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플파워과 선거보이콧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⑩
        2015년 12월 04일 09: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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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6장 선거 보이콧과 반독재전선

    필리핀 공산당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1978년의 선거 보이콧 방침의 거부로 인해 해산되는 한편, 간부들은 “재교육”을 받거나 게릴라부대에서의 “대중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지방으로 하방되었다. 이 징계 처분에는 소위 “주동자”에 대한 1년에서 5년간의 정권처분도 수반되었다.

    선거 보이콧 vs 선거전 참가를 둘러싼 논쟁은 1978년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당 중집위 사이의 논쟁의 형태로 혁명운동 내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1986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 다시 「보이콧 노선」이 그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1978년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악영향을 혁명운동에 미쳤다는 것이 나중에 분명해진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논쟁은 당이 부르주아 선거를 보이콧할 것인가 아니면 선거전에 참가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머물렀던 게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적확하게 지적한다면, 혁명 세력의 전진과 승리까지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전술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광범위한 반독재전선, 즉 가능한 모든 투쟁수단을 동원하여 독재정치를 타도하기 위해 서로 결이 다른 계급과 정치 블록을 묶어내는 연합체를 만들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이것은 반독재투쟁에 있어 필리핀 공산당이 반복해서 묵살한 문제였다. 이 문제의 배후에는, 당이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과 선거연합을 형성하거나 또는 부르주아 선거에서 그들을 지원할 것인가? 라고 하는 문제가 있었다.

    당 지도부는 당이 자유주의 부르주아(당이 싸잡아서 “반 마르코스 반동분자”라고 지칭한 엘리트층과 개인들)와 연합을 한다거나 한 발 더 나아가 선거에서 그들을 지원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이 1978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라반의 후보자를 내팽개친 것이나 1986년 2월의 총선거에서 니노이 아키노의 미망인 코라손 아키노와의 연합에 가세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레닌은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에서 선거에서의 연대를 포함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와의 동맹전술의 필요성을 명확히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전술은 보다 더 반동적인 상대를 타도하고 계급투쟁을 전진시켜내는 동시에 대중들에게 자유주의자들의 파탄을 폭로해 내는 것을 노리고 있다. 이것은 대중을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당이 취해야 할 전술적 책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적 책략은 대단히 복잡해 「장기인민전쟁」이라는 단순명쾌한 마오주의의 전술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실행도 까다롭다. 그러나 전술적 복잡함은 단순히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무장투쟁을 위한 통일전선만이…

    당이 광범위한 반독재전선의 구축을 거부한 것은, 반독재투쟁의 전 과정에서 노정한 당의 오류 중 하나였다. 독재 타도라는 목표를 향한 전술적 동맹을 “개량주의자”의 제안으로 폄하해버리는 극좌적 사고가 당으로 하여금 그것을 거부하게 한 것이다.

    반면에 당 지도부는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만이 동맹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고방식은 게릴라전을 지고지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당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거기에는 게릴라전이라는 군사전술 외에 다른 전술은 있을 수 없고, 인민 지구전 전략 외에 다른 전략 또한 있을 수 없었다.

    선거 캠페인 중, 라반의 집회에 수천 여명의 군중들이 모인다거나, 1978년 국회의원 선거 전야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사운드 데모에 참가한 것에 대해 당은 “개량주의”, 또는 단순한 “반 마르코스 반동세력”의 지지자들에 불과한 것으로 과소평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필리핀 공산당은 도시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투쟁의 현실에 대해 외면한 채 산촌지역의 당 독자적인 무장투쟁을 거기에 대치시켜버린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대중들이 반독재투쟁에 있어 부르주아 정치가들에게 기대를 품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해 우리는 대중들 속으로 들어갔어야만 했다. 대중은 스스로의 눈앞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약점이 폭로되는 실천적 경험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동요나 기회주의적 행태를 드러나게 함으로써 혁명진영의 불굴의 의지와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또 혁명적 프로그램의 철두철미함과 광범위함에 비해 부르주아 계급의 반독재 프로그램의 빈약함을 폭로하는 데 있어 전술적인 동맹 이상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 것일까?

    레닌에 의하면 이러한 동맹을 맺을 때 공산주의자에 있어 유일한 전제는 선전 선동과 정치활동의 완전한 자유의 보장이다. 언제 어떤 상황 하에서도 혁명가의 독립성과 이니셔티브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 즉 스스로의 계급적 입장을 관철시키고 혁명적 강령을 실행하는 독립성과 투쟁의 전 과정에서 부르주아의 동요를 폭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이니셔티브를 쥐는 것을 말한다. 당은 1983년 니노이 아키노가 암살당했을 때에도 대중운동이 고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자유주의자나 반마르코스 부르주아들과의 반독재전선 구축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과오의 반복

    1978년 필리핀 공산당의 선거전 보이콧 방침은 8년 후에 다시 반복됐다. 1986년 2월의 선거에서도 당 지도부는 똑같은 주장을 폈다. 1978년과 비교해 1986년의 보이콧은 보다 더 처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의해 혁명적 운동은 반독재투쟁의 절정기에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길을 자초했다.

    선거의 전 과정을 통해 필요했던 것은 투쟁을 혁명적인 결말로 이끌기 위해 고양된 대중투쟁의 헤게머니를 잡을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었다. 이미 1983년 니노이 아키노의 암살 때 당은 이 임무를 포기하고 싸우지 않음으로써 투쟁의 주도권을 자유주의 부르주아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 결과 반독재 엘리트층의 부르주아 대표들이 투쟁을 개량주의적 결말로 이끄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 안 좋았던 것은 그 결과가 최종적으로 반혁명적인 것, 즉 계엄령 시행 이전의 엘리트 체제로의 회귀로 귀결됨으로써 혁명적 운동이 지향하는 진보적인 변혁에 역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선거전 참가 방침을 취했더라면 달라질 수도 있었던 1986년의 혁명적 승리의 가능성은 이러한 당의 태도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83년 이후 반독재투쟁의 주도권은 코리 아키노와 그 수하의 부르주아 엘리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필리핀 전체가 독재 vs 반독재의 양 진영으로 나뉘어졌을 때조차 당은 노동조합 조직국에 대해 반독재 캠페인이 아니라 임금인상 총파업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지침을 내렸다.

    필리핀 공산당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진정한” 반독재투쟁은 농촌이나 산촌에서의 무장투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경제투쟁을 추진하고 학생들은 반미 기지투쟁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도시부가 “색종이 꽃가루 축제”에 들떠 있는 동안 농촌과 산촌에서는 게릴라전이 격렬하게 전개되어 봉기에 이르는 힘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부의 투쟁은 무장투쟁에 비하면 순전히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우선 농촌과 산촌을 장악하고, 다음으로 마닐라 수도권 주변 도시를 장악한 후 최종 단계에서 게릴라부대가 말라카냥 궁으로 진격해 권력을 장악할 때 비로소 무장투쟁의 전략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1986년의 선거전, 그리고 그에 이은 2월 22일~25일의 대중 반란에 조금이라도 당이 관여했다면 엣사(Edsa)혁명에 “프로레타리아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노동자계급이 대중들 가운데서 정치적 ·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해 코리 아키노 정부의 친엘리트적 체질을 폭로해내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이 개입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뒤늦게야 겨우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계획되었지만, 미국이 마르코스 일족을 하와이로 망명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그 결과, 노동자계급에 영도되는 혁명적 고양의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코리 아키노가 정권을 잡자 「피플 파워」는 신속히 해체되었고 이른바 엣사 혁명의 약속은 잊혀지고 말았다.

    이후 아키노 정권 내의 좌파 성향의 각료는 한 사람 한 사람씩 교체되어 결국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코리 아키노는 점점 더 우회전의 깜빡이를 켰고, 부르주아 계급 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인 제국주의 성향의 조언자나 지지자가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게 되었다.

    아키노가 필리핀 공산당, 신인민군, 민족민주전선(NDF)에 창끝을 겨눴을 때, 필리핀 공산당은 아키노가 결국 본색을 드러냈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문제는 필리핀 공산당이 아키노의 “본색”을 알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대중의 편”이라고 하는 아키노의 겉모습을 대중들이 간파하고 혁명적 투쟁을 지속하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다. 대중을 혁명으로 이끄는 것은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코리 아키노 정권이 극우세력이나 군에 의해 되풀이되는 구테타에 휘말리자 1980년대 후반에는 아키노 정권을 지지하는 “황색 세력”이라고 불린 몇 개인가의 그룹에 의한 자연발생적인 행동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사태에 개입하려 하지도 않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 무렵, 1987년에 재건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러시아의 케렌스키 체제에 반대해 일어난 코르닐료프 장군의 반란과 현재의 필리핀 상황을 비교해 “개입”의 필요성에 관한 문제제기를 했다. 코르닐료프 장군이 1917년 2월 혁명에서 러시아의 임시정부 수반이 된 알렉산더 케렌스키로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군대를 결집시켰을 때, 레닌이 제창한 전술은 코르닐료프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었다.

    레닌은 볼셰비키와 대중들에게 결집하여 코르닐료프의 군대에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그것은 케렌스키 체제를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2월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노동자계급과 대중을 다시 한 번 혁명투쟁─그것은 10월에 일어났다─에 배치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술은 볼셰비키에 유리한 방향으로 역관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공산당 지도부의 사고에는 이런 전술변경은 있을 수 없었다. 아니, 다른 어떠한 변경도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회로 속에 전진하는 유일의 방법은 인민 지구전이라고 하는 “빛나는 길”을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제17장 천당에서 지옥으로

    1986년 2월 22일~25일, 필리핀에서 피플파워 혁명이 일어났을 때, 나는 서베를린에 있었다. 곤경에 빠진 필리핀 노동조합에 대한 연대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유럽을 순방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시아 워커스 링크스」와 그 산하의 급진적 노조의 초대로 동남아 각국을 방문한 것이 1984년이었는데, 그 이후 나는 KMU〔필리핀 공산당 계열의 내셔널센터〕의 국제관계 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페낭에서의 회의 참가에 이어 방콕, 싱가폴, 자카르타에 들러 우호적인 노동조합을 방문했다.

    나는 이 순방을 통해 필리핀의 좌익 운동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은 이미 옛날에 괴멸되어 버렸거나 아니면 정부에 의한 혹독한 탄압, 혹은 혁명 집단의 과오에 의해 파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가장 현저한 예가 1975년의 캄보디아 폴포트의 공포정치이고, 태국 오지에서 게릴라 집단이 보여준 스탈린주의적인 군대형 공산주의이며, 그리고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수카르노 및 인도네시아 군부와 맺은 동맹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처참한 동맹은 1965년 백만 명 가까운 공산주의자의 살해로 귀결되었다.

    연대를 추구해 유럽으로

    유럽 순방은 1985년 가을에 시작됐다. 8개국을 돌며 KMU와의 연대를 요청하고 런던에서 필리핀 노동운동과의 연대를 위한 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저 격동의 시기에 나는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를 돌아다녔다. 동행한 또 다른 동지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스위스를 방문했다. 런던에서 열린 회의는 마르코스에 의한 노동자의 살해나 노동조합권에 대한 침해에 반대해 유럽 노동조합들과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중심과제가 되었다.

    이때의 유럽 방문은 필리핀을 지원하는 여러 단체들의 도움에 의해 실현됐다. 내가 방문하지 못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도 필리핀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필리핀에서의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연대운동은 거센 기세로 확산됐다. 유럽 노동운동에 있어 필리핀의 마르코스 반독재투쟁과 연대하는 것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이나 엘살바도르의 반독재투쟁 다음 가는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유럽에서의 연대 · 지원활동의 행사에서 우리는 항상 이러한 나라의 대표자들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나는 연대활동이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우리가 물심양면으로 소중한 지원을 받을 때, 지원을 하는 상대국 단체의 멤버들도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우리의 투쟁의 경험을 알게 되는 것으로 정치교육이 될 수 있으며, 투쟁에의 결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우리를 지원한 많은 외국의 단체나 협력자들을 초대해 필리핀에서 「국제연대의 길」 행사를 기획했을 때였다. 참가자들로부터 회의 참가만이 아니라 노동자, 빈민, 농민, 학생 나아가 당이나 신인민군과 교류했으면 한다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 외 제 3세계의 좌파들에 있어서도 필리핀 방문의 기회를 통해 자국의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여러 경험을 쌓거나 훈련을 받게 하기도 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한국 등 제 3세계 국가의 동지들이 필리핀을 방문할 수 있도록 진력했다.

    필리핀 좌파의 연대활동이 안고 있던 명백한 약점의 하나는,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지원하는 캠페인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자신들의 투쟁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팔레스티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 제국주의적 정부나 억압적 국가체제에 의해 착취되고 탄압받는 사람들과의 투쟁을 더 지원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피플파워

    1986년 필리핀 피플파워(사진=위키피디아)

    1986년 대통령선거

    마르코스는 미국 정부의 압력과 필리핀 내 반독재투쟁 고양으로 인한 압력에 못 이겨 1986년 2월에 대통령선거를 조기에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그 때 나는 스페인에 있었다. 코리 아키노는 반독재운동의 제 단체로부터 추대되어 반마르코스 통일후보로써 대통령에 출마하게 되었다. 항상 그랬듯이 필리핀 공산당은 대통령선거가 단순한 “반동진영 내부의 권력분점”에 지나지 않는다며 선거보이콧을 주장했다.

    나는 유럽 순방 중 필리핀 공산당의 선거보이콧 방침에 대해 동행한 동지와 여러 차례 토론했다. 나는 선거보이콧 방침은 찬성할 수 없으며 해외의 노동조합을 방문했을 때 그 동지들에게 보이콧 방침을 옹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동지와의 장시간의 토론 결과, 당의 방침이 옳던 그르던 간에 우리는 당 간부로써 필리핀 공산당의 방침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질문을 받으면 침묵하겠다고 말했다.

    베를린의 딜레마

    내가 피플파워 혁명의 과정을 상세하게 살펴 본 것은 베를린에서였다. 여러 차례 열린 독일 노동조합들과의 회의에서 독일 노동조합의 리더들은 우리 대표단에게 피플파워 혁명의 최신 정보에 대해 잇달아 질문을 해왔다. 2월의 베를린은 눈이 내리고 있었으나 피플파워 혁명의 파고는 우리의 영혼을 뜨겁게 달구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포포이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이 때 포포이는 마닐라에 있으면서 당의 월간지 『앙 바얀』에 기사를 쓰거나 필리핀에서 가장 큰 어떤 대중조직 내에서 프락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는 피플파워 혁명으로 민중의 기세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이 농성하는 두 군데의 군 주둔지에 수십만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던 때였다. 필리핀공산당의 외곽 대중 조직(이른바 「민족민주연합」 또는 「NATDEM」이라고 불린)이 뒤늦게 반독재투쟁에 합류하려 했지만 엘리트층 내의 반대파와 사회민주주의자는 물론 「민족민주연합」의 대통령선거 보이콧 방침에 분노한 다른 대중조직들로부터도 거부당하고 있었다.

    포포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리핀 공산당은 보이콧 노선을 택하면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해 결정적 국면에서 광범위한 반독재투쟁의 선두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져버렸다. 그러나 만약 당의 힘이 온존되고 강고한 기반이 어느 정도 유지된다면 우리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먼저 지방의 당 지지기반을 총동원해 마르코스의 수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지방정부 조직을 포위해 피플파워 혁명을 확대, 심화시킨다. 그리고 기회를 엿봐 시청을 점거하고 인민평의회를 설치한다. 이 지방에서의 반란을 지원하고 보위하기 위해서는 신인민군의 힘이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포포이의 생각은 대담한 것이었지만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는 급진적인 공산당계의 세력이 여타 세력들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포이의 생각은 광야의 외로운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당 내에서 이것을 실천할 조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1986년 3월에 마닐라로 돌아왔다.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에서 필리핀 항공의 탑승을 기다리고 있던 필리핀 사람들은 들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피플파워 혁명과 혁명 후 필리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13시간의 비행 끝에 비행기가 마닐라 국제공항에 착륙하자 기내에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은 그 노래의 시작을 듣는 순간 박수갈채를 터뜨렸다. 그 노래는 집회 중 불려지던 유명한 반독재투쟁의 노래, 「바얀 코」 (Bayan Ko)〔「나의 조국」이란 뜻의 민중가요. 「아낙」을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필리핀 가수 프레디 아길라가 만든 곡으로 피플파워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필리핀의 「아침이슬」 또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할 수 있겠다〕였다.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비행기 안의 승객들이 감격과 환희에 젖어있던 것과는 반대로 우리 동지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이 선거보이콧을 결정한 데다 반독재연합을 결성하는 것을 둘러싸고 분파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반독재연합은 「바얀」(신애국동맹)이라고 명명되었고, 광범위한 전선체를 만들기 위해 1985년에 시도되었다. 그러나 필리핀 공산당은 유연함을 보이지 못한 채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 했고, 이에 반발하는 사회민주주의 세력 등이 대회장에서 퇴장해 「반딜라」라는 별도의 조직을 결성했다. 공산당과 그 외곽조직인 민족민주전선(NDF) 관련 세력만 대회장에 남아 바얀의 대회를 속행했다.

    과오를 인정하고

    필리핀 공산당의 과오는 많은 사람들을 비참한 결과로 몰아넣었다. 다른 반독재 단체들로부터는 물론, 당의 외곽조직인 「민족민주연합」(NATDEM)이 대선을 보이콧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중간층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당은 고립되고 말았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민족민주연합」이 정권과의 대결과 투쟁으로부터 도망친 것으로 비춰졌다. 선거전 참가는 코라손 아키노를 권력의 자리에 앉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거전을 통해 반 마르코스 세력의 사기를 높이고 국내의 대중투쟁을 구축해나가는 토대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6년의 논쟁에 대한 재검토와 철저한 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당은 이에 화답해야 했다. 새롭게 결성된 필리핀 공산당 전국도시위원회(NUC)는 『프락티카』(Praktika)라고 하는 잡지를 발행하고 당의 보이콧 방침에 대한 찬반 양론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윽고 보이콧 방침은 전술적 과오로 인정되어 1986년의 평가는 뒤집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의 당 의장대행 로돌포 살라스(별명; 빌록)는 사임에 몰리게 된다.

    나중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빌록은 1986년 방침을 둘러싼 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3대2라는 과반수를 겨우 넘기는 표결 결과를 가지고 보이콧 방침을 결정한 것이었다. 겨우 5명으로 구성되는 당 중집이라는 소수의 단위에서 역사적인 방침을 결정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당 중앙위원회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모이는 회의에서 결정해야만 했다고 동지들은 입을 모았다.

    1986년 메이데이

    피플파워 혁명 후 고양된 운동의 분위기를 상징한 것은 루네타(Luneta)에서 열린 메이데이집회였다. 필리핀 노동운동 사상 가장 많은 노동자가 참가해 10만 명을 넘는 사람들이 루네타의 키리노 경기장에 운집했다. 행사는 LACC라고 하는 대부분의 노동단체를 망라한 연합체가 조직했다. 이 연합체는 우파인 「필리핀 노동조합회의」로부터 중도계의 「자유노동자연합」, 그리고 좌파의 KMU까지 다 포괄하고 있었다.

    LACC는 당시의 노동부장관 아우구스토 산체스가 고안한 것이었다. 산체스는 탁월한 인권변호사이면서 반마르코스 투쟁에 있어 코리 아키노의 충실한 지지자였다. 산체스가 노동부장관에 임명된 것에 대해 공산당 동지들은 환영했다. 진보적 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노동부장관의 임명은 필리핀 노동운동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코리 아키노는 루네타 경기장에 헬기를 타고 착륙하는 드라마틱한 연출을 통해 등장했다. 코리 아키노가 노동문제에 관해 잇단 방침을 발표할 때마다 박수와 환호로 인해 연설이 중단됐다. 노동법의 개정이나 노동자들의 복리후생 개선 등의 방침이 발표됐다. 과격파까지도 포함된 노동자들과 코리의 밀월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밀월은 2, 3년도 못가 끝나게 된다.

    쿠데타, 그리고 타협

    코리 아키노 정권은 코리의 실각과 마르코스의 복귀를 노린 일련의 쿠데타에 직면하게 되었다. 코리가 공산당의 외곽조직인 민족민주전선(NDF)과 평화회담을 한 지 며칠 후, 최초의 쿠데타가 발발했다. 마르코스의 대통령 복귀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마르코스의 부통령이었던 알투로 토렌티노를 대통령 대행으로 앉히려는 목적으로 시도된 구테타였다.

    1986년 7월 6일, 알투로 토렌티노는 자칭 「마르코스 친위대」라는 수백여 명의 시민과, 적색과 청색의 리본을 총구에 매단 M-16으로 무장한 병사 약 300여명을 끌고 마닐라호텔을 점거한 후, 필리핀 대통령 대행에 취임한다고 선언했다.

    토렌티노는 하와이에 망명중인 마르코스의 명령에 의해 움직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토렌티노의 어설픈 모험은 실패로 끝났다. 허접한 쿠데타에 대해 대중은커녕 군부조차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다. 7월 8일, 38시간의 공방 끝에 쿠데타 참가자들이 항복함으로써 토렌티노의 쿠데타는 막을 내렸다.

    다음 쿠데타 계획은 “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Queen)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것은 여왕(코리)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퇴진시키거나 무력화시켜 정권 내 군부의 지위를 상승시키려고 한 시도였다. 쿠데타는 국방성 내에서 은밀히 계획되어 마르코스 시대의 전 국방장관 후안 엔릴레가 주도했고 육해공군의 다수 장성들이 지지했다.

    쿠데타의 D-데이는 1986년 11월 11일로, 코리가 공식방문차 일본에 도착한 수 시간 후로 계획되었다. 코리 정권 내의 좌파를 축출하고 「자유헌법」을 폐지해 마르코스 시대의 계엄령 헌법으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나아가 3월 25일의 혁명정권 선언에 의해 코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권한의 폐지 등이 도모됐다.

    이 모의는 실제로 일어난 쿠데타보다도 음험했다. 코리 정권 내부나 주변의 좌파세력에 대해 “외과수술”을 가해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외과수술의 일환으로 좌파 성향의 고관에 대한 암살이 모의되었다. 노동장관 산체스, 대통령 고문 르네 사귀삭과 후루헨시오 팍토란, 대통령 비서실장 죠커 아로요, 그리고 노동조합 지도자인 로란도 올라리아와 전 신인민군 사령관 베르나베 부스케이노 등의 좌파 인사들이 암살의 타깃이 되었다.

    코리 아키노는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정권 전복을 노린 “자칭 구세주”들을 심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의 음모에 관계된 자들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2~3일 지나 코리가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소름끼치는 뉴스가 날아 들어왔다. 동지 로란도 올라리아와 그의 운전사 레오놀 알라이아이의 시신이 안티폴로의 풀밭에서 발견됐다는 뉴스였다. 시신에는 고문을 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로란도 올라리아의 암살

    1986년 11월 13일, KMU의 의장인 올라리아와 운전사 알라이아이는 파식 시에 있는 「아지노모토」사에서 행해진 노조 간부들과 경영진들과의 교섭을 끝내고 나온 후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었다. 고(故) 버트 올라리아 동지의 아들인 로란도 올라리아는 부친의 뒤를 이어 KMU 및 전국노동조합연합(NAFLU)의 의장이 되었다. 두 사람의 시신은 다음 날 발견됐다. 몸에는 6군데의 자상(刺傷)이 있었다. 신문지가 입 안에 쑤셔 넣어져 있었고, 손은 벨트로 묶여져 있었다. 발견되었을 때, 올라리아의 손은 주먹을 쥔 채였다.

    11월 14일, 나는 에르난데스 재단이 발행하고 있던 노동자 대상 신문 『바기스』 사무실에 있었다. 거기서 나는 로란도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바기스』의 스탭은 KMU와 그 산하 노동조합들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사무실에 무선 장치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우리는 무선을 사용해 로란도 올라리아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노조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독자의 무선주파수를 갖고 있지 않아서 다른 사용자들에게 로란도 수색을 위해 우리와의 무선연락을 우선해 주기를 요청했다.

    잠시 후 한 무선 유저가 안티폴로에서 신원불명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무선 교신이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로란도의 가족에게 연락해 동지들과 함께 안티폴로에 가보라고 했다.

    부인과 아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로란도와 알라이아이의 시신은 이미 시체안치소에 옮겨져 있었다. 경찰은 이 비열한 범죄에 대한 단서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 음모와 관련된 사건임이 분명했다.

    12시간이나 계속된 로란도의 장례에는 60만을 넘는 노동자와 민중들이 참가했다. 필리핀 전국에서 217개의 기업이 조업을 중단했다. 며칠 후인 11월 23일, 코리 아키노 대통령은 두 가지의 수단으로 쿠데타 계획을 격퇴시켰다. 후안 엔릴레 국방장관을 해임하는 동시에 25명의 각료들로 구성되는 내각을 공식적으로 해산해 심기일전을 꾀했다. 코리는 새로운 국방장관에 라파엘 일레토 장군을 임명했다. 또 군부와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빨갱이” 노동장관 산체스를 교체하고 프랭클린 드릴론을 임명했다.

    밀월의 종료와「멘디올라 학살」

    이때부터 진보세력과 코리 아키노의 밀월은 서서히 붕괴되어 갔다. 군부와 재계는 코리를 힘으로 위협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고, 코리는 군부와 재계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이렇게 코리와 진보 진영과의 짧은 밀월이 끝났다.

    이듬해인 1987년 1월 22일, 「멘디올라 학살」 사건이 발발했다. 중부 루손의 농민 6,000여명이 「필리핀 농민운동」이라는 단체의 주도하에 집회를 개최해 말라카냥궁 근처 멘디올라 다리까지 행진하며 정부에 대해 토지개혁을 요구했다. 농민들이 코리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다리를 건너려고 하자 군이 발포했다. 군은 도망치는 시위대에까지 발포를 했다. TV에는 저격병들이 시위대를 조준해 발포하는 장면이 방영됐다.

    이 시위로 16명이 살해되고 6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날 밤 코리 아키노가 대통령궁 안에 있는 교회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를 올렸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코리는 이 학살사건의 조사를 명령했지만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학살 책임자가 처벌받는 일도 없었다.

    린 알레한드로의 암살

    로란도가 살해당한 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사이에 또 한 사람의 좌파 지도자가 암살되었다. 린 알레한드로는 「바얀」〔신애국동맹 ; 1985년 결성된 반독재 전선조직〕의 의장이자 필리핀 대학의 유명한 학생 지도자였다. 1987년 9월 19일 오후, 케손시에 있는 바얀 본부에 돌아오는 길에 잠복 중이던 괴한들에게 총격을 받아 차 안에서 살해됐다. 1986년 11월 로란도의 살해와 이듬 해 1987년 1월 멘디올라 농민대학살에 이은 린 알레한드로의 암살은 진보진영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린의 장례식 역시 지지자들이 많이 몰려들어 로란도의 장례와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장례식은 모뉴멘트 사거리를 출발점으로 칼루칸, 말라본을 거쳐 나보타스까지 이어져 그곳에 린의 시신은 매장됐다. 나는 고향에서 행해진 장례행렬에 참가했다. 오랜만에 가보는 그리운 곳으로 행진 중에는 옛 동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푸르덴테와 부스케이노에 대한 암살 시도

    좌파에 대한 공격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87년 11월 11일, 필리핀 공예대학(PUP)의 학장 네메시오 푸르덴테와 전 신인민군 사령관 베르나베 부스케이노, 그리고 젊은 문화활동가 엠마뉴엘 산체스 등 3명을 태운 차가 마닐라의 산타 메사에서 정체불명의 집단에 의해 총격을 받았다. 차가 필리핀 공예대학의 구내를 나와 큰 길에 면한 좁은 골목을 달리고 있을 즈음 수명의 괴한들이 사방팔방에서 총격을 가했다.

    산체스는 사망하고 푸르덴테와 부스케이노는 부상당했다. 부스케이노는 총탄을 맞아 부상당한 채 도망치는 도중에 습격자들이 던진 수류탄 파편을 맞아 또 다시 부상을 입었다. 지금도 부스케이노의 등에는 그 때의 파편 3개가 남아 있다.

    괴한들은 코리 아키노 정권의 전복을 노린 음모 관계자들로, 좌익 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이른바 “외과 수술”을 꾀한 자들, 그리고 올라리아와 알레한드로의 살해에 관여한 자들로 추정됐다. 그러나 이전의 살해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푸르덴테의 차를 습격한 범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네메시오 푸르덴테는 1970년대의 유명한 좌파지식인으로, 그 당시 필리핀 공예대학은 필리핀 상과대학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1987년의 습격 때 살해를 피한 후에도 집요한 암살 기도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1988년 1월 30일, 차를 타고 대학으로 향하던 푸르덴테는 다시 또 잠복 중이던 괴한들의 공격을 받았다. 푸르덴테의 보위를 위해 앞 차에 타고 있던 3명의 보디가드가 살해되었지만, 푸르덴테는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나는 푸르덴테의 최초의 습격 사건 때 살해된 엠마뉴엘 산체스와는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1977년의 그 사건 전에 나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선전 · 문화부에서 짧은 기간 동안 엠마뉴엘과 함께 활동했다. 그는 아주 밝은 청년이었다. 힘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하는 스타일로 항상 운동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곤 했다. 또 당의 문화 활동의 범위를 무대나 영화, 록밴드 등의 새로운 분야에까지 그 지평을 넓혀나가려 시도했다. 그것은 나에게는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면서 그의 활동 스타일이나 활력에 감동을 받았다. 그의 넘치는 활력과 에너지로 인해 일부 동지들로부터는 자신의 일과 남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지하활동의 시대에는 “자기 일과 아닌 것을 잘 구분하는 것”이 미덕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 내에 있는 다양한 조직의 동지들과 잘 어울리면서 열정적으로 활동한 동지였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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