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 '단독정부'로의 대단원
    [정지된 역사] '테러의 해방 국면' 된 해방 후 현실
        2016년 01월 18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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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후 한국에서의 테러리즘’ 링크

    “또 다른 안전가옥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이 집을 고위급 죄수를 위한 집으로 개조하기 위해 검토했는데, 고위급 죄수란 다름 아닌 김구였다. 이 집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고, 그곳을 지키기 위해 병력도 배치했다. 이것은 내가 막 한국을 떠날 무렵의 이야기다. 한데 김구를 체포하는 대신에 그들은 김구를 다른 사건 관련 증인으로 소환키로 했고, 김구를 그곳에 감금하지는 않았다.”

    – 스미스(Samuel A. Smith) 대령 인터뷰, 1950년 8월 14일

    고1

    (사진설명) “예전에 서울 남산 신사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스키활강장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서울, 한국. 1948년 1월 26일” (출처 : NARA). 일제 때 서울의 조선 신궁, 그러니까 일본의 신화에 등장하는 일본개국의 영웅들을 모신 사당이 있던 자리가, 어느 틈에 스키공원으로 바뀌었다. 1948년 1월은 혼돈의 시기였다.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내방하고, 단정이냐 통합선거냐를 두고 각 정파들이 매일 같이 경쟁적으로 신문을 장식하던 시점이었다. 정식정부를 둘러싼 마지막 줄다리기가 한참인 시기였지만, 서울의 일반 시민들에게는 즐거운 한때도 있었던 모양이다. “25년만의 대설이 경향각처에 내렸지만, 오히려 식물의 뿌리깊이 동결함을 방지함으로 유익하다고 이훈구 농무부장이 발표”하기도 했는데, 눈이 오면 교통이 막히는 것은 이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설로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1월 23일 날 내린 눈이 “한 자” 그러니까 약 30센티 정도 되는 적설량이어서 당시 일반 서울시민의 발 역할을 했던 열차도 모두 중단되었다. 운수부가 1천명의 직원을 동원해서 눈을 부리나케 치웠지만 이렇게 쌓인 눈은 사흘간 서울시를 마비시키기도 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날도 추워져서 걷기도 힘들었을 테지만 그 덕에 집회도 열리지 않았겠지? 뭐 하루쯤 쉬는 날도 있어야지. 한데 해방 뒤에 내린 이런 겨울의 한가한 모습은 식민지 시기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사진이기도 하다. 이 스키장이 된 곳이 식민지시기 근엄과 엄숙의 상징이었던 조선신사로 가는 ‘348개의 계단’이 있던 자리였다. 해방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공격을 받았던 곳 가운데 하나가 신사와 같은 일본의 상징적 기념물들이었는데, 한 단체는 국치일을 기념하여 “왜취왜색을 소탕”하자며 “일본의 신사 등도 일절 철폐하자”고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마~ 겨울이어서 한 장 넣어봤다.

    지난 김수임 사건 당시로 되돌아 가보자. 김수임이 체포되어 당시 미군정 CID나 헌병 관련자들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재미있는 기록이 한 가지 나왔다. 안가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안가는 우리도 오늘날 겪어봐서 잘 안다. ‘술이나 마시는 자리 아닌가? 그 뭐 씨바스리갈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겠지만, 그건 박통 시대 때나 그랬던 것이다.

    가끔 고문을 위해 필요한 장소로 대용되기도 했지만, 해방 직후 미군의 안가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런 것이다. 즉, 수사와 관련된 기관들이 정보원들과의 접촉을 위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고, 또 정보원이 누구와 만나는지도 잘 드러나지 않는 그런 비밀스러운 집, 그것이 안가였다.

    “한국의 정보원들이 보고서를 쓰거나 모임을 하는 곳”이라고도 했고. 이 안가는 알파벳 기호를 부여하면서, 예를 들어 헌병대가 보유하는 안가는 ‘DH-12’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당시 베어드의 헌병사령부가 보유하던 안가들은 적어도 세 채는 운영되었던 모양이다. 헌병대뿐 아니라 CIC와 경찰 그리고 24군단의 G-2에서도 한국인 정보원들과 만나기 위한 장소로 안가를 운영했다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아무튼 이 안가를 설명하면서 이 가옥들 중 한 채가 눈에 쏙 들어온다. 바로 김구를 감금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하고자 했던 집이었다.

    사진2

    (사진설명) 김영삼이 가택연금을 당하던 무렵의 사진이다. 왼쪽의 사진은 연도가 불명이고 오른쪽은 1981년도의 사진이다. 구글에서 찾은 것이다. 1947년 말쯤 미군 헌병대는 안전가옥 한 채를 이렇게 활용하려고 했다. 안가(safe house)는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정보원인지 누구인지 모르도록 비밀리에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위의 사진처럼 전경들이 줄을 서서 지키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원래 안가는 이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불법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법원의 선고가 없이 그리고 형무소라는 국가기관이 아닌 곳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법원의 선고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검사의 구속이 결정되어야만 가능한데, 이 경우에도 역시 법원의 기소장이 있어야 하며, 검사의 구속이 있기 전인 경찰 수사과정에서는 길어야 “사흘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조항은 미군이 선거를 앞두고 민주화 조치의 하나라면서 경찰에 관련 내용을 문건으로 전달한 바가 있긴 했다. 어쨌건 1947년 말 경에 미군이 한국인을 불법적으로 구금시키려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차마 하지는 못했지만. 어쨌건 헌병에서는 안가 중 하나를 일종의 감옥으로 변형시켰는데, 감시실도 만들고 헌병들을 배치하기도 했다.

    위 인용문의 새뮤얼 스미스 대령은 쉬크 준장과 그 뒤를 이은 베어드의 보좌관 역할을 하던 24군단 고위 장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측근 중에 최측근이라는 뜻이다. 그가 김구를 “고위급 죄수(high ranking prisoner)”라는 표현을 쓰면서 체포를 위한 준비과정에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기억할 만하다. 하나는 “다른 사건 관련 증인으로 소환(in some other cases)”키로 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이승만이 이 집을 기증했다는 점이다. 인터뷰에 나온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은 바로 ‘마포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이곳은 원래 조선총독부 관리가 사용하던 집을 미군이 인수했던 집이었다. 이승만이 잠시 이 집을 사용했는데, 두 달 정도 살다가 이 집을 다시 군정에 돌려보낸 것이다.

    이승만이 이 집을 돌려보낸 시점은 1947년 10월 초였다. 원래 프란체스카가 추운 것을 워낙 싫어하고 또 마포장 역시 한강변이어서 겨울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 집에 대한 미군들의 인상은 아주~ 괜찮은 집이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설마 이승만이 김구를 집어넣으라고 마포장을 반납한 것은 아닌지 한동안 의심했었다. 아직은 의심 단계다.

    마포장이 이승만의 표현처럼 “보일러를 설치하고도 너무 추운” 주택이었다는 것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10월 초에 집을 옮겨야 할 만한 이유가 많지는 않았다. 마포장으로 이사오기 전 1년 반을 돈암장에서 묶었고, 마포장에서 이사 나간 이화장에선 늙어 죽을 때까지, 아니 한국에서 쫓겨나가는 1960년까지 거주했으니, 짧은 두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머물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이사를 했다는 것은 저의기 의심스럽다. 뭐 아직까지는 의심하는 정도로 남겨둬야지.

    아무튼 마포장을 인수하여 수리를 거친 후 미군 CID가 안전가옥으로 보유한 것은 1947년 10월 말경이지만, 이 집에 김구라는 인물을 감금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1945년 2월 24군단 참모회의였다. 앞선 스미스 대령의 뒤를 이어서 헌병감실 책임장교로 부임한 월러스 중령(Victor M. Wallance)의 말이다.

    고3

    (사진설명) “32살의 한국 노동자 이봉창(Ri Hosho)이 수류탄을 키토쿠로 이키(Kitokuro Ikki) 장관이 탄 마차에 집어던졌다. 이키 장관은 요요기 운동장에서 새해 행사로 벌어진 군사퍼레이드를 시찰한 이후 돌아가던 천황의 마차를 이끌고 있었다. 사건은 1월 8일 오전 11시 48분에 동경 수도경찰청 건너편에서 발생했다. 사진에서는 동경 수도경찰청 직원들이 폭파가 일어난 장소를 수사하고 있다.” (출처 : NARA) 이 사진은 당시 뉴욕타임즈가 수집한 것이지만 일본의 전보통신사 사진부가 저작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용에 유의하시길!) 이봉창은 윤봉길과 함께 김구의 대표적인 항일사례를 점찍은 인물이다. 미군들은 항상 “윤봉길과 이봉창의 계획을 직접 세운” 인물이었다고 김구의 이력에 적어 넣었다. 이 두 건의 항일의거가 김구를 일약 임시정부의 스타로 만들었단 것이다. 1940년대 미군들은, OSS를 비롯해서 중국전구의 G-2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국 관련 정보를 캐내는 데에 바빴는데, 한결같이 ‘임시정부가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는가?’, ‘임정에 대해 아는 한국인들은 국내에는 어느 정도 되는가?’ 등과 관련한 문건들을 만들기 바빴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지도자급 되는 인물들에 대한 신상조사도 빠쁘게 써내려갔는데,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대부분 임정 요인들의 고향과 학력을 길~게 써놨지만 정작 김구에 대해서는 “no record”라고 아예 빼버렸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부분 와세다 대학, 하버드 대학 등 세계 유수의 대학들을 졸업한 석학(?)들이었지만, 유독 김구만이 눈에 띈다. 비록 임시정부이지만 지도자급 인물들 속에서 김구는 단연 빛나는 인사였다. 학벌 하나만으로 말이지.

    “베어드 24군단 참모회의에서 돌아온 뒤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저명한 인사를 안치시키기에 적합한 좋은 집을 구했다고. 그 한국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김구라고 말했다. 김구라고. 김구를 잡아와야 할지 말지를 둘러싸고 그 뒤로 몇 차례 논쟁이 있었다. 베어드는 하지가 최종적으로 김구를 잡아들이기로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구가 그때 약간의 말썽을 일으키고 있던 때였고, 김구를 보호하여 그를 외부의 지지자들과 연락하지 못하도록 차단시킬 수 있는 집이 그들에게 필요했다. 그래서 베어드는 집을 구하는 중에 있었고, 나에게 그 집을 보러가자고 말했다. 그때 베어드가 마음에 두고 있던 집을 두세 군데 돌아다니며 보러 다녔다. 나는 이것을 매우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집은 한강다리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위치해 있었다. 한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향해 아래쪽으로 가파르게 향해 있던 절벽의 위에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그 집 주변의 세 방향으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언덕 위의 하얀집이었다. 그 집으로 들어갔다. 6, 7개 정도의 방이 있었다. 집 뒤편으로 창고가 있었고, 정문 입구 쪽에는 경비초소가 위치해 있었다. 베어드는 그 집이면 충분히 경비할 수 있고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그 집을 얻기 위해서 어떤 절차를 밟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집이 헌병감실의 관리 하에 있다는 것만 알았다. 베어드는 그 집에 두 명의 CID 요원을 배치하여 거주하도록 지시했다.”

    – 월러스(Victor M. Wallance) 중령 인터뷰, 1950년 8월 28일

    베어드는 이보다 앞선 1947년 12월 2일 암살 직후 수사과정에서 이미 김구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암살범으로 체포된 용의자들이 한결같이 김구가 장덕수를 “죽일 놈들”, “장해물들”, “나쁜 놈들” 그리고 “제거”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택상은 즉각 용의자의 자백을 군정당국에 통보했다. 김구가 “암살 교사자(instigator of assassination)”라는 것이다. 하지는 순서대로 본국에 있는 합참위원회(JCS)에 보고했다. 최고책임자인 하지는 “김구를 미국 법원에 살인죄로 세울 것”이라며, 3년간을 노려온 이 먹음직한 메인디쉬를 보고 흥분하며 전했다. 장덕수가 암살된 지 11일 만이었다.

    하지는 첨부터 김구가 별로 맘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야 칼을 꺼내들 때가 온 것이다. 이 사람이 2차 대전이 종전된 지가 언젠데 “미군이건 일본군이거 장군들을 살해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란 말을 꺼내놓고 하고 다닌다. 이미 종료된 미소공위지만 평양에 가 있는 브라운 소장도 암살 명단에 끼어있었다. 하지의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순간이랄까.

    한때 하지와 김구는 살벌한 일합 싸움을 나눈 적도 있었다. 1946년 반탁시위가 한창일 때에 하지는 김구를 불러다 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만 더 까불면 죽여버린다”라고. 겉으로 점잖게 다니지만 결국 김구는 테러리스트고 데모나 일삼는 자일 뿐이다. 김구가 한국에 귀환한 지 한 달이 겨우 지났을 때이지만, 그의 위대함은 이럴 때 발휘된다. “한번만 더 나를 협박하면 내가 니 권총으로 자살할 것”이라고. 이 위대한 일합 싸움을 우리는 겨우 영어로 번역된 글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사진이라도 한방 좀 박아 놓지. . . 쩝.

    아무튼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김구가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그를 구속시킬지 아니면 감금시킬지의 문제는 여전히 골치가 아팠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사건 관련 증인으로 소환하기로 결정”했다는 증언을 잘 기억해야 한다.

    이미 김구는 장덕수가 암살당하기 전부터, 뭔가 냄새가 나는, 냄새 중에서도 피냄새가 나는 사건들과 관련이 있었다. 혹시 “구속”시키려다가 그냥 장덕수 암살사건 관련 증언으로 소환하는 데에 그친 것은 아닐까? 지난 회에 보았던 암살관련 정보들 속에서 김구가 관련이 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브라운 장군의 암살 관련 사건도 그렇고, 살인을 저지른 서북청년단의 수사과정에서도 김구가 관련된 것도 여럿 있었다. 특히 장덕수의 암살로 하지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하지는 12월 15일에 다시 국무부로 전문을 보내서 이번에야 말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흥분했다.

    “7명의 공범들을 모두 며칠 전에 한국 경찰이 미국 관계 당국으로 넘겼다. 관련자들은 현재 육군이 감금시켜놓고 있다. 경찰이 확보한 자백에 따르면 김구가 개인적으로 장덕수를 죽이라고 암살을 명령했다고 한다. 한국경찰이 확보한 자백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하지 장군은 CID와 CIC의 조사관을 투입하여 사건과 관련된 사실들을 미국 법원의 절차에 맞도록 조사하도록 조치했으며, 만약 김구를 포함하여 유죄임이 증명된다면 사형을 비롯하여 관련자 모두에게 중형을 내릴 것을 준비하고 있다.”

    – 하지가 국무부에 보내는 전문에서, 1947년 12월 15일

    하지는 김구가 “정치적인 암살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서 신물을 내고 있었다. 실제 김구가 앞선 두 건의 암살과 여러 건의 암살모의에서 관련이 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도 않은데, 이미 “30, 40명을 암살”한 주범으로 보이도록 했다. 한때 궁지에 몰렸던 임시정부가 윤봉길의 테러 한방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을 상기한다면, 하지의 이런 생각이 무리가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되었건 김구는 이제 장덕수 암살 관련 증언을 해야만 했다.

    고4

    (사진설명) “서울, 1948년 3월 15일. 극우지도자인 김구가 장덕수 암살을 모의한 10명의 지도자로 알려져있는 김석황(서있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10명의 피고들은 모두 증언을 했는데, 증언에는 김구가 현재 재판 중에 잇는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김구는 계속해서 어떤 피고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계속 부정하고 있다. 김구와 피고 사이에 서 있는 미국인은 검사인 러만(Milton Lerman) 대위이다. 피고의 변호인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은 빌스(H.H. Beales) 대위 한국인 변호사 김용식, 로저스(Joseph J. Rogers) 대위, Mr. SUK 한국인 변호사.” (출처 : NARA) 김석황이 일어나서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흥미로운 것은 김구가 피고인들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다고 시인을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김석황을 모르고 있다는 증언은 잘못된 설명으로 보인다. 이미 김구와 안면을 튼 지 30년이 넘은 사람도 있는데 모른다고 했을 리가 . . . 한국인 법률가들과 미군 법무장교들이 피고측의 변호인을 맡았는데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서 왼팔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사람이 김용식이다. 김용식은 외교관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제시대 사법고시를 패쓰한 법률가이기도 했다. 근데 미국 법정에서 김구처럼 저렇게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 있으면 재판관님한테 혼날 것 같은데 . . .

    고5

    (사진설명) “1948년 3월 15일. 군사위원회에서 한국의 장덕수를 암살한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위원회 재판관들은 : 미군정청의 카스틸 대령(J.A. Casteel), 감사과의 프라이스 대령(T.E. Price), NFA의 헤론 대령(GJF Heron), 법무감 킹 중령(J.P. King), 상무부의 햄린 대령(W.D. Hamlin)” 미군이 군사위원회를 처음부터 동원하고자 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미 한국인 관련 사건들은 대부분 한국법원에서 처리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1947년 4월 17일 명령을 통한 것이었다. “미군이 관련이 없는 사건들은 모두 한인 재판소에서 재판”하겠다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한데 장덕수 재판과 같은 사건은 한인들에 맡길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김두한 사건과 같은 경우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김두한을 비롯한 대한민청 관련자들이 좌익원을 납치 사망하게 만든 사건에 대해 법원은 최고 7년형에 김두한은 2만원의 벌금만 부과하고 석방해버린 것이다. 사건 발생부터 CIC 요원과 CID 특별수사관을 동원하여 따로 수사도 진행했고, 미군 검사 측에서 기소하도록 미리 사건 수사를 도맡았던 것이다. 당시 한국법원에서는 암살범과 관련하여 양형을 아주 낮게 처리했다. 예컨대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의 경우 무기수로 1심 재판을 받았지만, 그는 대법원 재판에서 15년형으로 최종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15년은 커녕 5년도 채우지 못하고 한국전쟁당시 무렵 이미 교도소에서 나온 상태였고, 이후 일본으로 피신을 가게 된다. 김구의 암살범인 안두희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튼 암살범 혹은 테러범에 대한 온정주의(?)로 인해 당시 미국은 군사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직접 심판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군정시기 법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은 대부분 대구인민항쟁 사건이었다. 당시 대구 10월 폭동 사건은 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포고 제2호 위반혐의로 사형언도를 내렸지만, 실제 사형에 맡긴 사람은 없었다. 아무튼 군사위원회가 열린다는 것은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런 군사위원회에 나와서 말이지. . . 어딜 다리를 꼬고 앉아있냐고??

    장덕수 암살과 관련한 경찰의 활약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박광옥이 암살범으로 수배된 것은 사고 발생한 지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아침이었다. 종로경찰서에서 비상소집으로 경찰을 모두 소집했는데, 박광옥이란 사람이 행불 상태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장덕수 암살 관련 수사 내용을 보면 “이웃의 증언으로는 지난 이틀간 수상한 사람들이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자들의 인상착의는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데 이웃의 말에 따르면 “장덕수 자택의 담장에는 며칠전에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는데, ‘장덕수를 처단하라(exterminate)’는 표식이었다”고. 부인의 말에 따르면 총을 쏜 사람이 경찰이라는 점을 간파한 장택상이 “비상령을 내리고 비상소집을 실시했는데, 종로경찰서 소속 박광옥이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신속 정확한 경찰의 조치에 박수를 칠 만하다. 이게 불과 반나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박광옥이 체포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48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순식간에 7명, 총을 제공하고 범인을 은닉했던 일당 7명이 모조리 체포되었다. 불과 10일도 되지 않은 날이었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이들에게 장덕수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중간보스, 그러니까 대장과 하수인을 연결시키는 중간고리인 김석황이 아직 잡히지 않고 있었다. 김석황에 대해서는 몇 차례 등장한 바 있다. 일찍이 김구와 안면(?)을 튼 김석황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일제시기에는 독립운동을 열렬히 주도했다. 옥고도 치르고, 독립군자금도 모으면서 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에서는 손꼽을 정도로 투쟁 경력이 있는 양반이다. 한데 이 사람은 가끔 엉뚱한 짓도 하고 다녔다.

    임정 요인들이 해방 후 국내로 귀환할 적에 이승만과는 달리 자금동원이 만만치 않았다. 한데 김석황이 자금을 모으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던 사람이었나 보다. 박흥식을 어디선가 수배해 와서 독립자금으로 쓰시라면서 돈을 내놓았다. 물론 김구가 박흥식 뺨만 안 때렸지 있는 욕 없는 욕 다하면서 내쫓겨났다는 것이 비서의 증언이다. 김석황은 돈을 모으고, 암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머리’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람이었다.

    어쨌건 김석황은 이듬해인 1948년 1월 15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람은 임시정부 쿠데타와도 관련이 있었고, 장덕수 외에 암살 후보자들을 수첩에 길게 써놓고 다닐 정도로 의혹이 가던 인물이었다. 한데 김석황이 체포되면서 김구가 장덕수 암살을 지시한 최종 인물이라는, 미군정의 그림이 완성된 것이다. 조병옥이 말한 바 “제1계단이 미체포 중에 있으므로 그 전모를 아직 발표치 못하고 있다”라고 한 것은 김석황을 체포해야만 공개발표를 하겠다는 말이다. 이는 조병옥의 의견이 아니고 미군정의 입장이었다.

    법정에서 김구는 말 그대로 모독을 당했다. 나중에 평양 연석회의에 참가했을 때 “정말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만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할 정도로 모욕감을 느꼈다. 지난 몇 달간 한민당이 암살사건 관련 문건을 발표하고 성명을 내놓으면서 김구를 압박할 때도 참았는데, 결국 재판까지 나서야 하다니. . . ‘내 그냥 평양으로 가련다’라고 마음먹은 것이 이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6

    (사진설명) “한국임시정부 주석인 김구씨가 하지 장군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서울, 한국. 1945년 11월 24일.” (출처 : NARA) 김구는 이날 하지를 처음 만났다. 당시 하지는 맥클로이에게 보내는 문건에서 “김구를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는데 겉으로는, 반복하지만 겉으로는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쓰기도 했다. ‘일마는 살인자야 살인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승만의 표정도 밝고 김구의 표정도 밝다. 김구는 입국 직후부터 국내의 각종 테러와 관련을 맺고 있는지 의심받았다. “김구의 특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회원들에게 보내진 죽음의 위협에 책임이 있는가?” 라든지, “이 편지를 발행하지 않으면 당신 또한 사형에 처한다”라며 신문사에 전달된 협박편지를 작성한 사람들도 “보고된 언론탄압과 관련한 자들에 대해서이 이 위원회와 관련은 있는가?”라고 김구와 관련이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 임정요인이 귀환한 직후인 12월 정보보고에서부터 등장한 ‘김구=테러리스트’란 미군정의 의심은 장덕수 암살 시점에 이르면 아예 살인자 취급을 한다. 하지는 1947년 9월 8일 합참으로 보내는 전문에서 “김구와 이승만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승만은 김구의 지지자들 손에 암살당할까 우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만약 미국이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한다면 “자신과 이승만 사이에 균열만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한다고 우려했다. 참으로 ‘고양이 생각해주는 쥐같은 놈이네’라고 생각하면서.

    1945년 11월 23일, 세 시간 남짓의 시간만 투자하면 건너올 상해-서울의 거리를 오는데 무려 석 달하고도 열흘이 걸렸다. 그보다 열 곱절은 걸릴 시간인데도 이승만이 한 달 먼저 남한에 귀국한 것과 비교하면 꽤 긴 시차가 난다. “군정이 실시되고 있으니 대외적으로는 개인자격이지만, 우리 한국사람 입장으로는 임시정부가 환국”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임시정부 깃발을 내걸까 장롱에 처박아 둘까를 두고 고민하던 김구는 1차 시도(1946년 1월 ‘반탁 쿠데타’)와 2차 시도(47년 3월 ‘임정 쿠데타’) 모두 실패로 돌아갔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군사위원회에서 증인석에 몰려 당한 김구의 쓰라림은 일찌감치 예견되던 것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 뿐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였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는 장준하의 말처럼 돌아온 조국에서,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지시자라는 곤경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임시정부 주석이었지만 친일파들과 민족반역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서도 “우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 말은 이승만이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귀국한 지 불과 이틀 만에 김구가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말이다. 기자는 자기가 뭘 잘못 들었나 해서 다시 “악질분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통일 후의 배제는 혼란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그래도 결코 친일분자를 먼저 처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김구의 소신이었다. “정세를 모르니 대답할 수 없다. 전민족에 관한 것인 만큼 신중히 해야만 하겠다”라고.

    1947년 12월 10일에 수립된 장덕수 암살사건의 책임자가 누군지를 알면 김구는 이런 발언을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노덕술이나 최운하, 이 사람들이야 말로 김구가 일찌감치 군정에서 내쫓았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수사위원회에 배치한 사람은 바로 장택상이었다.

    장덕수가 암살되던 그날 “과거 남조선 총선거를 군정수립이라 하여 다르다 하였으나 우리 민족이 전체 통일 방향으로 나가는데 있어서는 다를 점이 없으며 이박사의 주장하는 바와 조금도 다를 點이 없으니 이 길로 우리는 가야 한다”며 이승만과의 오랜 통합이 이제야 성사된다며 기쁘게 치사를 하던 김구였다. 나는 이 시점이 되면 김구가 초대 대통령 자리를 이승만에게 넘겨주리라 생각했다. 임정법통론이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내 앞에 버티고 있는 이승만은 넘기 힘든 산이었다. 뭐 나보다 나이라도 많으니 먼저 하시라고 하지. 나는 그 다음에 . . . .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무렵 장덕수가 죽어버린 것이다. 한민당과 경찰이 발끈했고, 이승만도 다시 김구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차피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에 참가하기는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비록 미국은 김구를 비롯해서 김규식과 홍명희 등의 남한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들을 “폐기(written off)”하기로 결정한 것은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둔 시점(1948년 4월 16일)이었지만, 이미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김구는 남한 정치와는 영영 굿바이를 한 셈이었다.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북한에 갔던 “허약한” 노인네 김규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남한에서 학생이나 노동자 농민의 자유는 없으며, 오직 테러그룹, 그러니까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의 자유만 보장될 뿐이고, 그런 그들의 자유로운 활동은 파괴활동이나 심지어 살인까지도 포함하는 테러적인 활동들이다. 북한의 상황은 독립할 자격이 주어져 있으며, 남한의 사정은 미국에 빚더미를 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남한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테러활동이 아직도 계속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 김규식, 1948년 4월 27일, 평양에서.

    안 그래도 건강이 안 좋아서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를 이 노친네에게, 테러라는 위험을 한가닥 더 얹으면서 남한 주민으로 살기 불안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1948년 4월 시점의 ‘해방공간’이었다. 말이 해방공간이지 이제는 남한단정으로 가는 ‘대단원의 마지막’의 국면. . . . ‘테러의 해방 국면’이었던 것이다.

    고7

    (사진설명) “1948년 4월 19일. 작은 규모로 우익 학생들이 우익 지도자인 김구의 집 앞마당에 모여있다.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할 계획이었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김구는 대표자를 내보내서 저항하는 학생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서울, 한국.” (출처 : NARA) 이철승이 대표로 있던 전국학생총연맹원을 비롯한 우익 청년학생들이 김구의 북행을 저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경교장에 모였다. 한창 토론이 진행되고 있던 사이에 김구는 뒷 문을 통해 개성으로 출발한 터였다. 사진 왼쪽 편을 보면 한 아저씨가 앉아서 주전자를 기울이며 뭔가를 따르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한 아저씨는 그 분을 향해 성큼 성큼 걷고 있다. 막걸리 정도를 드시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촌각을 다투는 다급한 사진인데도 저 왼쪽 두 분 아저씨의 모습은 한가로와 보인다.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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