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새해는
    대학 입시로 시작한다.
    [다큐멘터리 사진] 김석진의 〈삼선 쓰레빠 블루스〉
        2016년 01월 14일 11: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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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가 밝았다. 2015년은 가고 2016년이 왔다.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그리고 그 해 바뀜에 또 의미를 부여하고 설레어 한다. 이 해는 어제 그 해고, 내일 또 뜨는 그 해이겠지만, 새해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각자 갖는 여러 가지 희망을 해에게 업혀서 소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뭔가 내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 말이다.

    그 소망 가운데 가장 절절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아이들 대학 합격이 아닐까. 지금쯤 이맘때면, 수시로 합격한 아이들도 나오고, 정시 결과를 기다린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기 시험을 치른 아이들도 있을 테고, 면접을 친 아이들도 있을 거다. 모두가 다 똑같은 배에 탔다.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그 물건 같은 체제다. 그럼에도 그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이라는 공장,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순간, 그는 이미 물건 자체로서 자격 미달이고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게 된다. 그 공장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전쟁, 대학 입시가 지금 진행되는 한 중간에 서 있다.

    사1

    ⓒ 김석진, 《삼선쓰레빠블루스》 103쪽 (2015. 서울: 눈빛출판사)

    〈삼선 쓰레빠 블루스〉는 김석진이라는 전업 교사인 아마추어 사진가가 자신의 생업 현장이었던 한국의 두 고등학교 안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의 삶을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 찍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작품이다.

    김석진의 〈삼선 쓰레빠 블루스〉는 사진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현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성격이 분명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끌고 가는 내러티브 구성이 탁월하다.

    〈삼선 쓰레빠 블루스〉안에는 21세기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토해내는 눈물겨운 사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조회, 교문 앞에서의 단속, 무릎 꿇고 벌을 받으면서도 뭔가를 외우는 학생, 닭장 같기도 하고 아파트 같기도 하고, 공장 같기도 하는 ‘야자’ 교실, 성적표, 수험표, 교복, 뺏지, 스크럼, 어깨동무, 졸음, 담요, 까까머리 그리고 눈물…

    때로는 거시사적 관점으로 보는 대한민국 교육 체계의 문제를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미시사적으로 보여주는 한 개인 개인의 일상의 감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은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자료가 되는 기록의 힘,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력,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서사 구성력, 주제를 세우는 시대정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좋은 작품이다.

    사2

    ⓒ 김석진, 《삼선쓰레빠블루스》 55쪽 (2015. 서울: 눈빛출판사)

    사진가 김석진은 학교를 구성하는 요소를 욕망, 경쟁, 순응의 세 가지 키워드로 보았다. 그 셋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진 정체는 주체성도 없고, 개성도 없고, 생명력도 없고, 존귀함도 없다. 그것은 마치 어느 외국 스포츠사의 용품을 짝퉁으로 만들어, 졸지에 국내 모든 학교에서 다 신는 그 삼선 쓰레빠와 같은 모양이다. ‘오직 성적’이 ‘오직 예수’고, ‘야자 천국, 도망 지옥’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되는 현장이다. 오직 성공만을 위해 그 불로 뛰어 들어가는 그 불나방 청춘들의 우울한 삶의 모습을 한 장면 한 장면 채집하였다. 정말 통렬하고 매서운 눈이면서 슬프고 아린 눈이다.

    사진가는 그 우울한 풍경을 주체가 소외당하는 모순의 구조에서 찾는다. 학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에 앞장서는데, 학교는 아무런 변화를 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학교는, 어느 광고 카피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더욱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둠 아니면 빛이고, 지옥 아니면 천국일 뿐이다. 모두에게 다 똑같다. 사진가의 말대로 ‘지속되는 과도기’다. 곧 있으면 끝나고 새 시대가 와야 하는 그 과도기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곳, 그곳 학교는 바로 뫼비우스 띠다. 꾸고 깨고, 다시 꾸고 다시 깨어나도 다시 꾸는 악몽이 윤회같이 얽혀 있는 현장이다.

    사진가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점수, 체벌, 왕따, 단속, 통제 … 모두 어둠의 속성이다. 전체와 일탈, 좌절과 순응, 욕망과 갈등 … 모두 모순과 양자택일의 속성이다. 그 안에서 학교라는 시스템은 거대한 빙벽과 같은 존재이고, 학생이라는 주체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못하는 극히 왜소한 존재다.

    대상이 보여주는 이러한 이분법적 질서는 사진이라는 매체로 재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시험지, 의자, 참고서를 바닥에 꽉 채운 뒤 학생 한 사람을 아주 작은 크기로 그곳에 있게 하는 프레이밍, 그 프레임은 사방이 꽉 막힌 형국이고, 학생은 그 안에 감금되어 있는 모습이다. 비유적 기법으로 보이지만, 엄연한 현실 그대로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 어떤 예술적 터치나 극화가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방식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은 없다.

    거울이나 물에 비친 반영으로 재현한 이미지도 많이 보인다. 실존에 대한 고민의 재현이다. 나는 존재하는가? 나는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너는 진정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너한테 말하고 싶다, 미안하다고 … 그림자 혹은 실루엣으로 표현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빛과 어둠으로 비교되는 존재의 의미, 그 초라함. 나는 지금 어둠에 있지만 나의 미래는 밝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 눈물로 이를 악물고 그 빛을 향해 돌진하는 학생들에게 바친 슬픈 야상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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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석진, 《삼선쓰레빠블루스》 47쪽 (2015. 서울: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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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석진, 《삼선쓰레빠블루스》 65쪽 (2015. 서울: 눈빛출판사)

    철학자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우리 모두 학교 없는 사회를 꿈꿔야 한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아나키스트이다. 그런데 웬만해서는 그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려는 사람들이 없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설파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관념인 공산 사회를 따르려는, 그것도 유혈 혁명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당당히 나서는데도, 이반 일리치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사실 그가 설파한 학교 없는 사회라는 일종의 아나키즘은 실행에 옮기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다소 낭만적인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로 삶에 대해 뿌리 채 고민하는 문인이나 예술가 혹은 철학자들이 따르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길을 온전히 따르지는 못할지라도 그 길로 가려 하는 노력은 해야 한다. 공산 사회가 실현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따르고 이 땅에 세워보려는 노력에 따라 그 가능성이 점차 커질 수도 잇다는 데서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학교 또한 마찬가지다. 도저히 이런 상태로 나둘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대학은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교육을 돈 버는 수단으로 훼손시켜버렸다. 짐승들이 돈에 눈이 먼 그 노회한 짐승들이 그득한 그 안에 청춘들, 그 피 끓는 청춘들이 그 돈 판에 들어가 있다. 이를 두고 보고만 잇을 것인가? 아무리 학교 없는 사회가 비현실적이라 해서 이렇게 굴목하고 살 것인가 말이다.

    비록 작은 목소리지만, 비록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이미지로 밖에 할 수 없는 목소리지만, 진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 아마추어 사진가는 말한다. 고등학교가, 그 새파랗게 젊고 싱싱한 우리의 아이들이 그 ‘삼선 쓰레빠’같이 획일화 되어 죽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무도 반성하지 않은, 모두가 다 공범이 되어 아이들을 목 조르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

    기껏 해봤자, 카메라만 들 뿐, 그것으로 아이들과 소통하고, 그 이미지들로 세상에 그 ‘공장 이야기’를 전달해 줄 뿐 달리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그 좌절의 현장에서 선생님은 서럽다. 큰 소리도 내지 못하는 처지, 이 땅의 그 선생님들 처지가 너무나 서러울 뿐이다. 그 안에서 병들어가고, 썩어가고, 죽어가는 이 땅의 우리 아이들이 서럽다.

    김석진의 〈삼선 쓰레빠 블루스〉는 교육이라는 게 이미 죽었음에도 더 살 게 있다고 착각하는 이 땅의 모든 존재들, 교사, 학부모, 학생, 정치인, 교육 행정가들이 읽어야 할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쓴 진혼곡이기도 하다.

    작은 교사가 남긴 슬픈 교육의 현장을 한 번씩 들러보시라, 그리고 왜 대한민국의 새해는 대학입시로 시작 되어야 하는지,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시라. 이것이 2016년을 새롭게 맞아하는 새해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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