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되찾은
    우리의 민주주의인데...
    [다큐 사진] 《싸움》 : 피눈물로 기록한 반독재투쟁사
        2016년 02월 01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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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당한 사진집이다. 책 제목은 《싸움》인데, 지은이가 그냥 ‘민사연'(즉 민족사진연구회)이다. 자세히 보니, 사진 한 장 한 장에 크레딧이 없다. 누가 찍었는지를 왜 굳이 밝히지를 않을까?

    이 책은 당시 박용수의 아이들이라 불렸던 민족사진연구회(이하 민사연) 소속 박승화, 송혁, 이소혜, 임석현 네 사람이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찍은 사진으로 묶어 말하는 한국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사다. 그런데도 사진을 찍은 사람을 밝히지 않는다.

    사진 한 장 한 장의 주인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가 개인이 아니고 민사연의 이름으로 다 같이 참여한 동지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자발적으로 모든 사진의 주인을 이 역사를 만들어 온 민족‧민중이라는 주체에게 바친다는 의식일 것이다. 80-9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답다. 그리고 실제로 사진가들은 모든 원판 필름을 사단법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난, 책을 몇 번이고 넘겨보면서 사진을 본다.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이 북받치고 눈물이 터진다.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어떻게 되찾은 민주주의인데 … 피눈물로 읽는 반독재투쟁사.”

    난, 이 이름을 반납한 사진가들이 찍은 저 투쟁의 시기를 교수가 되어서 처음으로 목도했다. 난 대학 1학년 때 박정희의 ‘유고’를 겪었고, 2학년 때 80년 5월 광주를 겪었다. 광주는 내 고향이다. 그 후 교수가 되고 싶어 ‘역사’의 현장에서 스스로 도망치듯 빠져 인도로 갔다.

    내가 없는 사이, ‘조국’은 반독재 투쟁에 불이 붙었고, 그것이 정점을 지나갈 무렵 난 교수가 되어 이 땅에 돌아왔다. 저 장면들을 보기가 괴롭고 힘들었지만,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냉정하게 목도하면서 함께 하였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참여한 저 현장, 저 울분, 저 비통함을 사진가 네 사람은 필름으로 남겼다. 그리고선 우리 앞에 내놓았다. 1989년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박용수의 《민중의 길》을 이은 반독재투쟁의 역사를 담은 사진 기록이다. 《민중의 길》이 외신기자들이 찍은 사진들로 광주항쟁부터 시작한 후 85년 서울미문화원점거 농성 사진으로 이어지고 87년 민주화투쟁을 거쳐 1988년 전두환이 백담사로 쫓겨 가는 것까지 기록하였기 때문에 《싸움》은 1989년부터 이어 시작하였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갤러리나 전시장을 향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특별한 미학에 기초하거나 기호나 상징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현장을 기록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그것은 예술적 가치는 없다. 아니, 그렇게들 말하곤 한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예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진은 예술적이 되지 못한다는 세간의 평은 맞는 말이다. 또 사진이 갤러리나 미술관 혹은 2002년 아시안게임 때 비 맞은 김정일 ‘장군님 초상’ 사진과 같이 돈이나 정치로 만든 전시와 숭배의 아우라가 없다면 그것도 예술성은 없다. 그렇다.

    모든 예술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예술성이 있다고 하는 것의 상당 부분은 전시를 위한 것이고 – 사진은 원래 전시를 하지 않는 존재로 태어났다 – 그 전시를 위한 사진은 기록성과 별 관계를 갖지 않는다. 그런 사진은 사진이라고 하는 본질적으로 아우라가 없는 복제품을 아우라가 있게끔 만들고 나중에는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된다. 돈 숭배, 물신 숭배와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들이 오로지 갖는 것은 이런 일이 그 당시에 벌어졌다는 기록성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가 넷을 대표하여 쓴 박승화는 이렇게 말한다.

    “그 싸움이 이긴다는 확신으로, 승리의 그날 만들어질 보고서에 쓰이기를 기대하며 찍은 사진입니다. 편향된 관점으로 정치적 의도를 투사했으니 소위 ‘순수 다큐멘터리’ 사진은 아닙니다. 예술로 치장할 수도 없습니다. 기록과 기념, 선전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도저도 아닌지도 모릅니다. 기대하던 그날은 오지 않았고, 사진은 쓰임새를 잃어버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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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사연, 《싸움》 90-91쪽 (2015. 서울: 리슨투더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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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사연, 《싸움》 169쪽 (2015. 서울: 리슨투더시티)

    사진으로 하는 기록이나 글로 하는 기록이나 모두 역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보는 시각에 따라 백골단이 시민을 패거나 시민이 전경을 패거나 대학생과 백골단이 맞짱을 뜨는 현장을 기록한 것도 있고, 우리 동네 담배 가게 아가씨나, 사랑에 상처받은 창밖의 여자를 기록에 남길 수도 있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의 논리도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 국가와 사회 혹은 계급이나 민족이 개인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지 그렇지 아니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든 어느 한 쪽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든지 간에 분명히 받아들여야 할 사실 하나는 있다. 비록 국가나 민족 혹은 계급이 만들어진 것이거나 상상의 공동체거나 심하게 단일적으로 표상되면서 변질된 것일지라도 그것은 적어도 권위주의 정치 사회의 체제에서는 분명히 모든 시민의 개인적 삶과 문화를 옭아매고, 옥죄는 역할을 하였고, 그 힘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당시 그 시대에 몸을 바친 사람들이 이후 사회에서 성공을 하여 보상을 받거나, 변절하거나 ‘역사의 대의’를 – 이런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란이 일겠지만 – 벗어버렸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들이 일정 부분 비판을 받기는 해야 한다 할지라도 당시 그들의 피눈물로 얼룩진 싸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시민들의 삶, 그 ‘개인 일상의 문화’는 여전히 권위주의 체제 아래 놓여 있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가정법으로 하는 말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싸움》은 한국에서 1980년대가 199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를 사진으로 기록한 반독재투쟁사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의 독재 또한 반공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갑옷을 두르고 인민을 짓눌렀다.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소수의 종족과 종교 공동체가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압살 당했다. 변태적 국가주의는 70년대의 한국의 박정희, 북한의 김일성, 필리핀의 마르코스, 이란의 팔레비,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와 같은 독재자들을 낳았는데, 어느 경우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고, 미국은 민주주의를 지지하지 않고 반공을 내세운 독재를 지지하였다.

    미국은 양극 체제에서 소련과의 끝없는 경쟁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 사수를 절대 절명의 과제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학살 등이 자행되었고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이라크의 후세인,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파키스탄의 하크, 필리핀의 마르코스, 버마의 네윈 등 군부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을 후원하였다.

    그들에게는 반공 이데올로기만이 유일한 관심이었을 뿐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후 광주, 방콕, 자카르타, 마닐라 등에서 시민 의거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수없는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그 학살들이 미국과 연계되면서 아시아는 더욱 반미의 점화지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반공 독재 권력 지지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나라에서 독재자들이 하나씩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그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그 균열과 붕괴 속에서도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세우지 못했다. 수십 년 동안 세뇌당해 온 국가주의의 망령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싸움》이 기록하기 시작한 1989년부터 1993년 즉 포스트-1987년의 역사가 바로 이것이다. 그 때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학생, 도시 시민, 노동자 등이 대거 ‘싸움’의 현장으로 달려 나와 독재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권위주의 정권과 거대한 싸움을 벌일 때다. 거대악과 맞서기 위해 작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고,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은 물론 언론까지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빙벽과 같은 싸움판에서 그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았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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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사연, 《싸움》 82쪽 (2015. 서울: 리슨투더시티)

    사진은 카메라라는 기계가 찍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물인 사진은 비록 재현의 영역에 속하긴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분명히 사실에 대한 명징한 기록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당시부터 이미 사업주들은 위장 폐업을 하였고, 인민들은 그에 대해 물리적으로 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아직도 전혀 변하지 않았고 그 시간의 사이에 인민들의 피폐함만 더욱 눈덩이 불 듯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어처구니없이 조계사가 되었고, 그곳은 쫓기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둥지가 전혀 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의 명동성당이 그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을 맞서 힘없는 약자들을 보호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태우 정권을 처단하자, 고 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내를 활보할 때 뭇 시민들이 박수로 환호하였음을 보여주기도 하고, 정권은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게 그 때도 ‘불온 선전물을 습득 신고하라’며 선전을 통한 정권 보위에 안간힘을 썼음을 잘 알 수 있기도 하다.

    경찰들은 대학을 점거하여 불법 검문을 통해 출입을 통제하였고, 여대생은 어쩔 수 없이 신분증을 내보일 수밖에 없는 풍경도 보인다. 저 젊은 경찰과 여대생은 지금 어디서 뭘 할까? 시대의 아픔 속에서 서 있는 곳이 달라짐으로써 보이는 풍경이 달라 보이지만, 저 둘 모두 그 역사를 헤치고 나온 우리 모두의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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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사연, 《싸움》 105쪽 (2015. 서울: 리슨투더시티)

    사진은 전형적 의미의 사료가 되지는 못하지만, 역사를 해석할 때 번뜩이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진은 말을 하지 않고, 사진가는 자기의 뜻과 감정에 따라 사진을 찍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주장하기는 어렵겠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색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난, 이 책의 후반부, 90년 이후의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경찰들의 폭력이 잦아지고, 대학생들의 화염병이 잦아지는구나, 도로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뒤덮이는 전쟁터가 되는구나. 칼춤을 추는 공권력, 황폐화 된 도로, 지쳐가는 대학생과 고개 숙인 노동자와 전교조. 점차 화면에 보이지 않는 시민들 …

    사진집 《싸움》을 난, 쌔드-엔딩으로 읽었다. 그것은 역사라는 것 자체가 단기적으로는 쌔드-엔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해피-엔딩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쌔드-엔딩을 향해 가는 것만은 아니다.

    민사연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네 명의 사진가들이 남긴 이런 기록들, 크레딧도 없고, 권력도 추구하지 않으며, 다 같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사진가들이 남긴 이런 기록들이 있는 세상이 결국 쌔드-엔딩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사진집 《싸움》이 있어서, 사진집 《싸움》을 기록한 그 사진가들이 있어서,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역사가 쉬지 않고 흐르고, 한국 민중의 역사가 또 새롭게 흐른다. 피눈물로 기록한 반독재투쟁사 《싸움》에 사진으로 하는 기록에 대한 모든 찬사를 다 바쳐도 부족하지 않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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