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한 규제가 필요하다
    [왼쪽에서 본 F1] 누구에 엄격할까
        2015년 12월 24일 03: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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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은 열정으로 가득 찬 스포츠입니다. 곧 죽어도 자동차를 찾는 사람들이 모여 F1 팀을 이루고 있고, 세계 최고의 경주에서 승리하겠다는 일념으로 갖은 고생을 불사합니다. 모터스포츠의 최고 정점이라는 자부심도 대단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경쟁자들에 대한 존중과 동지애도 뜨겁습니다.

    2012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파스토르 말도나도가 윌리암스 F1 팀에게 8년만의 우승을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팀의 차고에 화재가 나면서 막대한 재산 손실과 함께 쉽게 조달할 수 없는 필수 장비들이 잔뜩 소실됐습니다. 그런데 화재 사고는 안타까웠지만, 이 사고를 둘러싼 몇 가지 장면은 마음을 따듯하게 해줬습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 (경쟁에 패한) 다른 팀원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었고, 불을 끄기 위해 모두 힘을 모아 물을 나르고 소화기를 들고 뛰는 모습은 상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윌리암스 팀이 필수 장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경쟁 팀에서는 자신들에게도 소중한 장비를 십시일반으로 모아 빌려줘 윌리암스가 경쟁에 나설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얼마 전에는 재정 악화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로터스 F1 팀이, 팀 빌딩 사용료 체납으로 그랑프리 기간 중 짐을 풀 곳도, 밥을 먹을 곳도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이 때 다른 팀에서 로터스의 팀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쉴 곳을 제공하는 동료애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F1 팀들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지만,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이나 동료 의식도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화기애애한 장면만 본다면 F1의 본질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미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F1이라는 스포츠 무대는 그리 따뜻하고 인간적인 곳은 아닙니다. F1 팀들은 규정 안에서 이기기 위해 경쟁하는 적이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단지 정해진 규정 안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할 뿐 아니라, ‘걸리지만 않는다면’ 불법과 탈법이 난무합니다. 엄연히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규정도 자기들 맘대로 해석하기 위해 법정 싸움까지 마다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F1 그랑프리는 언제나 매우 엄격하고 세밀한 규정과 관리가 강조됩니다. 모든 그랑프리 이벤트의 시작은 검차, 즉 그랑프리에 참가할 차량의 검사로 시작됩니다. 자동차의 모든 부분은 스포츠를 관리하는 FIA에 의해 봉인되어 아무나 건드릴 수 없습니다. 차량의 검사를 통과한 뒤, 규정에 맞는 차로 경쟁에 나서라는 강요인 셈입니다.

    검차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까지 수시로 이뤄지는 불시 호출에 따른 무게 검사, 퀄리파잉이 끝난 뒤의 종합 검차, 그리고 레이스가 끝난 뒤의 검차까지 계속됩니다. 격투기 종목이라면 경기 전 지정된 시간에 한 번 계체량을 통과한 뒤 자유(?)를 얻을 수 있지만, F1에는 그런 자유는 없습니다. 마치 모두를 잠재 범죄자로 보는 듯한 접근이죠.

    [차량 검사를 기다리고 있는 레이스카와 F1 팀원들]

    [차량 검사를 기다리고 있는 레이스카와 F1 팀원들]

    이런 검차뿐 아니라 차량이 트랙을 달리는 동안 실시간으로 많은 데이터가 FIA에 전해지고 감시됩니다. 현재 F1 레이스카에는 수 백 개의 센서가 부착돼 작동하고 있는데, 그 중 상당수를 스포츠 전체의 관리자가 감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타이트하게 감시를 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불법(?)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엄격한 듯 보이는 F1의 규정이란 것이 모든 이들의 사정을 무시하는 냉혹한 법 체제인 것만은 아닙니다. F1 규정 중 107% 룰이란 것이 있습니다. 퀄리파잉에서 가장 빠른 기록보다 107% 이상 느리면 레이스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죠. 누군가가 1분 40초에 한 바퀴를 도는데, 만약 1분 47초 이상이 걸리는 사람은 레이스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107% 룰이 엄격하게 적용된 예는 많지 않습니다. 스튜어드라는 심판관들이 사정을 들어보고 인정할만하다 하면 레이스 참가를 허용해주기 때문입니다. 대형 팀에서도 종종 심판관의 구제를 받지만, 대부분 107% 룰에 저촉되고도 구제받는 것은 영세한 소형 팀들입니다. 딱히 돈이 많지 않은 팀이 가련해서 이런 인정(?)을 베푸는 건 아닙니다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혜택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죠.

    최근에는 목요일 정해진 시간에 검차를 받지 않으면 레이스 참가가 허용되지 않는 매우 중요한 기준도 예외가 인정된 사례가 있습니다. 2015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재정 문제’로 차 조립이 늦어진 로터스가 목요일에 검차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팀이 검차를 받지 않은 사정을 양해해 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져, 결국 로터스는 무사히 레이스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엄격하기 그지없는 F1의 규정이, 힘 없는 중소형 팀들에게 조금씩 숨구멍을 틔워줄 때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 사는 곳이다보니 예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고, 딱히 사람의 정은 관심 없더라도 스포츠 전체의 이익을 위해 도태되는 사람이 없도록 구제해야 한다는 계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규정의 허점을 노리고 속임수를 곁들여 이득을 취하려할 때도 사람 사는게 다 그런 게 아니냐며 유드리있게 대처할까요? 적어도 최근의 F1에선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F1이 돈 많은 팀, 강팀들의 영향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규정조차 돈의 논리에 따라 바뀌곤 하는 스포츠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정해진 규칙을 대놓고 지키지 않는데 관대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차량에 대한 검사도 성적이 좋은 강팀들에 집중됩니다. 가장 많은 의심을 받고 가장 엄격한 규제에 놓이는 것도 대형 팀들입니다. 경기가 펼쳐지는 써킷뿐 아니라, 팀의 본거지에 있는 개발 설비와 윈드 터널 등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FIA가 직접 감사하기도 하고, 어떤 이슈에 대해 조사위원회를 꾸려 기밀에 가까운 자료들도 검토합니다. 오늘 내일 먹고 살기 힘든 소형 팀들은 사실상 경험할 일이 없는 빡빡한 통제들인 셈이죠.

    이 모든 것들은 다 F1 팀들이 틈만 나면 규정을 어기거나 속임수를 쓰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스포츠나 그런 면이 조금씩 있긴 하겠지만, 엔지니어링 측면이 강한 F1에선 그런 특징이 더 심하죠. 그래서 뛰어난 머리를 가진 F1 엔지니어들은 좋은 면으로든 나쁜 면으로든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F1의 핵심 인력으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그런 핵심 인력을 잘 데려다 쓸 수 있는 것도 역시 가진 자들, 즉 자본이 풍부한 대형 팀 쪽이죠. 작은 팀에 뛰어난 인력이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팀에 스카웃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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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코리아 그랑프리에 참가한 F1의 핵심 엔지니어들]

    그렇기 때문에 규정은 더더욱 대형 팀, 부자 팀, 가진 자들을 향합니다. 내버려두면 탈법을 저지르는 것뿐 아니라, 아예 규정을 입맛대로 바꿔 자기들은 이득을 얻고 소형 팀들은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을테니까요. 탈법이 인정되는 순간 돈 없는 팀들은 그것을 따라가기 위해 몇 배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니까 본 칼럼에서 자주 그랬던 것처럼, F1의 얘기가 F1만의 얘기로 들리지 않고 현실 세계의 이야기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현실 세계도 F1 못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곳이고, 규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죠. 그리고 조금 더 가진 자들은 기회만 있다면 탈법을 저지르곤 합니다. 그들만의 얘기라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그런 위치에 선다면 같은 탈법을 저지를지 모르니까요. F1 팀들이 그렇듯 말이죠.

    그래서 더더욱 타이트한 규제가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엄격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공정하기는 해야 하지만, 어차피 탈법으로 많은 것을 어기기도 어려운,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이것 저것 지키라고 얘기하는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얘깁니다. 대형 팀을 관리하면 알아서 전체가 관리되고,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을 감시하면 전체적인 룰도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도 F1만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왜 광장에서 그런 얘기를 하나? 국회에서 말로 하면 되지.” 대략 이런 뉘앙스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 얘기는 너무 순진하게 들립니다. 말로 될 것이었으면 애초에 광장에 나가지도 않았겠죠. 탈법과 편법에 익숙한 우리 주변의 가진 자들이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아량을 베풀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기대하고 설득하는 게 정말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권력이나 자본과 기득권을 가진 쪽에는 더없이 엄격해야 합니다. FIA가 조금이라도 규정을 벗어나 팀들을 관리하고 이끈다면, 남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될 뿐더러, 쉽게 약자를 억압할 수 있는 구조가 됩니다. 가진 자들은 엄격한 규정이 있어도 빠져나가는데, 그마저 없다면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들의 문제는 말로 해결하고 여유를 줄 필요가 있겠죠. 소형 팀들이 규칙을 잘지키고 늘 성실하고 착하기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함께 살려면 바로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로 언급은 안했지만 마지막 몇 문단은 F1과 현실 세계의 이야기를 마구 뒤섞어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 같네요. 그만큼 서로 다르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물며 스포츠에서도 이런 대원칙이 존재하고, ‘함께 살아남기 위해’ 좋든 싫든 강자와 공권력을 중심으로 법과 규제를 빡빡하게 만드는데, 현실 세계가 오히려 그렇지 못한 면이 많다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F1의 세계를 극단적으로 자본주의적이고 매정하다고 그렇게 비난하듯 글을 썼는데, 우리 사회가 그만 못하다면 그만큼 바꿔야 할 것 들이 많다는 얘기겠죠.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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