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관계증명서
    [텍사스일기-1] 연재를 시작하며
        2016년 01월 08일 01: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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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한 해 동안 미국에 방문 교수를 다녀왔다. 적을 둔 곳은 산 마르코스에 있는 텍사스 주립대학교(Texas State University). 생활환경을 고려해서 살 집은 학교에서 북쪽으로 43마일(69킬로미터) 떨어진 오스틴(Austin)에 얻었다. 아보레텀(Arboretum) 지역의 하드락캐년 아파트가 그곳.

    2월 13일에 한국을 떠나 다음해 2월 23일 돌아왔으니 375일간의 체류였다. 거대한 땅 아메리카에 돌멩이처럼 투척된 이방인으로서 보고 느낀 것들을 차분히 한번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하지만 의무감은 그저 의무감일 뿐, 강의와 다른 책 쓰기에 붙들려 1년이 바람처럼 지나버렸다. 더 이상 미루다가는 기억조차 다 사라지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신년을 맞아 <레디앙>에서 지면을 마련해주었다. <텍사스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된 이유다.

    현대사의 굽이굽이 우리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온 미국. 이 나라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인식된다.

    (세계에서 3번째로 넓은) 거대 국토와 풍부한 자원, 천변만화의 축복받은 자연환경을 갖춘 나라. 3억 명이 넘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멜팅 포트(Melting Pot) 혹은 샐러드 보울(Salad Bowl) 사회. 할리우드 영화와 팝 음악 등 세계를 이끄는 소비지향 대중문화의 발신지. 압도적인 군산복합체 시스템을 통해 지난 100년간 최강의 정치, 경제, 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나라.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대외침략 횟수를 기록한 제국주의 국가.

    한국 사람치고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필자 또한 철들면서부터 삶의 갈피마다 미국과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맺어왔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 친구 따라 구경 간 모르몬교회에서 만났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의 백인 선교사. 대학 들어간 후 비로소 숨겨진 커튼을 열어젖히고 직면한 이 나라의 제국주의적 면모. 그리고 20여 년 전 처음 방문한 뉴욕, 워싱턴스퀘어 지하철역에서 들었던 거리 연주자의 애절한 바이얼린 선율까지.

    그러나 지금부터는 그렇게 만들어진 내 안의 편견을 벗어나보려 한다.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들은 것만을 그려보려 한다. 과한 욕심이 분명하겠지만, 가능하면 단순 방문기를 넘어 이 나라의 숨겨진 뼈대와 속살까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고 싶다. 1년이란 시간은 한 개인의 삶에서 짧지 않다. 하지만 남한 국토 100배에 달하는 광대한 땅 위에 얽혀져 살아가는 수억의 인민들과, 그들이 구축시킨 특정 사회의 면모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당연히 코끼리 신체의 일부만을 만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자가 할 일은 온 힘을 다해, 스스로 경험한 이 나라의 모습을 정직한 필치로 묘사하는 시도뿐이겠다. 경계인으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긴장과 이질감이 부디 이 나라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나에게 선물해주기 바랄 뿐이다.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실 것을 기대한다. 출국 직전 썼던 글로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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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국이 이십여 일 남았다. 비행기 표를 끊었고 살 집 계약을 끝냈다. 하지만 이걸로 전부가 아니다. 가족 모두가 삶의 근거를 옮겨야 하니 마무리 지을 일이 태산이다. 1년 동안 이삿짐 보관할 새 아파트로 물건을 옮겨야 한다. 해외 송금이 가능한 외환계좌를 터야 한다. 타던 차는 형님께 양도하기로 했지만 이것저것 처분해야 할 가재도구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학교에 가서 동료선생님들과 인사하고 송별회도 치러야 한다.

    오후에는 대사관 비자 인터뷰에 필요하다 해서 가족관계증명서를 인터넷으로 출력했다. 등록기준지가 새로운 도로명으로 바뀐 게 눈에 띈다.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했던 남산 아래 후암동이 “두텁바위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 아래로 가족사항이 쭉 이어진다. 우리 식구만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중간쯤에 아버지와 어머니 함자가 적혀 있는 것이다.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 마흔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까맣게 잊고 살던 부모님 이름을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공문서 위에서 발견한 것이다.

    부모님1

    왜 이런지 모르겠다. 출생연월일도 주민등록번호도 없어진, 그저 덩그라니 종이 위에 적힌 두 분의 이름을 보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조이는 듯 아파온다. 눈물이 복받친다.

    어머님은 아스라한 기억밖에 없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왼쪽 가슴에 맨 손수건을 고쳐주시던 다정한 손길. 내가 여섯 살 땐가 어머니는 멀리 경상북도 군위군 천평에서 식당을 하셨다. 엄마가 보고 싶어 혼자 버스 타고 찾아가다 잘못 내려 십리 길을 걸었었다. 여름 땡볕을 걷고 또 걸어 발갛게 익은 채 식당에 들어서자, 깜짝 놀라 나를 품에 꼭 안고 뒤안 우물로 데려가 씻겨주셨던 기억.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환갑 맞으신 아버님 기억은 생생하다. 홀로 되신 후 형과 나를 키우느라 환갑잔치 상도 제대로 못 차린 아버지. 광주항쟁이 터진 그해 5월, 재수하겠다고 내려온 아들이 두 달 동안 행방불명되었을 때 물어물어 내가 잡혀있던 대구 50사단을 찾아왔던 아버지. 벨트도 뺏기고 신발도 뺏겨 피가 엉켜 붙은 맨발로 줄줄이 고개 숙여 앞사람 등 짚고 화장실 갈 때였지. 착검한 병장 한 사람이 대학 선배라고 귓속말로 속삭이며, 아버지가 자전거 끌고 매일 부대 정문에 찾아와 내 생사만이라도 알려 달라 하신다고 전해주었다.

    그렇게 세상 먼지 속에 뒹굴며 무던히도 속 썩이던 막내아들이 지방대학이지만 그래도 교수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치매가 오셨다. 그리고 한 해도 지나지 않아 혼수상태 속에서 임종을 맞으셨다. 장례 마지막 밤 파티마병원 영안실에서 밤새 당신 사진을 바라보며 내가 했던 맹세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세세히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버지.

    김자 용자 태자 내 아버지, 변자 남자 순자 내 어머니.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살아서. 두 분을 이렇게 까마득히 잊고 살아서.

    필자소개
    동명대 교수. 언론광고학. 저서로 ‘카피라이팅론’, ‘10명의 천재 카피라이터’, ‘미디어 사회(공저)’, ‘ 계획행동이론, 미디어와 수용자의 이해(공저)’, ‘여성 이야기주머니(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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