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인생 '오디션'의 또 다른 이름
    [강남의 속살-3]남 신경 안쓰고 사는게 불가능한 강남
        2012년 07월 26일 01: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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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가 자신을 40대 미혼녀, 그리고 직업은 프로그래머라고 소개하기 전에 이미 난 예상했다. 그녀가 그럴 거라고.

    w의 머리카락은 ‘샛노란 금발’이었고 등에는 ‘백 팩’을 매고 있었다. 그래, 그래 보였다. 그녀는 평범한 여자가 아닐 거 같았다.

    그녀는 남들의 기대 따위를 가볍게 무시하고 ‘빗나가는’ 여자일 것만 같았다. 그녀의 커라단 백 팩 안에는 왠지 다른 여자들이 매고 다니는 얼굴만 한 숄더백에는 없는 뭔가 대단한 게 들어있을 거 같았고, 그녀의 금발 머리 그 속에는 다른 여자들의 고만고만한 머릿속에는 없는 뭔가 ‘색다른’ 게 들어있을 것만 같았다.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요가원 회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튀는 외모의 w에 대한 ‘쑥덕쑥덕’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그 속엔 물론 나도 껴 있었다. 누군가 w의 행색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을 시작했고 모든 회원들, 직원들의 판도는 그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나는 홀로 총대를 메고 w에 대한 최초의 호감, 호기심을 지켜나갔다.

    자신에 대한 나의 충성스러운 호감을 느꼈는지 아니면 자기처럼 백 팩을 매고 다니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꼈던지 w는 점점 내가 먼저 묻지 않았던 자신의 사생활까지 오픈하며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가끔은 냠냠 맛있는 간식까지 사들고 와서 말이지…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반항적인 노란 머리에 백 팩을 매고 다니는 ‘쿨한 커리어 우먼’ w는 보이는 그 이미지대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이 먹었으니까 떠밀려가듯 하는 결혼, 난 이해가 안 가요. 나랑 잘 맞는 사람이 있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혼자 사는 게 낫죠…” 띠 동갑을 넘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가치관을 들으며 통한다고 느꼈다. 흔하지 않게 주관 있는 여자구나, 싶었고 노란 머리가 더욱 세련되게 느껴졌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 날 선언했다. “선생님, 나 오늘 수업 끝나고 선보러 가요.” 아마도 부모님의 강요, 떠밀기에 의해서였다고 생각되지만 어쨌든 그녀도 선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 그녀가 입고 온 과도하게 여성스러운 프릴 장식이 달린 꽃무늬 원피스, 그리고 요가원 오는 길에 급히 샀다는 에나멜 구두는 부모가 와서 검사할 리도 없는 선 자리에 그녀 스스로 만든 조바심의 냄새를 풍겼다.

    sbs스페셜 '짝'의 간판

    요가 강의가 끝나자 급히 탈의실로 뛰어 들어간 w, 꽃무늬 원피스에 에나멜 구두를 맞춰 신고 쑥스러운 포즈로 나왔을 때 나는 차마 ‘잘 어울린다’는 거짓말은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 여성스러운 차림에 눈에는 펄이 들어간 브라운 톤의 아이섀도우가 칠해져있었고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그녀의 ‘조급함’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어쨌든, 오케이.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선도 잘 돼서 결혼까지 골인하면 좋은 거지.

    다음 날 만난 w는 선 본 얘기는 쏙 빼고 자신이 하고 있는 해외 봉사활동에 대해서 열변을 토해냈다. 어젯밤 w의 어설픈 화장술과 불안한 마음, 내가 눈 먼 봉사도 아닌데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그녀는 계속 지루한 해외 봉사 이야기 따위로 가려보려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먼저 선수 쳤다.

    나: 어제 선 본 건 어떻게 되었어요?
    w: 그냥.. 그게…(어두워지는 표정)
    나: 왜, 마음에 안 들었어요?
    w: 돈은 좀 있는데 그만큼 나이도 좀 있고…
    나: 더 만나볼 생각은 들던가요?
    w: 근데… 그 사람이 키가 너무 작아요. 다리도 짧고…
    나: 아.
    w: 외모가 너무 아닌 거지… 내가 남자 외모를 따지는 편은 아닌데… 그래도 평균은 되야죠…
    나: 저야 그 분을 못 봤으니…
    w: 그 남자를 보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한테 관심 보이는 남자애가 한 명 있는데 그냥 그 친구랑 만나볼까, 하는.
    나: 그래요? 그게 누군데요?
    w: 전부터 봉사하면서 알았던 얜데, 얼굴도 잘 생겼고 키도 커요~! 연구원이구.(밝아지는 표정)
    나: 진작 만나보지 그랬어요?
    w: 휴. 근데 문제는, 걔가 연하예요.
    나: 아, 그래요? 그래도 뭐 크게 상관 없지 않나요?
    w: 그리고 큰 문제가 하나 더 있는데…
    나: 뭐요?
    w: 걔가… 그… 흑인이에요.
    나: 그래요? 그래도 뭐 크게 문제 될 게 있나요.
    w: 선생님… 너무 프리하시네. 내가 나이가 마흔이 넘었어요. 흑인이랑 결혼? 집에서 시켜주겠어요? 절대 불가죠. 아니, 결혼뿐이 아니라 만나는 것 자체도 사실 좀… 가족이든 친구들이든 주변에서 뭐라고들 하겠어요.
    나: 그런가요?
    w: 선생님, 몰라도 너무 모르신다.

    w와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가원 원장과 직원들은 w가 의외로 ‘생각이 제대로 박혔다’며 맞장구 쳐 주었다. 반대로 나는 의외로 ‘생각이 이상하다’며 이방인 취급을 당했고.

    결혼할 남자가 모양이 너무 빠져도 안 되고, 흑인인 건 말도 안 된다? 그렇지, 그렇지. 상식과 통념을 지키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도 동의는 한다. 하지만 노란 머리, 백 팩의 그녀에 대한 나의 기대와 환상은 하얗게 탈색되었고 지퍼가 채워진 채 영영 봉인되어 버렸다.

    남들 시선을 신경 안 쓰고 산다?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성형외과와 옷가게, 학원이 즐비한 강남이라는 동네에서, 특히나 그건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인다.

    남편감을 고를 때조차 그와 나의 성격이 맞는 지 그런 것 보다는 ‘당연히 우선적으로’ 남편감의 모양이 남들과 비교했을 때 빠지는 지, 남들 보기에 유별난 조건(연하, 유색인종)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를 ‘먼저’ 따져봐야 하는 법. 그렇게 계산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는 남들과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순진하게 받아들이기에는, 그게 폭력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이상하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압구정에서 내게 무언가 보여주기를 바라는 회원들의 기대 앞에서 언제나 괴로운 한숨을 지었다. 어디까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까. 어디까지 나를 버리고 그들을 만족시켜야 할까. 나를 버려야 하는 이유는 오직 돈이었고 명성이었다.

    조금도 나를 버리지 않고 고집하려고만 했던 시절의 나는 가난했고 외로웠지만 마음은 자유롭고 편했고- 반대로 조금씩 그들의 기대에 맞춰갔던 나는 금방 공허해졌고 소모되었지만 돈이 생겼고 인정을 받았다.

    이 갈등은 강남과 이별한 지금도, 어딜 가든 내 꽁무니에 붙은 불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내게 남은 자유를 태워버린다.

    내 미래의 남편감이라 믿는 사람과 차를 마시는 이 순간에도, w의 갈등이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날아들어 서로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새까만 단발머리, 백 팩을 맨 스물여덟의 미혼녀인 이 여자에게,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는지. 이 여자는 아직도 그 기대를 영원히 빗나가고만 싶은데.

    필자소개
    현재 요가 강사이며, '자칭 소설가, 작사가, 일러스트레이터 & 래퍼'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과 사물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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