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의 왕국', 대한민국
        2016년 01월 04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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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 문제에 있어서 사실상 일본 정부의 대리인 아닌 대리인 역할을 자청한 박근혜 정권의 “외교참사”를 보면서 저는 처음에 믿을까 말까 했습니다.

    이 정권을 이끄는 관료들은 파렴치한 냉혹한 일지언정, “바보”는 아닙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역사를 얼마 되지도 않는 돈에 팔아, “돈을 받은 만큼 소녀상 철거하고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거론하지 않겠다”는 식의 태도에, “위안부” 피해자 본인들과 상당수 내지 대부분의 시민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이 관료들도 알긴 알았을 것입니다.

    알면서도 왜 이런 참사를 저질렀을까요? 이 정도로 미국 등으로부터의 외압이 강했을까요? 그런데 아무리 외압은 강해도, “대일 굴욕 외교”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긴 알았을 터인데…

    과거 “3김”과 같은 “정치9단”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나름대로 민심을 읽을 줄 알고 1965년에 박정희가 한꺼번에 그 민족주의적 명분을 어떻게 잃었는지 너무나 잘 알 만한 사람들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처음에는 아예 이해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해는 갈 것 같습니다. 이 관료들은 아마도 “10억 엔”의 마력을 끝까지 믿고, 비록 어느 수준의 비판 여론은 형성돼도 결국 피해자들이 “10억 엔” 앞에서는 그저 한을 머금고서라도 돈을 받고 조용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셈입니다.

    “10억 엔”의 마력을 믿고 앞으로는 두고두고 “2015년 대일 외교 참사”라고 부를 짓을 저지른 것이죠. 이번에는 저들의 계산은 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거의 25년 동안, 정부의 도움을 별로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권과 존엄성 회복 운동을 해온 당사자들이 “10억 엔” 앞에서 굴복할 일은 없었으며, 피해자들에게 상처만 주었을 뿐 그 아무것도 “해결”하지도 못했으면서 “해결”한 척한 정부는 여론의 뭇매만 받게 됐죠.

    한데 이번에 그런 계산은 틀렸지만, 이처럼 계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한국 사회는 “돈”에 절대적으로 민감하다는 점일 겁니다. 민감하다는 게 외교적 표현에 가까울 거고, 사실상 특히 최근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돈”이야말로 개인과 사회 삶의 “중심”이 된 거나 마찬가지죠. “돈”의 마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라고 대한민국에 있는가 생각해보면, 정말로 없는 것 같습니다.

    종교? 그야말로 “돈교”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교회와 사찰은 일부의 경우 세습도 가능한 개인기업화 됐고, 그 중의 일부 대형교회나 봉은사 급의 거찰은 재벌화 됐습니다. 성금/불전이 매개하지 않는 종교생활을, 대한민국에서 상상할 수도 없죠. 어떻게 보면, 돈 주고 초자연적 힘들에 대한 각종 환상/상상들을 이용한 위안을 사는 게 우리들의 “돈교”입니다.

    연애/결혼? 특히 후자의 경우 “돈혼”이라고 불러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남녀들의 부동산 보유 등의 재산과 학력, 지위, 출신 배경 등을 계량화, 등급화시켜 서로 맞추어주는 <듀오>, <선우> 등 결혼업체들의 사이트에 들어가 보시죠. 두 사람이 결혼하려는 게 아니고 두 개의 돈 주머니들끼리 서로 규모 맞추어 결혼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런 사회다 보니 결혼시장에서 필요한 “출중한 외모”도 성형외과에 돈 주고 사는 행위가 일반화되어…돈이 사람의 얼굴도 확 바꿀 수 있는 멋진 신세계가 다 도래한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부모들이 자녀들을 출세시켜 본인들의 노후 보장을 그렇게라도 받으려고 애쓰고, 자녀들은 또 자녀대로 부모들에게 금전적으로 의존하는 만큼 일단 “필요한 범위 내”에서 효자, 효녀 “노릇”을 해보는 셈입니다. 부모의 지원을 받아 “출세”를 해도 부모의 노후를 돌보지 않는 자녀들이 양육비용을 돌려달라는 부모들의 소송을 당하는 세상인데…”동방예의지국”이 이미 “동방 돈의 제국”으로 다 변신한 셈이죠.

    어느 사회나 근대성 발달의 어느 시점에서 개체화 과정을 거칩니다. 한데 대한민국에서는 이 개체화 과정은 “개인주의”가 욕이 아닌 긍정적인 용어로 변신된 1990년대에 시작되어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화와 딱 겹쳐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본주의 후기의 한국적 “개인”은 아쉽게도 철저하게 경제동물화 된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게 본래 인간의 신체부터 가족/애인 등 가장 친밀한 모든 관계까지 일체의 삶의 영역들이 다 금전경제에 식민화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데, 신자유주의적 개체화는 결국 “돈화”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공공영역이 매우 취약한 재벌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이 소유하는 “돈”의 중요도는 객관적으로도 높을 수밖에 없기도 하죠.

    국가의 보육예산도, 국민연금도 믿을 수 없고 병원도 무료가 아닌 사회에서는 “나의 돈”이 없으면 아이를 낳아 키울 수도 편하게 늙을 수도, 인간답게 아플 수도 없죠. 공공영역이 취약한 이상 “모든 게” 돈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개체화, 그리고 모든 인간적 관계들의 금전화는 엄청난 고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죠.

    아마도 한국적 상황에서는 진보정당이라면 “돈의 사회에서 사람 중심의 사회로!”와 같은 구호를 내걸 만도 합니다. 돈의 왕국에서 돈이 없는 사람으로서 사는 게 말 그대로 “헬”이고, 이런 빛이 보이지 않는 지옥이 인제 다수의 몫이 돼가니까요. “헬조선”을 벗어나자면 공공영역이라도 충실해서 돈 없어도 굶어죽지 않고 아파죽기 않고 노숙자 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야 할 거고, 나아가서는 지금과 달리 모든 인간관계가 “돈”을 중심으로 돌지 않는 사회로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한데 “돈”이 이미 거의 국민 종교가 다 된 상황에서는 이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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