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의 중국
    만든 12명의 사상가들
    [책소개]<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조경란/책세상)
        2015년 12월 05일 0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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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철학 하면 흔히 제자백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중국 철학과 사상의 흐름에는 과거에 기반을 둔 ‘오래된’ 사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새롭게 조우한 서구 세계와 교류하고 투쟁하면서, 또 봉건주의·사회주의·자본주의 등의 체제를 작동시킨 이념과 메커니즘에 치열하게 부딪쳐온 첨예한 ‘현대’ 사상이 있다.

    이 책은 오늘의 중국을 만든 근현대 사상의 주요 흐름과 쟁점을,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열두 명 인물의 라이벌 구도로 살펴봄으로써 근현대 중국 지식의 계보를 그리고 있다.

    이는 서구 열강으로 인해 중화제국 해체라는 공전의 위기를 맞아 중국의 지식인들이 맞닥뜨린 문제는 무엇이었고 그들은 이러한 문제와 어떻게 대결했는지, 특히 유학과 서구 근대의 조우는 서로에게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지, ‘국민국가’ 내지 ‘자본주의’라는 화두에 직면해 중국과 중국 지식인들은 어떻게 사유하고 어떻게 실천하며 고투해왔는지를 오늘의 시각에서 추적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작인《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신좌파·자유주의·신유가》에서 최근 중국 지식계의 동향을 세밀하게 분석했던 저자 조경란 교수(연세대 국학연구원)는 시야를 넓혀 20세기 중국 지식의 궤적을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이번 책에서, 중국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전통, 근대, 혁명’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두 ‘전통’과 ‘근대’ 사이에 서서 온몸으로 중국의 ‘근대화’라는 문제와 대결했으며, 그 과정에서 ‘혁명’이라는 언어를 만들어냈다. 그들에게 전통은 부정의 대상, 근대는 지향하는 목표, 혁명은 근대를 달성하는 수단이었다.

    20세기 중국은 전통, 근대, 혁명의 상호작용 속에서 ‘부강한 국민국가’라는 꿈을 실현했고, 이제 21세기의 중국은 ‘유학 다시보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중화제국을 재건하려는 ‘중국의 꿈’을 꾸고 있다.

    중국이 20세기 부강몽富强夢의 실현을 바탕으로 21세기 중국몽中國夢을 모색하고 있는 오늘, 이 책이 보여주는 20세기 중국 지식의 계보는 정치·경제·외교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중요한 파트너인 중국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넘어, 중국의 오늘을 만든 사상의 뿌리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국 주류 지식인들이 경제 발전에 도취되어 당-국가 체제에 의존적으로 복무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이 책은 근대를 넘어 21세기를 상상하는 지성적 토대로서 20세기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촉구하는 이웃나라 학자의 진심 어린 고언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담론이 유통되는 현실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경제 발전에 도취되어 20세기에 대한 반성적 사유는 주류 지식인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은 무매개적인 복귀처가 된 듯하고, 근대와 혁명은 그 안에 들어 있던 해방의 측면과 이상주의는 거세된 채 ‘부강’으로만 수렴된 듯하다. 부강한 중국, 이제 이를 바탕으로 ‘중국몽’으로 매진하기 전에 자신의 과거를 살펴야 한다. 21세기 ‘중국몽’으로서의 인정仁政은 20세기 지식에 대한 반성에 기초해 수립되어야 한다. 20세기 중국에서 지식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악몽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근대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던질 때에만 근대를 넘어서는 21세기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_서문

    20세기 중국지식의 탄생

    시대의 혁신 사상의 혁명 ― 20세기 중국 라이벌 사상사

    이 책에서 다루는 캉유웨이, 옌푸, 량치차오, 쑨원, 루쉰, 후스, 천두슈, 리다자오, 마오쩌둥, 량수밍,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중국 근현대사의 격랑 한가운데서 중요한 문제들과 대결하며 현실에 개입했던 대표적 지식인들이다.

    저자는 이들의 삶과 사상을 인물 간 대결 구도로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각 인물이 처했던 시대 상황과 더불어 오늘의 시각에서 여전히 유효하거나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도 같이 살펴보고 있다.

    시대적 맥락을 배경으로 핵심 쟁점과 라이벌 구도를 부각하는 방식은 연대기적이고 평면적인 사상사 서술에서 벗어나 생동감 있는 서술을 가능하게 하며, 각 인물 쌍이 보여주는 사유의 부딪침과 소통을 통해 입체적인 사상사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최후의 전통 수호자 캉유웨이 vs 최초의 근대 기획자 옌푸
    입헌군주제의 주창자 량치차오 vs 공화국을 건설한 국부 쑨원

    캉유웨이와 옌푸는 중화제국의 해체를 맞아 시도했던 근대 기획의 방식에서 대비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세동점의 시기, 유교의 보전이냐 국가의 보전이냐라는 선택에 직면해 캉유웨이는 전자를, 옌푸는 후자를 택했다. 캉유웨이는 전통 사상 안에서 개혁으로 위기를 해소하려 했고, 옌푸는 육경六經의 비판을 주장하면서 서양의 지식을 근대화 수단으로 받아들이려 한 것이다.

    유교의 종교화를 통해 ‘문명 중국’을 유지.보존하려 했던 캉유웨이는 중국 근대 이행기 전통 사상의 마지막 보루이자 신사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서구적 정치체제 수립을 목표로 한 개혁 운동인 무술변법의 기획자로서 캉유웨이는 제도 개혁을 꿈꾸며 경전을 대담하게 해석했지만, 전통의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재구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즉 유교의 재해석을 통한 진보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급진주의적’ 행동가이자 ‘보수주의적’ 사상가였다.

    그리고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을 처음 번역, 소개함으로써 경전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을 상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옌푸는 100년 전 세기 전환기 중국에서 ‘천하’가 아닌 ‘국민국가’ 형성의 합리적 이유를 가장 먼저 강조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일개 국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민족주의적 결집을 역설했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진화론과 서양 근대사상에 대한 번역 작업을 통해 자기를 상대화하고 낯설게 보게 만든 것은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옌푸의 업적이다.

    량치차오와 쑨원은 체제 구상에서 각각 입헌군주제와 공화국으로 의견이 갈렸지만, 중화 개념을 민족 개념과 결부해 중화민족이라는 신념을 만들었다. 량치차오는 학술적 문화적 측면에서, 쑨원은 정치 .제도적 측면에서 역할을 분담한 셈이다.

    량치챠오와 쑨원은 유교적 세계관을 국가 창출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동양과 서양을 대립항으로 보는 인식을 바탕으로 근대를 구상했다. 이 근대 기획은 량치챠오에게서는 신민설로, 쑨원에게서는 삼민주의로 나타났는데, 여기서 공통 전제는 유교 비판과 서구 근대사상의 수용이었다.

    쑨원의 삼민주의가 훗날 유교 사상의 틀 안으로 후퇴하는 등, ‘현실’의 제약 앞에서 이들의 근대 기획은 실현 과정에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였다. “혁명과 개혁의 이상과 중국 사회 현실의 제약 앞에서 이들은 투쟁의 대상과 타협의 대상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노예성을 비판한 급진주의자 루쉰 vs 실용주의적 자유주의자 후스
    유교의 전면 비판자 천두슈 vs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리다자오

    루쉰과 후스는 전자가 봉건의 문제와 더불어 근대의 허구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중국의 미래를 사유했다면, 후자는 반봉건의 ‘자유주의 중국’이라는 방향을 비교적 뚜렷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교된다.

    후스는 근대 중국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일관성 있게 주장한 사람이다. 그런데 후스의 자유주의는 평등과 계획 경제의 요소를 수용한 사민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한편 루쉰의 일관된 관심사는 계몽과 민중(농민) 그리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민중의 각성이야말로 중국 변화의 최대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루쉰은 근대성을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았으며 전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계몽의 대상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에게 저항하는 이중의 위치를 설정함으로써 근대적 지식인의 경계에 갇히지 않았던 루쉰의 글쓰기에도 부정의 부정이 들어 있다. 루쉰은 인간과 역사를 마음 깊이 회의했으며, 한편으로는 힘의 강약에 대한 원천적 해소라는 평등주의적 이상주의를 지향했다.

    천두슈와 리다자오는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중국 공산당 창당 시기에 쌍벽을 이루며 활동했는데, 전통과 사회주의 해석에서는 입장이 뚜렷하게 갈린다. 중국 근대의 문화혁명과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천두슈는 중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전통적 가치 체계를 혁신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뿌리내려야 한다고 믿었다.

    리다자오는 천두슈와 달리 혁명적 자율성과 민족주의적 동기를 강조함으로써 마오쩌둥에게 사상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여기서 혁명적 자율성이란 중국의 후진성이야말로 혁명을 추진하는 동력이 된다고 보는 관점인데, 이러한 견해가 중국 혁명에 긍정적 요소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사상에 대한 좀 더 폭넓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계급 중국’을 꿈꾼 마오쩌둥 vs ‘윤리 중국’을 구상한 량수밍
    현대의 제갈량 저우언라이 vs 중국을 다시 일으킨 부도옹 덩샤오핑

    마오쩌둥과 량수밍은 ‘계급 중국’과 ‘윤리 중국’이라는 중국 구상에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하여 계급에 입각해 중국을 변화시키려 했고, 량수밍은 유교에 기초한 윤리 본위 사회의 성숙을 고민했다.

    약 반세기 동안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전체를 좌우했고 사후에도 중국 국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마오쩌둥은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곧 중국 사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 직결되는 인물이다.

    마오쩌둥이 구상한 ‘계급 중국’에는 중국이 제국주의와 봉건 권력에 둘러싸여 있다는 문제의식을 안고 혁명을 꿈꾼 마오쩌둥의 이상이 담겨 있다. 그의 ‘계급 중국’은 국민보다는 계급 개념으로서의 ‘인민’을 주권자로 하는 국민국가 형성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최후의 유자儒者’라 불리며 진영에 갇하지 않는 독립적 지식인으로서 삶으로 자신의 학문을 실천했던 량수밍은 마오의 독재가 극심하던 시기에 공개적으로 그를 비판한 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중국의 사회주의를 전망하면서 향촌건설론을 구상한 점에서 마오쩌둥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교라는 습속과 중국을 분리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보고 유교에 기초한 윤리 중국에 주목했다. 량수밍이 제기한 윤리 본위 사회는 유교를 맹목적으로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전통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의 바탕 위에서 미래를 기획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중국 현대사에서 제갈량과 부도옹으로 표상되는 인물들로, 라이벌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보완하는 특수한 관계이다.

    ‘개혁개방의 설계자’이자 ‘톈안먼의 도살자’라는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생산관계론에 맞서는 생산력주의, 문화대혁명 부정,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을 토대로 한 개혁개방 정책, 전쟁 불가피론의 포기, 4대 현대화 노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노선 중시 등의 새로운 사고를 보여주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돌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그는 약 30년 동안 지속되었던 마오쩌둥 노선의 지나침을 바로잡는 동시에 마오가 포기했던 ‘신민주주의’ 노선을 회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덩샤오핑은 ‘혁명을 혁명한’ 인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혁명과 중국 정치의 산 증인으로서 ‘인민의 총리’로 불리며 국민들에게 사랑받은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 정권을 덩샤오핑 정권으로 연결하여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교량 역할을 했다. 만일 그가 오랜 세월 2인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잇는 조정자 역할을 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와 같은 중국의 번영이 보장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저자에 따르면, 저우언라이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도덕적 힘’이 크게 작용했다. 계급 안팎을 넘나드는 타자성과 관용의 정신, 청렴성으로 대표되는 모럴로서의 도덕, 환대의 철학을 구현함으로써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의 경직성을 보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우언라이야말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실천함으로써 유가철학의 본의에 가장 충실하게 산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덩샤오핑 정권에서 ‘먼저 부자가 되라’고 하여 중국은 연평균 11퍼센트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급성장했다. 하지만 부작용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환경, 부패, 불평등 문제 등 어마어마한 사회적 대가를 치르고 있다.

    조금 과장하면 사회주의 시대에 없애려 했던 전근대적인 3대 차별이 더 심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중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중국 사회의 계층과 계층을 단절시킬 정도로 극심하다. ‘혁명의 혁명’을 다시 혁명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중국 사회에 맞는 체제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쉽사리 말하기 힘들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지금의 ‘사회주의 체제’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몇백 년 동안 없어질 것 같지 않았던 변발과 전족이 단 10~20년 사이에 사라진 것처럼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정치도 역사 앞에서는 무력하다. 서양은 종교가 있지만 동양은 역사가 있다.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포폄 의식, 민이民彝가 죽지 않았다면 이 또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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