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대로 된
    자동차 문화의 조건
    [왼쪽에서 본 F1] 자동차 많이 생산 소비하는 사회?
        2015년 12월 02일 09:31 오전

    Print Friendly

    얼마 전 영국에서 ‘레이스 오브 챔피언스’라는 연례행사가 마무리됐습니다. 자동차나 모터스포츠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아니라면 이름이 생소한 대회였을 겁니다. F1을 비롯해 다양한 모터스포츠 리그, 시리즈 등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던 드라이버들이 모여, 국가 대항전과 개인 대항전을 펼치는 이벤트성 대회입니다.

    레이스 오브 챔피언스가 주목받은 이유는 대중적 인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반 팬’들이 모였고, 경기는 재밌었습니다. 최근 F1 그랑프리를 포함해 최고급 모터스포츠들이 재미가 없다거나 대중적 인기가 없다거나 하는 얘기가 많은데, 그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제대로 즐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잘 보여준 이벤트였습니다.

    한 달 전에는 멕시코시티에서 23년 만에 부활한 멕시코 그랑프리가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잘 모르는 분들이 많지만, 멕시코 역시 자동차를 매우 사랑하는 나라로 유명합니다. 이미 1960년대 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F1 드라이버를 배출하기도 했죠. 그런 멕시코에 F1 그랑프리가 부활하자 ‘구름 같은 관중’이 모였습니다. 근래 봐왔던 F1 그랑프리 중 이 정도로 흥했던 그랑프리가 있었나 싶습니다.

    멕시코 그랑프리 다음 대회는 상파울루에서 펼쳐진 브라질 그랑프리였습니다. 멕시코시티만큼은 아니지만, 상파울루에도 많은 관중이 모여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브라질 그랑프리를 찾은 많은 팬이 ‘자국 드라이버가 극도로 부진한데도’, ‘경기 내용이 유례없이 재미없는데도’ 끝까지 축제의 자리를 즐겼다는 점입니다. 모나코나 영국, 이탈리아처럼 유서 깊은 이벤트도 아니고, 싱가포르와 아부다비처럼 많은 투자가 이뤄진 대회가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영국의 레이스 오브 챔피언도 그렇고, 멕시코시티와 상파울루에서 보여준 F1 그랑프리의 경우도 그렇고, 모터스포츠의 불모지 그 자체인 우리나라에 사는 F1 팬의 입장에선 부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것보다 그들의 자동차를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죠. 꼭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충분히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2 (5)

    취재를 위해 코리아 그랑프리를 찾은 해외 사진 기자들

    F1 코리아 그랑프리가 펼쳐지던 시기에는 우리나라를 찾는 외신 기자나 해외 사진 기자, 혹은 해외의 모터스포츠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자동차와 모터스포츠를 정말 좋아하고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죠. 그렇게 만난 사람 중 상당수는 적어도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자동차 문화가 이리 부실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F1의 인기가 기대 이하인 것은 물론, 관심 자체가 없는 상황에 적지 않게 놀라기도 했습니다.

    F1에 관심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자동차 자체를 너무 모르고 즐기려 하지도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겁니다.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라는 ‘밖에서 보이는 수준’과 가는 길마다 차가 넘쳐나는 현실만 보면 자동차 문화가 무척이나 발달했을 법한데 말이죠. 자동차를 많이 만드는 나라, 많이 소비하는 사회라면, 관련 문화가 널리 보급될 만도 합니다. 모터스포츠는 자동차 문화의 중요한 축이고, F1은 바로 그 축의 정점에 서 있는 이벤트죠. 우리나라에선 자동차 문화가 폭넓게 자리 잡고, F1은 크게 흥행할만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자동차 문화라는 뿌리가 없다 보니, 많은 사람이 F1 그랑프리를 왜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모르고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극렬하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죠. 안타깝게도 소위 ‘진보 성향’의 사회단체들에서도 그렇게 소리를 높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누가 봐도 그럴 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자동차 문화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적어 아쉽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자동차 문화가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사회 상황의 복합적인 결과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죠.

    자동차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것은 주 소비자층인 이 나라의 노동자들이 굉장히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소득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소득 수준이 낮든 높든 여유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길 법한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유가 없다 보니 취미는 뒷전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쫓긴다는 얘기죠. 정치 사회 문제에도 눈 돌릴 틈이 없는데 취미에 투자한다는 건 만만치 않은 도전입니다. 자동차 문화를 즐기는 것이 다른 취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이고, 돈이 좀 부족하더라도, 시간에 쫓기더라도 어떻게 어떻게 대안을 찾을 수 있는 다른 취미와 달리, 자동차의 경우엔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렵습니다.

    F1 그랑프리 주말의 상황을 예로 들어 보죠.

    코리아 그랑프리는 모두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일 일정으로 진행됐습니다. 문제는 금요일 오전 10시, 첫 공식 주행에 관중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죠. 다른 나라도 금요일 오전 관중이 매우 적긴 하지만, 우리나라만큼 관중석이 완전히 텅 비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티켓을 구입한 관객이 적지 않았지만, 금요일 휴가를 내고 목요일 이전부터 써킷 주변에 도착한 경우 자체가 많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통 목요일 진행되어야 하는 드라이버 사인회 이벤트는 토요일로 조정됐습니다. 경기력에 문제를 주지 않기 위해 공식 주행이 펼쳐지는 날은 팔을 쓰지 않는 편이 좋지만, 금요일에도 오지 않는 관중이 목요일에 충분히 많이 써킷 주변에 도착했을 리가 없습니다. 멕시코나 일본 등 흥행이 잘 된다는 그랑프리의 경우를 보면 목요일에도 이미 써킷에 사람이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일요일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결승’이라는 번역으로 일요일 레이스를 홍보했지만, 문제의 레이스가 끝나기도 전에 관중석을 비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포디엄 세레머니는 모든 관중이 함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시상식 따위는 관심 없다고 빠져나가는 이들도 많았죠. 그런 사람들을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월요일) 출근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 길을 가야 하니까요.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급하게 레이스라는 극히 일부분의 이벤트만 관람한 뒤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움직인 사람들이 재미를 느낄 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TV로 보는 편이 낫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즐기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는 모터스포츠의 본질은 얘기해봐야 입만 아픕니다.

    F1 그랑프리를 제대로 관람하려면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내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 해외 자동차 문화에선 가족 전체가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낸다는 얘기죠. 자동차 문화가 잘 형성된 나라에서는 딱히 재산이 많거나 자유로운 직종을 가진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전에도 다른 칼럼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F1이나 모터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소득 수준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1 (6)

    모터스포츠 팬이 아니라면 어디 있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할 건물

    이렇게 꼬인 문제만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 2010년부터 F1 그랑프리를 개최한 것은 시기상조였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습니다. 아직은 어떤 문화를 제대로 즐기기에 사회적인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는 얘깁니다. 바꿔서 말하면 문화 상품을 제대로 소비할 여력이 없는 사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던져주는 것만 받아먹는 휘발성 문화 상품이거나 기존에 자리를 잘 잡고 이는 경우를 제외하면 새 문화 상품에는 큰 기대를 걸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니까 조금은 화도 나고,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 이 사회의 최상위층, 일등 시민만 문화 상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걸까요? 그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니까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자동차 문화를 즐기는 것, 모터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보통 소득 수준이 썩 높지 않은 노동자들이 충분히 선택할만한 취미여야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지만, 자동차 문화의 본질은 초고가의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를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름하고 다 스러져가는 차라도 많은 관심을 두고 꾸준히 돌보는 것, 나아가서 빠르지 않더라도 스포츠 드라이빙을 체험하고 그 느낌을 즐기는 것이 자동차 문화의 본질입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수준이 돼야만 운동을 즐기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애초에 엘리트 체육이란 것이 상당히 왜곡된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죠.

    제목으로 다시 돌아와서 얘기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자동차 문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노동자들이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버티고 먹고 사는 데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는 소망입니다. 어쩐지 모순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자동차 문화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입니다. 조금 비약해서 격한 표현을 끌어쓰자면 ‘노동 해방이 자동차 문화 정착의 지름길’이란 얘깁니다.

    이 정도면 F1을 좋아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조금 왼쪽으로 치우친 이들이 적지 않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