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에 잉여인력이 많은 이유
    [왼쪽에서 본 F1] '데퓨티'와 '리저브'
        2016년 02월 03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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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0월 F1 그랑프리가 한창 진행 중이던 토요일 오후, F1 레이스카의 소리를 뛰어넘는 굉음이 영암의 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바로 일요일 레이스 식전 행사의 일환으로 펼쳐질 에어쇼의 예행연습이 시작됐기 때문이었습니다. 필자를 비롯해 패독에서 인터뷰 등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젖히고 블랙 이글의 멋진 비행을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에어쇼에는 예행연습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문제가 얽혀 있었습니다. F1을 이끄는 회사 FOM이 에어쇼의 안전 문제를 이유로 거액의 보험 가입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관중과 대회의 안전을 위해 보험에 가입하는 대신 3km 밖에서만 비행이 펼쳐져야 했지만, 곡예비행이 펼쳐지는 동안 누가 봐도 3km 안쪽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거리까지 비행기가 다가왔습니다. 이후 FOM과 우리나라의 F1 조직위원회 사이에는 소송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격한 대립이 이어졌습니다.

    [2013 코리아 그랑프리의 축하 공연으로 펼쳐진 에어쇼]

    [2013 코리아 그랑프리의 축하 공연으로 펼쳐진 에어쇼]

    누가 잘못한 걸까요?

    필자는 딱히 한쪽의 잘못이 크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상식적인’ 보통 사람들이라면, 채 1시간도 펼쳐지지 않을 이벤트에 ‘쓸데없이’ 큰돈을 들여 보험에 가입하지는 않을 겁니다. 더구나 F1 그랑프리는 이래저래 큰 비용이 드는 행사로, 코리아 그랑프리의 조직 위원회는 비용의 압박이 상당한 가운데 주변의 반대 여론과 싸우는 입장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돈을 끌어내 보험에 가입하는 건 문자 그대로 무리였을지 모릅니다.

    반대로 FOM의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F1에서는 언제든 ‘안전’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업도 마찬가지지만 F1 그랑프리라는 핵심 이벤트라면 안전장치와 보험으로 겹겹이 보호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모터스포츠 이벤트에서 사람이 생명을 잃거나 다친 숫자는 드라이버보다 관중 쪽이 훨씬 많으므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죠. 물론 F1 팀에 속한 관계자들과 값비싼 장비를 보호하는 것도 포함한 얘기입니다.

    이런 갈등을 최대한 포장해서 그럴싸하게 포장해 얘기하자면, 서로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에서 빚어진 해프닝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얘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넘어서기 힘든 사차원의 벽이 양측 사이에 존재해 타협이 어렵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물론 앞서 전제한 대로 필자가 어느 한쪽이 좋고, 다른 한쪽은 영 글렀다고 딱 잘라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마음 쓰이는 쪽이 없다는 것은 또 아닙니다.

    F1을 좀 더 깊이 알아가다 보니 ‘데퓨티(deputy)’와 ‘리저브(reserve)’라는 단어를 자주 만나게 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데퓨티를 ‘부’나 ‘대리’, 리저브를 ‘예비’ 정도로 번역해버리면 의미가 많이 퇴색됩니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이야기를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짧은 단어로는 마땅한 번역이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F1 그랑프리를 위해 우리나라를 찾았던 많은 F1 팀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직함에는 유독 데퓨티나 리저브라는 딱지를 단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 깊은 얘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데퓨티니 리저브니 하는 말의 정확한 의미와 뉘앙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어디든 업무를 책임지는 담당자 외에 대리도 있기 마련이고, 비상 상황을 대비한 예비 인력을 둘 수도 있는데, F1에는 배보다 배꼽이 큰 것처럼 ‘대리와 예비 인력’이 너무 많았습니다.

    F1의 가장 화려한 장면 중 하나인 핏스탑만 봐도 실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 외에 옆에서 대기만 하는(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이들의 업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기준(?)으로 본다면 거의 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얘깁니다.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300명의 팀원을 200명으로 줄여도 충분하겠단 얘기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1년에 한 번 생길까 말까 한 비상 상황을 위해 남겨둔 인력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런데 어떤 일이든 문제는 꼭 생깁니다. 인력이 모자란 상황이 한 번쯤은 벌어지고, 문제의 순간을 위해 업무 능력을 갖추고 다른 업무에 휩쓸릴 일도 없는 ‘부책임자’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한순간의 문제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열 명이 할 일에 딱 열 명만 사람을 뽑으면 다행이고, 보통은 많아야 예닐곱 명을 뽑아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경우가 다반사인 우리나라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차량을 준비 중인 자우버 F1 팀의 팀원들]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차량을 준비 중인 자우버 F1 팀의 팀원들]

    전에 한 번 언급했던 F1의 야근 금지와 강제 여름 휴가 기간과도 관련이 있긴 하지만, 데퓨티와 리저브의 얘기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야근 금지나 여름 휴가의 강제 같은 경우는 제도가 없다면 모두가 쉬지 못하던 과거의 문제가 지금도 이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백업이든 대리든, 추가적인 인력을 준비하는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온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급도 제때 주기 힘들고 팀의 생존이 불투명한 팀까지도 이런 시스템만큼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잉여 인력이 너무 많은 F1은, ‘더 일을 잘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무리한 작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늘 얘기하지만, 노동자들이 예뻐 보여서 그렇다거나 무슨 숭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10의 작업이 있다면 15의 사람이 있어야 일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을 펼치기 위해 맡은 바 임무를 넘어서는 일을 맡기지도 않고, 충분한 수의 데퓨티 / 리저브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이 배치됩니다.

    필자의 짧은 경험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나라에선 이런 접근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벌어지지 않은 상황을 대비하는 것’은 사업주와 관리자에겐 고려 대상 밖의 얘기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파악되면 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문하고, 자주 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는 일까지 맡깁니다. 노동자들이 하는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업이, 사회가 돌아가는 대부분 영역이 그런 식입니다. 일정을 짤 때도 늘 ‘모든 것이 다 잘 진행될 경우’를 기준으로 일정을 짜고, 거기서 좀 더 시간을 줄입니다.

    남는 것, 잉여, 여유, 보험 등의 얘기는 배부른 소리라는 인식이 많습니다. 사회 전반의 인식이 그러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회사나 조직에서는 늘 모든 것을 빠듯하게 운영합니다. 여유가 없는 회사나 조직이라면 그렇게 빠듯한 운영을 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불가피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생각만 충분히 여유가 있을 법한 회사와 조직의 경우에도 상황이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어떻게든 여유가 없는 상황으로 만들고야 마는 경향도 한몫하겠죠.

    때로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조직 내부에서조차 노동자를 쉼 없이 다그치곤 합니다. 누구 하나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배적인 생각이 그렇습니다. 진보 정당이나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조직도 비슷한 인식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나 지배계급의 생각이 지배적인 생각이 되곤 하는데, 진보적이어야 할 조직, 혹은 개인들도 이런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사실 이런 얘기는 꼭 F1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야 할 문제 제기가 아니긴 합니다. 필자의 경우는 F1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F1에서 이런 인식, 시스템, 또는 문화의 차이를 절실히 느낀 것뿐이죠. 출발점이 어떻든 시간을 아끼고, 돈을 아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것뿐입니다. 늘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1초의 시간이라도 아끼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속도의 승부 F1에서 말입니다.

    아무리 돈밖에 모르는 스포츠라지만, F1에서도 시간과 돈을 아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아끼는 것’입니다. 사람을 아끼는 것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질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는, 우리의 노동 환경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물론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먼 얘기긴 합니다. 그러나 F1에서도 그렇다면, 우리 사회라고 바뀌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시작은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것부터입니다.

    필자소개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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