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재앙,
국민전선 등장과 좌파의 붕괴
    2015년 12월 23일 11: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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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티스 쿠벨라키스는 런던의 킹스칼리지에서 가르치고 있는 저명한 그리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그리스의 시리자로부터 분리한 좌파연대의 주요 이론가이다. 이 글에서 그는 12월 있었던 프랑스 지방선거에서의 국민전선(the Front National)의 도약과 프랑스 좌파의 몰락을 분석한다.

쿠벨라키스는 프랑스 좌파들이 프랑스 사회당과 연대하면서, 급진주의적 가치로부터 멀어져 갔으며, 프랑스의 ‘우익화와 지배 담론의 강화’에 무기력하게 대응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던 것이다. 반면 극우파 국민전선은 우익적인 반체제적 저항을 실천함으로써 불만이 쌓인 대중들을 성공적으로 동원했다고 분석한다. 한국의 진보정치와 좌파정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글이라는 생각이다. 원문은 버소 블러그(링크)에 있으며, 쿠벨라키스의 프랑스어 글을 덩컨 토마스가 영어로 옮겼다. 프랑스 지방선거(1차) 결과 관련 기사(링크) <역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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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지방선거에서 국민전선의 선전은 전통적 형태의 파시즘을 재현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재앙이다. 스타티스 쿠벨라키스(Stathis Koubelakis)는 그와 같은 반동적 인민주의의 부상과 그것이 동반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점증하는 권위주의화는 균열되고 취약한 좌파에게 치명적인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떤 측면의 대항 헤게모니 프로젝트도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덩컨 토마스 주)

지방선거 1차 투표에서 국민전선 득표율의 급상승과 함께 프랑스 사회에 드리워진 먹구름과 같은 정치지형의 이미지는 이 국가가 과연 전간기 이탈리아와 독일의 모델과 같은 일종의 ‘예외국가’ 즉 파시즘과 같은 상황으로 빠져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예외국가’란 니코스 플란차스가 [파시즘과 독재]에서 하나의 부르주아 ‘국가형태’로 규정한 개념으로, 자유민주주의적 국가형태와 대조되는 파시즘 국가나 군부권위주의 국가 등을 일컫는다.-역자)

이런 문제의식은 파시즘의 출현이 최초 국면에서는 선거제도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국가들에서 나타났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 그럴듯해 보인다. 11월 13일 테러공격 이후 ‘국가 비상사태(state of emergency)의 선포’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이미 ‘예외국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릇된 반란으로서의 파시즘

그러나 현재의 프랑스와 전간기의 이탈리아/독일을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다. 2015년 프랑스는 1920년대의 이탈리아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과는 다르다. 세계대전이 눈앞에 들이닥친 것도 아니고, 의회민주주의 체계가 붕괴직적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극우파들은 선거제도에 천착하고 있지 무장한 군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노동운동은 현재 너무나 취약해서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노동자 운동을 파괴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제는 고전이 된 니코스 플란차스의 1970년 저작 [파시즘과 독재]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현재 우리가 파시즘화 과정의 기본 조건들을 구성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일반적 위기나 제국주의 간 군사적 경쟁 상황에 놓여있는 것도 아니다.

선거를 통해 국민전선이 권력을 잡는다 할지라도 그 뒤에 따르는 것은 파시스트 독재는 아닐 것이지만, 그러나 국민전선의 권력 장악은 이미 궤도에 올라와 있는 일련의 과정에서의 질적 도약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권위주의적 국가의 강화와 신체-정치의 한 부분으로서 인종적 배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의 질적 도약을 의미한다.

이는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에 근접하는 국가형태를 취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프랑스 사회에 토착화된 핵심 민족 집단들 내에서 제도화된 분할을 만들어 내는 그런 국가형태가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국민전선은 실제로 일관된 정치 프로젝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인종주의와 권위주의 국가의 ‘일반 상식’들을 통해 이미 하나의 ‘사회블럭’(social block)을 구성하고 있다. 이 사회블록은 프랑스 사회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집단들을 이미 만들어진 ‘탈계급화’의 경로로 인도함으로써 작동하는 체제이다.

(‘사회블럭’이란 안토니오 그람시의 권력블럭 개념을 유비하여 시민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를 통해 형성된 광범위한 동맹체제를 일컫는 개념으로 쿠벨라키스가 만들어낸 것인 듯하다. 여기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진 못했지만 시민사회 내에서 대중동원에 성공한 극우파들의 동맹을 일컫는다. -역자)

(프랑스 지배계급은 계급 간 적대적 모순들을 인종적인 분할체제의 건설을 통해 ‘상징적으로’ 해소하며 계급적 연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있다. 더불어 인권, 공화국, 남녀평등, 자유라는 ‘프랑스적인 일반 상식’을 동원하여 무슬림을 비이성적이고 덜 문명화된 약자로 공격하는 배외주의가 작동하고 있다-역자)

그러나 국민전선의 역동적인 성장을 전간기 파시즘과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교차점이 존재한다. 이 비교지점은 이 정당의 역사적 기원들이나 특정한 정치 조류로부터 다른 조류로의 이데올로기적 연속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 이상이다. 전간기 파시즘이나 국민전선의 힘은 ‘반체제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대표하는 그들의 능력이다.

이들은 대중의 통념 속에 이미 자리 잡은 ‘내부의 적’이라는 표적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이것은 대중들의 분노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뚜렷하게 분출시키는 그들의 능력에 따른 것이다. 물론 국민전선은 전간기의 파시즘들과 같이 제국주의적이고 팽창적인 프로젝트를 갖고 있지 않다. 국민전선의 역동성은 ‘방어적인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이민에 반대하고 인종적 차별을 옹호한다.-역주) 국민전선은 지구화된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지 세계를 분할하기 위해 싸우는 제국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부분적이든 총체적인 것이든, 국민전선을 부양하고 있는 것은 ‘공화주의적 전선 전략’ 즉 세계의 나머지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고, 그것들에 저항하는 ‘우리’라는 담론을 정당화 하는 바로 그 전략이다. 이들은 ‘체제’에 저항하는 유일한 존재로서 자신들의 독특한 지위를 부각시키고 있다.

(국민전선은 기존의 제도정당들이 ‘프랑스적인 것’을 부정하고 무슬림과 내통하고 있으며,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주체들이라고 공격하며, 자신들은 프랑스적인 것을 지키고 프랑스인들이 겪고 있는 불평등과 고통을 없앨 것이라고 주장한다.-역자)

이렇듯 대중적 반란 형식을 취하며 사회블럭 내에서 이를 헤게모니화 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전선의 독특한 능력이다. 심지어 그들은 대중적 저항을 급진화한다. 현재의 극우파들은 정확히 대중의 분노와 급진주의를 전취하는 것을 통해 지지세력 확대하고 있다. 이것이, 파시즘이 그랬던 것처럼, 대중의 반란을 중도에 ‘탈취(hijacking)’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느낌의 근원이다.

이 과정의 다른 측면에 놓여 있는 것은 소위 ‘급진 좌파’의 무능이다. 하층계급들에게 대항 헤게모니를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만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말해 현존하는 질서에 실질적으로 도전하는 세력으로 자신을 인식시키는데 있어서조차 무능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민전선

마린 르펜 국민전선 대표(위)와 그의 지지자들

깊은 뿌리를 지닌 재앙

지난 일요일 선거 결과에서 좌파들의 낮은 득표율에서도 나타나듯이(약 5%의 득표율, 극좌파 ‘노동자들의 투쟁’(Lutte ouvriére)의 표까지 합치면 6.5%) 급진적 좌파의 극단적인 취약함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되는 원인들에 기인한다. 첫째 이유는 지난 선거에서 좌파전선(the Front de Gauche’s)의 주요 구성원인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 간의 연합을 포함하는 순응적인 연대전략이다. 이것은 혼란을 야기하는 전략으로서 이 동맹의 통합성과 일관성을 이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혼란에 덧붙여 이 동맹 형태는 마치 상이한 정당 조직들의 카르텔처럼 조직되어 ‘아래로부터의’의 어떤 진정한 전투적인 행동주의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금지하며 내부적인 경쟁과 균열만을 재생산해 왔다. 그것이 아무리 진지한 과정이었을지라도, 그것들은 현대 정치 조류의 쇠퇴 원인들 이상의 징후들이었다.

(좌파전선(the Front de Gauche)은 2009년 유럽연합 선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선거동맹이다. 프랑스 공산당이 중심에 있고, 사회당을 떠난 좌파당, 반자본주의당과 분리한 통합좌파 등이 주요 구성원이다. 2010년 지역선거, 2012년 대통령 선거, 2015년 지방선거에서도 선거동맹을 만들어 대응했다. -역자)

보다 근본적인 쟁점은 급진적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강령적 정체성의 붕괴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양자는 이미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의 충성스런 관리자가 되어버린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점증하는 복종을 이끌어 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민주의로 인해 부양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후퇴들, 타협들, 망각들로 인해 크고 작은 구멍들이 나기도 했다.

이는 프랑스에서 “국가 안보”를 위한 연대와 국회에서 지난 11월 19일 있었던 국가비상사태의 3개월 연장에 대한 투표에서 좌파연대 의원들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보낸 것에서 잘 드러났다. 그 투표는 분명히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좌파연대와 프랑스 사회당은 국민전선을 막기 위해 지방선거 2차 투표에서 후보연합을 단행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프랑스의 급진좌파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저항하여 사회세력을 동원하면서도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을 제안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고 지금도 믿는다. (그들은 구호만 급진적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다.-역주)

꺼풀을 조금만 벗겨보면 이 표면 아래 숨겨진 다른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민주의가 신자유주의와 동맹한 현실 속에서 또한 소련의 붕괴와 함께 반자본주의 혁명 전략이 좌초한 국면에서, 좌파들은 점차 복지국가가 성취한 것들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는 세력들에게만 정치의 공간이 열려 있다고 사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지국가란 좌파가 방어해야만 하는 노동자운동의 유일한 유산이 된 것처럼 말이다.

“신자유주의 블록의 ‘극좌파들’이나 안토니오 네그리 등의 ‘의사 전복적인'(the pseudo-subversive discourse) 복지국가 비판 담론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의 성취는 의문의 여지없이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어 투쟁은, 그 이름에 걸맞게 가치 있는 정치 전략의 구성에는 현저하게 미달하고 있다. 심지어 복지국가를 방어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적 질서와 균열을 내포하는 기획은 더더욱 아니게 되었다.

최선의 경우라 해봐야, 그람시가 ‘경제-조합적’ 수준의 정치적 활동이라고 불렀던 것들에 불과하다. 경제-조합적 차원이란, 지배계급 블록을 향한 적대적인 경향들 속에서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생성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헤게모니적 차원과는 동떨어진, 말 그대로 하위주체 계급들의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들을 대표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 자본의 경제정치 권력들과 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여러 기관들은 응집된 형태로 다음과 같은 여러 통치 수단들을 활용해 왔다. 이들은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 긴밀하게 얽혀있다. 프랑스의 경우에만 한정해서 살펴보자.

말리로부터 리비아,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제국주의적 개입들, 어떤 실질적인 의미의 정치적 대표성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대통령제에 갇힌 채 국가 기관들의 권위주의적 흐름의 심화, 대중계급들을 균열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탈식민주의 시대의 이민 유입으로 만들어진 사회집단들에 대한 점증하는 인종적 구별, 저항을 쳐부수고 위계적인 수단들을 통해 대중들을 통제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의 안전판이 된 EU와 그 기구들(유럽증앙은행, 유로화, 국경통제시스템 등).

사회의 퇴행은 이들 각각의 영역에서 쌓여 왔다. 온건 르펜주의에 불과한 사르코지 집권 하에서 ‘공화국의 방어’와 프랑스의 세속주의 국가(laïcitê)라는 구호 아래 인종주의적 공격은 강화되어 왔지만 이에 맞서는 좌파들의 대응은 점점 더 후퇴하는 과정에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후퇴는 르펜주의로 가는 대로를 활짝 열어 젖혔다.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해 침묵하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아프리카 점령지들에서, 중동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는 군사적 모험이 여전히 끔직한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 속에서도 좌파들은 저항하기를 주저했다. 그리스에서의 충돌 이후에도 열정적인 친유럽주의(pro-Europeanism)적 지향이 드러났을 때도 그러했으며, 민주주의적 원리를 폐기처분하고 권위주의적 공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좌파의 대응은 전적으로 부재했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들에 대한 비난이 그 자체로 점점 더 수사적이고 대안적인 전략과 아무런 관련성도 없어져 가는 가운데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긴축재정이라는 불도저가 모든 저항은 무용하고 어떤 대안도 실행불가능하다는 관념에게 커다란 신뢰를 던져주던 바로 그 시점에 그렇게 된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 리더인 피에르 로랑, 독일 좌파당(Die Linke)의 그레고어 기지, 스페인 포데모스(Podemos)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말 많았던 지지와 함께 이루어지 치프라스의 항복은 이 급진주의에 대한 기대 수준을 극적으로 떨어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제 ‘급진적 좌파’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의 최대 기대치는 사회민주주의를 수정하는 역할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마치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 공산당과 포르투갈 사회당과 좌파블럭의 연대나 스페인의 현실 속에서 포데모스의 노선 수정처럼 말이다. 정치사회적 상황의 악화에 직면하여 보이는 무기력과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예속화(subalternisation)는, 이 점진적이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붕괴 과정의 논리적 귀결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단순히 ‘좌파의 통합’을 요구하는 정언명령에는 어떤 실천적 무기력과 공허함이 존재한다. 거의 같은 논리로 ‘새로운 68’이나 ‘위대한 사회운동’을 요청하는 마술에도 무기력과 공허함은 공히 적용된다. 만약 우리가 현재의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사회적 동원의 토대 위에 생동감 있는 대안을 구성하려는 시도들을 포함하여 최근 몇 년에 걸쳐 진행되어 왔던 정치적 재구성의 시도들이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이런 시도들이 분명히 있었음은 인정해야겠지만.

1970년대 이래로 극좌파들이 지내 온 경로들을 따라 동일한 노선을 주장하는 세력들에게도 실패라는 평가는 적용된다.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붕괴는 조직적 파편화를 야기했으며 이 조직들은 권위주의적인 신자유주의적 공격으로 인한 부식성 효과에 크게 노출되어 왔다.

스스로가 자본주의 체제에 적대적이라고 사고하는 세력들이나 좀 더 범위를 넓혀 스스로 자본주의에 적대적이라고 여기지만 좌파의 가치를 재정립하려고는 생각지 않는 구좌파들에게 있어서, ‘국민전선의 도약을 가로막자’라는 구호아래 자본주의 질서에 가장 적합한 존재인 프랑스 사회당과 연대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 순수한 자살시도일 뿐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것은 점점 더 근육질적이고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로 변모해가고 있는 사회자유주의에 대한 최후이자 최종적인 예속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자유주의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사회민주의를 일컫는다. 이론적으로는 하버마스와 앤서니 기든스류로 대표된다.-역주)

어떤 희망이 여전히 존재하다면 그것은 일상이 되어버린 끝없는 후퇴나 온건한 담론과 극적으로 단절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 희망은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재앙들에 대한 어떤 대응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시간’이 좌파에게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이며, ‘그 이상(more) 것’ 속에 취약한 가능성이나마 존재할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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