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위한 진보정당인가?
    [연속기고⑥]좌파성,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로 드러나야
        2012년 07월 27일 11: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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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대 총선의 의미를 되새기자면, 그동안 미약하나마 명맥을 유지해왔던 진보의 이념이 부르주아 정치 무대에서 일방적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몇몇 후보들을 국회로 진출시킬 수 있었지만, 이념에 대한 지지를 통해 가능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통합진보당은 진보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민참여당과 이루어진 정략적 통합을 통해 한참 우경화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주당의 왼쪽을 담당하는 역할로 자신을 한정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은 ‘원내진출’을 다시 이루어낼 수가 있었다.

    진보신당과 녹색당이 후보를 내고 선거에 참여했지만, 그 지지율은 한 자리 수 밑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최소한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서 진보의 이념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 과연 진보정당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녹색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은 현실주의와 급진주의의 대립으로 치부하면서 전자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문제는 급진주의를 버리고 현실주의로 간다면 진보도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정당제도가 더 이상 인민의 요구를 적절하게 재현해주지 못하는 위기의 국면이 도래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 10여 년간 본격화하기 시작한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가 이 위기를 추동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진실에 주목해야한다.

    이미 여러 논자들이 지적해온 것처럼, 이 문제를 뭉뚱그려서 ‘신자유주의 경제’로 인해 빚어진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시민’을 어떤 특정 장소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의 존재로 규정했을 때, 한국 사회가 변화해온 방향은 이런 ‘시민’의 소멸,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의 붕괴를 부추겨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흐르는 속성’을 띠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흐르는 자본주의’는 쉽게 말해서 주거권과 노동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가 의문에 부쳐지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위계의 상층에 속하지 않는 한, 삶의 안정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흐르는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높아진 비정규직 비율과 실업률 증가가 이런 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동적인 삶이 대세로 굳어짐으로 인해서 정당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택배 기사나 시급 아르바이트생이 투표를 위해 자신의 노동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활황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중산층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설정했던 한국의 정당정치가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삶의 형식이 전환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부동층의 증가는 예상 득표율을 미궁에 빠트린다는 문제를 넘어서서 정당정치를 이념보다도 대중추수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어, 정당의 존립 근거 자체를 무너뜨린다.

    진보정당이 한국의 정치풍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절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겉늙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진보정당만 위기인 것이 아니라 보수정당도 위기에 처해

    한때 도시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갔던 진보의 이념도 그 중간계급의 붕괴에 따라서 점점 옛말이 되어온 셈이다. 중간계급은 자신의 몰락을 저지하기 위해 복지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진보정당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대의로 내걸고 이에 호응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진보정당 못지않게 위기에 빠진 보수정당이 복지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기 시작하자 상황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진보정당 입장에서야 보수정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겠지만, 보수정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 위기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도 위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안철수 현상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안철수 현상은 국회를 정치인의 이익집단으로 간주하고 대통령을 ‘국민의 대표’로 생각하는 한국 특유의 대의민주주의 제도 때문에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은 한국 정당정치 구조의 한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동시에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실망감을 받아서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안철수 현상의 특징이다. 전자가 단기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장기적이고 이념적인 문제이다.

    정당정치 구조의 문제라면 안철수로서 일정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부르주아 정치의 문제라고 한다면 안철수는 적절한 대안일 수가 없다. 지금 상황은 두 문제가 하나로 겹쳐져서 마치 전자를 해결하면 후자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부르주아 정당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안철수라는 ‘특출한 개인’으로 수렴되는 것은 양가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안철수 또는 중간계급의 지지를 이어 받은 어떤 정치인이 정치개혁에 성공해 전자의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해주고 자유주의 가치를 삶의 형식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다면, 진보정당은 본격적으로 후자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정당이 담당해야 할 의제, 자본주의 극복

    단계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되풀이해서 지적하자면,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당정치의 위기 내에 진보정당이 담당해야하는 일정한 의제들이 숨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의제들을 발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진보정당운동이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과 진보정당은 서로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지지를 받지 못했던 사실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프랑스 대선에 출마했던 좌파전선 멜랑숑 후보의 마지막 대선 유세 ⓒ사진 Blandine LC

    진보정당이 보수정당과 동일하게 중간계급의 의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의 의제를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의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보편성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 합의되는 보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중의 생활에 뿌리박을 수 있는 이념의 보편성이다. 이것을 통해 진보는 국제주의를 체현할 수 있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이념을 수입해서 보편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들이 자신의 처지를 혁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좌파들도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에게 중요한 것은 따라서 한국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재정립하는 것이 이를테면 지금 한국의 좌파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하겠다. 한국의 좌파들이 세계체제 전체의 변혁을 책임질 수는 없다. 한국의 NL이나 아랍근본주의자들이라면 모를까, 이 세상 어떤 정치세력도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이 재현의 장치라고 한다면, 향후 진보정당은 어떤 정치를 재현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이다. 보수정당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보의 가치를 알려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렇게 큰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가장 구체적으로 삶의 형식에 파고드는 ‘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하방’을 총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장소로서 진보정당이 기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진보의 가치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의 위기가 좌파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문제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패러다임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결하는 지점들을 비추는 ‘거울’로서 진보정당이 몫을 다해야하는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정당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좌파성의 강화라는 것은 오직 급진주의로 정당을 포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민주당이나 통합진보당과 다른 근본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훌륭한 정책을 내놓으면 대중이 선택해줄 것이라는 ‘문화진화주의’에 매몰된다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범주에 근거해서 본다면,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보다 훌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진보정당이 필요한 것인지, 그 이념의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필자소개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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