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론주의의 다양한 맥락
    [기고] 장막 뒤의 과두적 지배세력
        2016년 01월 21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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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 이래, 유럽의 근대 인식론 체계는 ‘이성’중심이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성, 무지, 상상, 열정 등 다양한 변수가 인간 행동에 영향을 끼침을 주장했다. 현대(근대) 정치학,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만하다.

    정치 지도자를 대중이 지지하는 것도 ‘이성’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적 지지 즉, 스피노자가 언급한 ‘정동’(afecto)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와 문화를 체험한 사람들은 사회관계에서 정동이 라틴아메리카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함을 이해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정치권력이 지난해 말에 페론이즘 좌파 세력인 크리스티나 키치네르에서 자유주의 우파인 마우리시오 마크리로 넘어갔다. 대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경제 정책에서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급격하게 바꾸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경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2015년 GDP 성장률은 약 1% 성장했는데 올해 2016년에는 약 0.5%의 감소가 예상된다. 그리고 인플레율은 작년에 29%에서 올해 약 38%로 예상된다. 간단히 말해 올해도 아르헨티나 경제는 과도기로서 매우 어려울 것이다. 페소화의 평가절하는 농업과 육류의 수출에 유리하고 외환 통제정책의 철폐와 규제완화로 인해 외국인 투자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동안 키치네리즘은 다수 대중의 소비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면 현재의 자유주의 정부는 투자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칠 것이다. 인플레로 인한 봉급생활자의 실질소득 감소로 인한 구매력 축소에 덧붙여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경쟁력 강화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광범한 노동세력과의 ‘사회적 협약’ 체결이 불가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집권세력이 페론이즘을 거부하는 정치세력이지만 노동 대중과의 원만한 사회적 협약의 체결과 내실 있는 사회정책의 집행은 정권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빈부격차를 그대로 놓아둔 채로 자선적인 시혜적 사회정책의 집행은 아르헨티나에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이즘은 하나의 상수로서 고려해야 할 필수이기 때문이다.

    페론이즘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에는 급진적 좌파정당도 없고 우파 보수주의 정당도 없다. 물론 예외적으로 70년대 후반에 극우 군부독재가 있었지만 그 후 다시 군부의 집권은 없고 페론이즘과 중도 자유주의 양대 세력의 경쟁이 아르헨티나 정치 지형의 일반적 모습이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페론이즘의 집권으로 생긴 정치 지도자와 대중 사이의 감성적 연대의 고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르헨티나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페론

    병중의 에바 페론과 후앙 페론

    페론은 1943년부터 1955년까지 집권했다. 페론은 봉건적이고 부패한 과두계급에 대해 강한 혐오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대해서도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19세기 이후 도밍고 사르미엔토의 [Facundo]라는 에세이에서 밝혔듯이 유럽 문화를 ‘문명’의 기준으로 삼고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문화를 ‘야만’으로 여겼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시인 등 엘리트 지식인들이 아르헨티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가우초’(시골 목부)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을 무시하고 있었다. 가우초의 이미지를 높이 하면서 상대적으로 미국문화를 ‘그링고’라는 호칭에서 드러나듯이 낮춰보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높은 위치에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하는 유럽문화를 놓고 있었다. 1930년대 내내 국가는 노조를 억압하고 탄압했다. 그리하여 국가와 노조 사이에는 비공식 관계밖에 없었다. 당연히 노동자의 사회적 요구는 억압당했다.

    페론이 1943년에 노동부 장관이 되면서 노동자의 사회적 요구를 받아들여 아르헨티나에서 최초로 사회정책이 집행되기 시작했다. 그 후 아르헨티나의 강한 사회정책의 추구는 항시적이어서 최근 크리스티나 키치네르 정부에 이르기까지 어떤 때는 정치적 지지의 고리 또 어떤 때는 정치적 실패의 족쇄가 되기도 한다.

    페론은 1944년에 “과거의 대중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은 자살적이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정치 전통은 이해할 수 없는 대중에 대한 정부의 무대책이었다. 사회관계의 무질서의 유지가 초래하는 사회악들을 예방해야 하고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 것을 반드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페론은 전임 정부들이 노동자에 대해 무관심한 결과, “사회적 투쟁”, “반란의 정서 유포”,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노동운동”이 나타났다고 비판했다. 특히 “정치인들이 노동운동에 개입하여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선거가 있기 직전에 교묘한 선거약속을 남발하는 잘못을 없애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정치인을 마치 봉건시대의 주인처럼 섬기게 하는 관행을 뿌리 뽑겠다”(Svampa, 2006: 287)고 했다.

    또 한 가지 페론의 정치 연설 또는 담론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페론이즘이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이 있는 사르미엔토의 이분법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마리스텔라 스밤파에 의하면, “페론이즘은 사르미엔토의 오래된 이미지를 재현하여 대중의 정치적 관심의 무대 위에 올렸다. 대중을 야만으로 즉, 문화에 거리가 먼 이미지를 가지는 전통 담론을 공격하면서 대중의 호감 위에 자신의 정치 담론을 전개했다”(Svampa, 2006: 269).

    페론의 정치 연설의 전략은 야만적 이미지의 무정형의 흩어진 대중을 지도자와 긴밀하게 연결시켜 그 힘이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민중 혹은 대중’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과거의 엘리트주의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전통 담론을 새로운 맥락 안에 놓은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페론의 정치적 행보가 ‘신발 없고 셔츠 없는 시골 출신 대중’을 포용하는 것이었다.

    페론은 젊은 시절, 장교가 되기 위한 군사학교 시절부터 ‘신발도 없는 무식한 대중’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들 하층계급과 군부의 연대에 대해 1943년 전부터 이미 생각하기 시작했다(Crassweller, 1988:114)고 한다. 단지 연설의 스타일이나 대중에게 가까이 가려는 선거 전략이 아니라 페론의 정치적 신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를 통해 대중에게 아르헨티나의 정치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었다.

    페론이즘의 대중과의 친화적 교감에서 중요한 사람이 에비타이다. 1946년에 페론주의 정부는 가톨릭교회를 통해 상류층 여성들이 자선을 베푸는 방식의 ‘자선단체’ 활동을 종식시켰다. 페론이즘에 반대하는 세력은 이 조치가 에비타의 자선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비난한다.

    에비타의 대중과의 교감에서 중요한 모티브는 역설적으로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죽음으로써 대중에게 그녀는 마치 가톨릭교회의 신자들로부터 숭배 받는 ‘복자’(Zanatta, 2011: 336)의 신화적 위치에 오르게 된다.

    에비타는 생전에 너무 많은 대중의 사랑 또는 숭배(?)를 받아 그 권력이 지나치게 높아져 오히려 페론주의에 짐이 되었다는 비판이다. 예를 들어, 매주 에비타를 좋아하는 시인들이 모여 그녀에게 바치는 시를 썼다고 한다. 그 권력이 작동하는 기관이 1948년에 설립된 [에바 페론 재단]이었다. 이 재단은 전국의 모든 간호원 들을 동원하여 간호학교를 세우는 일을 추진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에비타에 대한 평가는 그녀 때문에 페론주의자와 반페론주의자 사이의 간격의 골을 더 깊게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에비타는 세브렐리에 의하면, 페론주의의 전근대적, 비합리적, 봉건적, (귀족에 상응하는) 평민적 측면을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한다(Svampa, 2006: 306). 가난한 사람들이 무조건 지도자를 따르면 이익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페론의 시각과 다르다. 페론이 무정형의 대중을 집단적 정체성의 ‘민중 또는 대중’으로 만들어 기득권계급과 대치시키려는 전략과 거리가 먼 것이다.

    에비타의 대중에 대한 연설 화법도 독특하다. 그녀는 페론보다 더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표현을 거칠게 함으로써 대중의 이해는 도왔을 수 있지만 기득권 계급 외에 지식인들에 대한 지나친 혐오는 아르헨티나 정치를 왜곡시켰을 수 있다. 왜냐하면 본의와 달리, 에비타의 이런 지나친 대중 선동적 정치 개입 때문에 19세기부터의 엘리트들의 문명/야만의 이분법이 오히려 강화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중을 위한다고 하지만 대중이란 개념 자체가 애매하고 계급 모순적이고 맥락에 따라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에비타의 정치 방식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페론은 어느 정도 대중과 거리감을 두었다고 한다.

    에비타는 “나를 여느 평민(대중)의 여인으로 보아 달라. 대중이 느끼는 모든 것을 말하려고 애를 쓰고 페론 장군을 해석하는데도 애를 쓸 것이다”(Svampa, 2006: 307). 에비타는 하느님과 가톨릭 신자 사이의 중재자인 성모 마리아를 닮으려던 것 같다. 페론주의가 아르헨티나 정치에서 수 십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변주되며 정치적 지지를 잃지 않는 것은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지치고 힘든 문제를 영웅이 나타나 한 방에 해결하기 바라는 일종의 ‘메시아’ 기대 심리 때문일 것이다.

    지루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러 사회세력의 합의와 토론을 거치는 자유민주주의적 방식이 아닌, 대중 집단의 지지를 업고 독단적 결정을 내리는 독재 정치를 지식인들은 포퓰리즘으로 혐오하기 쉽다. 이런 자유주의적 심리를 대표하는 아르헨티나의 지식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다.

    보르헤스는 “매 100년이 될 때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지방으로부터 온 독재자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를 구하러 와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서 해석하면 아르헨티나 정치에는 무대 뒤에 숨어있는 제3의 사회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수의 대지주 등 과두 지배계급 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들이 또한 다국적 금융기업과 손을 잡은 독점적 금융지배세력으로 변신했지만 이들 과두 지배세력이 사실은 제일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들인데 이들은 페론이즘과 자유주의 세력이 헤게모니 쟁투를 벌이는 무대 뒤에서 자신들의 이익은 침해받지 않는 독점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마치 미국의 경우, 군산복합체를 연상시킨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아르헨티나 사회의 핵심적인 정치, 경제적 구조는 변혁되지 않고 양 대 정치세력의 싸움은 마치 시계추같이 주기적으로 그 승패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필자소개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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