정에서 함께한 박영진 열사가 파업 도중 숨지자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추모사업회를 만들었다.

    그 후 구로구에서 추모사업회 활동을 하며, 광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장편소설 『활화산』, 수배당한 노동운동가의 삶을 그린 『문밖의 사람들』, 남성 페미니즘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등 작가로서도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진보생활 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어 6년간 이끌어온 후 ‘사단법인 디지털 노동문화 복지센터’로 발전시켜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번 소설집의 발문을 쓴 소설가 홍인기는 “그를 지탱하는 큰 힘의 하나는 시대나 이웃에 대한 죄민스러움이었다”라고 했다. 이인휘의 소설에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기계를 돌리는 노동자로서, 글을 만지는 작가로서 그는 자신을 떠난 이들에게 보답하고자 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래서일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작가의 얼굴이 겹치기도 한다. 「공장의 불빛」의 늙은 노동자, 「알 수 없어요」의 소설가, 「시인, 강이산」의 화자, 그리고 그의 동지 박영진, 강이산(박영근), 최성태와 여홍녀라는 소설 속 인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는 지난 작품집 『내 생의 적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아보면 이 글은 내가 썼으나, 어두운 시대를 겪어온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기도 하다. (…) 내가 겪은 삶과 내가 살면서 만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만들어낸 인물들. 가상의 인물들인 그들은, 그러나 한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이며, 여전히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 「알 수 없어요」에서 화자(작가)는 시인 한용운을 생각하며,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며, 작품 속 인물들의 파괴당한 삶을 생각하며 오열한다. 그의 소설은 이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이미 한 번 눈물이 되었다가 종이 위로 토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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