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키노 암살과
    새로운 대중 저항의 전조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⑨
        2015년 11월 27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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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장 신인민군에서의 재교육

    나는 여기저기 돌림빵을 당하는 것에 신물이 나서 삼발레스에서 함께 활동하자고 한 칼로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곧바로 삼발레스 주 최북단의 산타크루즈에 들어가 칼로이와 재회했다. 칼로이는 삼발레스의 신인민군 「강화(强化)반」 소속의 적군(赤軍)멤버가 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신인민군의 확대반에 배속되었다.

    신인민군의 두 개 반인 「확대반」과 「강화반」은 폭은 좁지만 길다란 삼발레스 주 전체를 커버할 수 있도록 서로 다른 지역을 담당했다. 칼로이를 만났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칼로이네 부대는 내가 도착한 다음 날 남부 산악지대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깐 만나 얼굴 보고 기본적인 정보 교환하는 정도 외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북부 산악지대에 한 동안 머물게 되었다.

    칼로이도 나도 게릴라 부대에서는 “일개 사병”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신인민군 참가는 “재교육”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당내의 지위는 일체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규율 위반에 대한 판결문에는 혁명 투쟁의 “주요한 형태”, 즉 무장 투쟁의 중요성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지역에 내려가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참가한 게릴라 팀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직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사실상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당의 정치 담당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부대에서 교육적인 회의를 개최하곤 했는데, 팀 리더는 언제나 당이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우리의 의견을 묻곤 했다. 우리 부대의 리더는 왜 우리가 적군의 일개 말단 병사로 와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했다.

    신인민군 NPA는 1969년에 필리핀 공산당 CPP에 의해 창설된 무장 조직으로, 구 소련파 공산당 PKP에 의해 창설된 「인민해방군(HMB)」 출신 간부 10명에 의해 창설됐다. 새로 창설된 NPA가 개척한 첫 번째 게릴라 활동지역은 타를락 주와 팡팡가 주의 오지였다. 계엄령이 포고된 후에는 “최고의 투쟁형태”에 가담하기 위해 도시를 떠난 필리핀 공산당 학생 간부들에 의해 많은 게릴라 활동지역이 개척됐다.

    루손 섬 중앙부에서 멀리 떨어진 타를락 주나 팡팡가 주에 가까운 삼발레스 주는 이러한 지역 중 하나였다. 삼발레스 주에는 필리핀 최대의 미군기지 중 하나인 수빅 해군 기지가 있어 미군이 관리, 운영하고 있었다. 올롱가포시는 삼발레스 주 최대의 도시로 연료보급과 수리를 위해 정박하는 미 함대 병사들을 위한 휴양 · 리조트지였다.

    삼발레스 주에 배속되기 전에 나는 이 주에 설립된 최초의 신인민군 부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다. 게릴라 부대의 리더 한 명이 필리핀 보안경찰대의 준(準)군사조직에 잡혀 목이 잘린 채 참수됐다. 그리고 부대 전체가 해체됐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제 3지구 출신으로 센트럴 루손의 지역위원회 간부였던 알토라는 동지로부터 들었다.

    알토는 이 잔학한 사건 후 운 좋게 삼발레스 주로부터 도망쳐 칼루칸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배속되게 된 신인민군 부대는 필리핀 공산당이 삼발레스 주에서의 게릴라전을 위해 만든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의 부대로 삼발레스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신인민군에서의 과업

    신인민군에서의 경험은 내 정치활동 중에서는 짧은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남자 4명과 여자 2명 등 6명의 동지로 구성된 작은 반에 소속되었는데, 팀원 전원이 M2 혹은 M4 라이플을 휴대했고 나는 반자동의 M2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반은 「확대반」이었기 때문에 새로 개척한 부락에 들어가 새롭게 확보한 연락원 집에 하룻밤이나 이틀 밤씩 묵곤 했다. 우리는 주로 야간에 이동했고, 낮 동안은 이런 집들에 머물면서 「대중 공작」을 하거나 총기 수입을 하기도 하고, 농민들, 또는 그 가족들과 대화하거나 했다.

    우리 팀이 서너 차례 이상 방문하여 꽤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마을에서는 그 마을의 조직화 팀 멤버와 미팅을 하거나 소집회를 개최해 마을의 문제, 특히 지대나 지주의 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문제 지주, 즉 차지농과의 계약에서 자신의 이윤을 높게 받으려는 지주의 집에 간 것도 몇 번인가 있었다. 이런 지주와 얘기할 때는 차지농이 유리하게 되는 새로운 계약을 맺도록 약간의 협박을 하기도 했다.

    다른 마을로 이동할 때는 반드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서 했다. 삼발레스 주에는 강이 많아 이동할 때마다 많은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비닐을 많이 휴대했다. 강을 건널 때, 배낭이나 라이플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싸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 의류는 빨았을 때 금방 마르는 퀵 드라이 소재를 사용했다.

    어느 날 우리는 강한 태풍을 만나 이틀 동안 어느 빈 집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에 가서 식료를 구해오려면 불어난 강을 건너야 했다. 강은 물이 불어났을 뿐 아니라 거친 격류에 휩싸여 있었다. 이 부락에서 태풍 때 강을 건너려다 죽은 사람이 적지 않다고 이 지역 출신의 신인민군 병사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강을 건너야 했다. 그 신인민군 병사가 우리 반에서 가장 수영을 잘 했기 때문에 허리에 로프를 묶어 강을 헤엄쳐 건너갔다. 로프의 다른 한 쪽을 나머지 5명의 대원들이 잡고 있었다. 그는 겨우 건너편 강기슭에 도착해 커다란 나무에 로프를 묶었다. 그리고 우리도 로프의 다른 한쪽 끝을 나무에 묶은 후 로프를 의지하여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새로운 마을을 개척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다른 마을의 연락원으로부터 친척이나 친구의 이름을 사전에 알아 두었다. 이런 연줄이 없는 마을은 우회하든가 밤을 이용해 통과하든가 했는데, 이럴 때 농가에서 놓아기르는 개들 때문에 애를 먹곤 했다.

    우리는 항상 일렬로 서서 걸었다. 마을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가야 할 경우도 있었다. 숲 속을 헤쳐 나가는 것에 익숙해지자 포장도로를 걷는 것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지면이 평평하면 평평할수록 더 천천히 걷는 것이 우리의 스타일이었다. 어느 땐가 빠른 속도로 주행하고 있던 차가 도로 한 가운데 있는 우리를 발견했다. 운전사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면서도 우리가 일렬종대로 천천히 도로를 건너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우리 팀은 군과 조우하지 않았다. 딱 한 번인가 논 가운데 있는 어느 집에 있을 때, 상공에 군용 헬기가 멈춰 서 있던 일이 있었다. 놀란 우리는 황급히 창문으로 뛰쳐나가 헬기에서 보이지 않도록 흙 언덕 아래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헬기는 떠났고 우리는 곧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죄수 몇 명이 형무소에서 탈옥해 그들을 쫓고 있던 헬기였다.

    신인민군 확대반에서의 활동이 6개월이 되어갈 무렵, 당 지도부로부터 나와 칼로이에게 팡팡가 주 앙헬레스 시의 캠프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나는 이틀 걸려 산을 넘어 고속도로 근처에 있는 어느 집에서 칼로이와 만났다. 그곳의 연락원들은 마을 내 중류 계급으로 포장도로나 고속도로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었다. 교사나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몇 명의 여성 연락원이 과자를 가지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와 환담했다. 그녀들은 신인민군의 NPA라는 머리글자를 「Nice Person Around(가까이 있는 좋은 사람)」라고 해석해 주기도 했다.

    가지고 있던 총을 팀 리더에게 맡긴 후, 칼로이와 나는 일반 복장으로 갈아입고 안내역의 병사와 함께 앙헬레스 시까지 찝차를 전세 내 타고 갔다. 앙헬레스 시 교외의 작은 마을에서 내리자 광대한 사탕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높이 솟은 사탕수수 사이 빈 공터에서 2, 3명의 동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탕수수 줄기에 매단 비닐 텐트가 있었고, 바닥도 아주 투명한 비닐 시트로 덮여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빌록이 오기를 기다렸다. 빌록은 다음 날 오후에 나타나 당 중앙집행위원회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사건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빌록은 구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 전원에게 당원자격정지 처분이 내려졌다고 선언했다. 정지 기간이 가장 긴 것이 포포이로 5년, 다음은 내가 2년, 칼로이와 기타 멤버들은 1년이었다. 내가 2년이 된 것은 당 중앙에 제출한 문서에 다른 멤버들에 비해 반성의 뜻이 적다는 이유였다. 빌록은 내가 삼발레스를 떠나 센트럴 루손의 타 지역으로 재배치될 거라고 알려주었고, 나는 잠시 더 대기해야 했다.

    고열

    다음 날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구토가 계속됐다. 지역의 농민이 나를 어떤 집으로 데려갔다. 그 집에는 노부인이 마닐라의 공장에서 일하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3일간 수발을 해 주었다. 감기일 거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럼에도 낫지 않자 나를 의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폐렴이었다.

    그 노부인은 의원 근처에 머무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나에게 말했고, 그 말에 따라 나는 고속도로 옆에 있는 집으로 옮겼다. 마을의 조직화 팀을 맡고 있는 젊은 여성 멤버가 나를 돌봐 주었고 약을 먹고 나서 2, 3일 지나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근처에서 군사 작전이 벌어지고 있다며 빌록과 연락을 취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일단 마닐라에 갔다가 다시 여기로 오겠다고 말하고 빌록이 연락할 수 있도록 마닐라의 내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마닐라에 도착한 후 나는 전에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지도부 멤버였던 찰스를 찾아 나와 같이 지방으로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는 수락했다. 1주일 후 센트럴 루손의 연락원이 와서 우리가 복귀할 때까지 체재하게 될 앙헬레스 시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다음 날 내가 찰스에게 출발이 임박했음을 알려주자 그는 자신의 여자 친구인 벨라도 함께 가고 싶어 하므로 그녀도 같이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리하여 우리들 3명은 짐을 싸서 앙헬레스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앙헬레스에서는 지프니로 갈아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전투복 차림의 군부대가 고속도로 옆에 세워둔 군용트럭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이상하게 마을 전체가 썰렁했다.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상점들이 다 닫혀 있었다. 연락원의 집을 노크하자 잠시 후 한 소년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는 집에 없고 마을 어른들은 모두가 군 트럭에 실려 군 기지로 갔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떴다. “그랬구나! 그래서 고속도로에 군 트럭이 있었구나… ” 찰스가 말했다.

    몇 개월 동안 연락원으로부터의 연락이 없었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임시지도부의 재드조차 우리가 있는 곳에 오지 않았다. 나중에야 군에서 임시지도부의 「안가」를 덮쳐 에드가 좁슨 등의 동지들이 체포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하활동으로부터의 이탈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지하운동의 선이 끊어졌다. 그로 인해 1979년 후반에서 1980년까지 아무런 일이나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나는 1980년 중반, 음료 회사인 코스모스 보틀링의 판매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노동교육센터(CLS; Center for Labor Study)라는 NGO의 지원을 받아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이 NGO는 노동문제의 조사나 조합에 대한 지원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후에 나는 이 CLS에서 노동조합에 교육자료를 제공하는 교육담당 간부가 되었다.

    CLS를 그만 둔 지 얼마 후에 공산당 전국노동조합 조직국이 접촉해 왔다. 이후 나는 「5월1일 운동」 (KMU; 공산당계 내셔널센터)과 구미 · 아시아 · 호주 등과의 국제연대활동에 관여했다. 나는 이때 이미 공개 부문의 대중운동에 꽤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다.

    제14장 고삐 풀린 백색 테러

    1970년대의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1979년 6월에 군이 에드가 좁슨 등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의 아지트를 급습해 이들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필리핀군은 1972년에서 75년 사이에만 5만 명으로 추정되는 활동가들을 체포, 투옥시켰다. 이 숫자에는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된 수많은 활동가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에 의하면 행방불명자는 계엄령 발포 이후 오늘까지 1,600명 이상을 헤아린다.

    좁슨의 체포 후, 당 중앙위원회는 「르 몽드」라는 조직을 만들어 마닐라 수도권뿐 아니라 다른 주요도시에서도 당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르 몽드」는 1973년의 당 재건 때와 마찬가지로 부문별로 당 기구를 재조직화했다. 지구 단위가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 청년 · 학생부문, 지역 조직화 등을 기반으로 하여 당 위원회가 강화되었다.

    KMU(5월1일 운동)의 결성

    1980년, 노동운동에서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메이데이 집회를 준비하기 위해 다양한 노조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모여 진보적 노동조합 연합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위원회에는 NAFLU(전국 노동조합 연맹), NFL(전국 노동연합), NFSW (전국 사탕노동자연합)와 Gatcord(의류 · 섬유 일반 노조)등이 참가했다. 위원회는 「5월1일 위원회」로 명명되었다.

    1981년에 NAFLU(전국 노동조합 연맹)의 위원장이자 필리핀 노동운동의 원로인 버트 올라리아는 「5월1일 위원회」를 노동조합의 연합조직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그 명칭을 「5월1일 운동」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KMU가 설립되었다. KMU는 1981년의 메이데이 집회를 주최했고, 아라네타 콜로세움에서의 옥내 집회에는 3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계엄령 해제의 사기극

    그 몇 개월 전인 1981년 1월 17일, 마르코스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압력을 받아 계엄령을 해제했다. 미국 정부는 경제 재건과 근대화의 기반을 위해 “정치적 정상화”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계엄령 해제는 사기였다. 마르코스의 독재적 권력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극에 불과한 계엄령 해제는 조지 W 부시 미 부통령의 필리핀 방문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다음과 같은 한심한 연설과 함께 건배를 제안하기 위해─ “우리는 당신이 민주주의의 원칙과 그 프로세스에 충실한 것에 대해 칭송하며 당신을 고립 속에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악명 높은 연설은 아버지 부시가 1981년 6월, “새로 선출된” 대통령 마르코스의 취임식에서 한 것이었다. 이 선거 역시 사기극이었고 반 마르코스 엘리트들조차도 이 선거를 보이콧했음에도 말이다.

    탄압과 학살

    1982년 8월, 고양되는 노동운동에 대해 마르코스 정권은 백색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강고한 투사, 버트 올라리아와 크리스핀 벨트랑은 군에 의해 내란죄로 체포됐다. 다른 60여명의 활동가들과 함께였다. 이미 79세인 버트는 구속 중 병에 걸려 석방 후에도 회복하지 못하고 1983년 12월 4일에 숨을 거뒀다. 벨트랑은 1984년 옥중에 있었을 때 탈옥에 성공해 도망쳤다. 벨트랑이 「KMU」(5월1일 운동)의 지도자로 다시 등장하게 되는 건 1986년이 되어서였다.

    에드가 좁슨은 형무소에서 탈옥해 민다나오에서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1982년 9월 20일, 다바오 시에 있던 안가가 군의 습격을 받아 사살됐다. 그 1년 후인 1983년 8월 21일, 베니그노 아키노(니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이 미국으로부터 필리핀에 귀국하던 중 마닐라 공항 활주로에서 사살됐다.

    아키노1

    암살 직후, 아키노의 시신을 급히 경찰 밴에 옮기는 경찰과 주변 경계 중인 군인 및 경찰.

     

    니노이 아키노의 암살

    격렬한 심장 발작을 일으킨 니노이는 1980년 5월 8일에 필리핀을 떠났다.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가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제안과, 이를 받아들이라는 의료진의 설득을 수용한 것이다. 이멜다의 제안에는 두 가지의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수술 후에는 필리핀으로 돌아올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니노이는 미국에서 이멜다의 두 번째 조건을 무시하고 필리핀의 독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했다. 운명의 8월 21일, 귀국하면 다시 체포될지도 몰랐으나 그는 이멜다가 제시한 첫 번째 조건을 지켰다. 그 결과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니노이의 장례는 케손시의 성 도밍고 교회에서 행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8월 31일, 장례 행렬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성 도밍고 교회로부터 마닐라 수도권을 거쳐 르네타 공원을 지나 유해가 매장된 팔라냐케 시의 마닐라 기념 공원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장례 행렬이 르네타 공원에 멈추었을 때, 격렬한 소나기가 퍼부었지만 연도에서 애도를 표하는 민중의 대열은 흩어지지 않았다.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연도의 군중들은 라반의 사인(엄지와 검지로 「L」자 모양을 만드는)을 만들어 보이며 “툴로이 앙 라반!”(투쟁은 끝나지 않았다!)을 외쳤다. 200만 명이 이 장례행렬에 참가했다.

    이러한 민중들의 슬픔이나 저항의 의지 표명은 TV나 라디오의 골든타임에 방영되지 않았고 신문에도 기사화되지 않았다. 오직 『위 포럼(We Forum)』 등의 대안 미디어 신문 한 두 개가 보도했을 뿐이었다. 다음 날도 연도를 가득 메운 수많은 인파에 대해 보도한 신문은 하나도 없었지만, 르네타 공원에서 장례 행렬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간 한 남성이 낙뢰로 인해 사망했다는 기사를 톱기사로 내보낸 신문이 있었다. 이 또한 기이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날의 어마어마한 군중들에 대해 보도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진정 기묘한 일이었다.

    소음 시위

    니노이의 장례 2, 3일 후, 1978년 4월 6일에 있었던 「사운드 데모」가 리바이벌되었다. 니노이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암살을 지시한 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불온한 저항의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사람들의 분노는 일제히 「사운드 데모」의 형태로 폭발했다.

    살리의 사망 후, 마닐라에 배치되어 있던 포포이는 자신의 오토바이로 우리 집에 와서 사운드 데모를 보러 가자고 제의했다. 나는 동의했다. 우리 둘 다 1978년의 동시 사운드데모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포포이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케손 시의 8단지로부터 마닐라의 에스파냐 역까지 갔다. 마닐라에서 우리 집 근처를 지나갈 무렵, 사람들은 이미 철문을 두드리는가 하면 폭죽을 터뜨리거나 냄비를 두드리면서 소음시위를 시작하고 있었다.

    엣사(Edsa) 고속도로 근처의 무뇨스 거리에서는 타이어가 불타고 있었고 사람들은 불꽃 주위로 모여들었다. 일단의 시위대가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경적을 울리도록 손짓, 몸짓으로 요구하는 한편 경적을 울리고 있는 차들에게는 더 크게 울릴 것을 호소했다. 포포이는 몇 번이나 오토바이의 클랙션을 울렸고, 뒤에 탄 나는 주먹을 쥐고 팔뚝을 흔들었다. 우리를 본 군중들은 환호하며 “라반! 라반!”을 외치면서 손뼉을 쳤다.

    에스파냐 역으로 가는 도중, 거리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가 에스파냐 역으로 이어지는 마부하이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 밤이었음에도 도로가 매우 밝은 것에 놀랐다. 그것은 가로등이 아니었다. 거리마다 화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연대의 사인을 보낼 때마다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우리가 탄 오토바이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했다. 또 우리가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부등켜안고 함께 춤을 추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말라카냥〔대통령 관저〕의 악마와 싸우기 위해 연대하고 있는 것을 알았고, 함께 마르코스 타도를 염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중들은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군중들을 선동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우리는 더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항상 그랬듯이 다음 날 신문의 톤은 달라졌다. 헤드라인을 “마닐라 약탈”로 뽑고 이멜다 소유의 아웃렛 매장인 카디와숍을 약탈하는 사람들, 뒤집힌 관용차, 부서진 가드레일과 신호등, 흐트러진 쓰레기더미 등의 사진을 대서특필했다. 또 경찰에 발포했다는 혐의로 부랑자가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는 기사, 약탈이나 경찰을 습격한 혐의로 여러 명이 체포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흥분의 나날들

    니노이의 암살에 의해 터져 나온 민중들의 항의 행동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공산당조차도 민중들의 이런 반응을 예기하지 못했다. 민중들의 반응은 집회와 시위가 이어지는 “흥분의 나날”의 막을 열어 반독재 투쟁이 급진전하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마카티의 비즈니스가는 시위의 천국이 되었다. 시위는 금융가의 직원들이나 경영자들로부터도 환영받았다. 그들은 아얄라 거리의 고층빌딩에서 노란 색종이 조각을 눈처럼 뿌리며 지지를 표명했다.

    아키노의 암살과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자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폭넓은 반독재 운동이 형성됐다. 이 운동은 즉석에서 JAJA(아키노를 위한 정의와 모든 이들을 위한 정의 운동)로 명명되었다. 지부가 마닐라 수도권과 근교도시, 거리와 마을에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져 나갔다.

    공산당의 과오

    니노이 아키노의 암살에 항의하는 대중투쟁이 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공산당은 평상시와 같은 태도를 취했고, 그 잠재적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니노이 아키노 암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청년학생 조직국은 오로지 미군기지 반대투쟁에만 힘을 쏟고 있었다. 또 당의 노동조합 조직국은 투쟁 과제를 임금인상과 노동조합의 권리에만 집중했다.

    뒤늦게 니노이 암살에 의해 끓어오른 자연발생적인 운동의 가능성에 착목한 공산당은 니노이 아키노의 미망인 코리 아키노와의 “고위급 협상”에 착수했다. 그 결과 공산당은 JAJA의 결성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분파주의”는 당이 JAJA를 활용하여 다른 정파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했다.

    공산당이 JAJA 결성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을 이용해 반 마르코스파 부르주아들이 JAJA의 전 지부를 장악해 자신들의 조직적 근거를 만들려 했다. JAJA의 지부는 마닐라 수도권에서 이 새로운 조직에 자발적으로 결집하는 프티부르주아들에 의해 잇달아 결성되고 있었다. 그 결과 코리 아키노를 지지하는 프티부르주아, 자유주의 부르주아, 기독교 성직자계층을 대표하는 “황색” 세력이 공산당과 그 외곽 조직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독자적으로 수십만 명 규모의 집회를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공산당 지도부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보면, 그들의 대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장기인민전쟁」에만 몰두해 있었다. 당 내 토론은 무장투쟁이 이미 “초기 단계”를 넘어 “전략적 방어단계”의 “발전한 유사 단계”에 진입한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혁명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닌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필리핀 공산당은 장기인민전쟁에만 집착한 나머지 마닐라 수도권에서 현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허풍”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폄하하고 있었다.

    제15 장 투사 열전 

    최고의 파르티잔 : 동지 칼로이

    칼로이의 본명은 빌라누에바(Villanueva)였다. 칼로이란 이름은 1977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당시 지하활동상의 가명이었다. 당시 그는 공산당의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역조직국의 캡으로 톤도(Tondo)나 마닐라 수도권의 빈민가에서 조직 활동을 담당했다.

    칼로이는 마르고 빈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체중이 45Kg도 안 되었을 것이다. 가슴이 아주 빈약했고, 바지는 주문해서 만들거나 부인이 칫수를 줄여 만든 옷 외에는 입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팔은 달랐다. 발달한 근육에 힘이 좋았고 팔씨름을 하면 항상 내가 지곤 했다.

    1977년에 내가 군에 의해 납치됐을 때, 나는 칼로이의 그룹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칼로이와 그들 그룹은 그 직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서둘러 도망쳐 군 수사망을 벗어났다. 지역 리더 몇 명이 이미 체포되는 바람에 군이 그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 황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길가에 면한 창가의 화분을 처리해 위험 시그널을 남기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납치와 구속으로부터 도망쳐 지하활동에 복귀한 후 나는 칼로이와 그의 처 텟사와 함께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의 지하 아지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군의 첩보 데이터를 알 수 있는 동지나 지역 사람들 얘기에 의하면 군은 칼로이 부부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당시는 칼로이 부부 외에 포포이와 그의 부인 살리도 같은 지하 아지트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그 외에 우리들 그룹을 보위하기 위해 당에서 파견된 동지도 있었다. 때때로 연락 및 기술 스텝─콤택(Comtech)이라고 불렀다─이 다른 당 조직으로부터의 멧세지를 가져다주거나 우리 멧세지를 다른 조직으로 전해주거나 했다.

    회의나 약속이 있어 나가게 될 때, 포포이에게는 반드시 이 콤택(연락 스텝)이 붙게 되어 있었다. 반면 칼로이와 나는 서로가 상대방의 주변을 살펴주고 경계해주곤 했다. 우리는 신변의 안전에 관해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경계했다. 군이 추적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여행 중에는 칼로이와 나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보이게 하려고 돗수 없는 안경을 썼다. 지프니에서 군인처럼 보이는 승객이 있으면 운전수에게 차를 멈추게 하고 얼른 내려 다른 지프니로 갈아탔다. 언젠가 몇 번씩이나 지프니를 갈아타야 했던 것에 짜증난 나는 칼로이에게 “아까 그 지프니에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녀석이 그냥 단순한 게이였다면 어떡할 건데?”라고 시빗조로 물었다. 그러자 칼로이는 “그가 게이인지 아닌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그 녀석이 너를 알고 있는 첩보부대원일수도 있잖냐?”고 반문했다.

    삼발레스 주에서 일개 적군 병사로써 단기간의 임무를 마친 후 나는 한동안 칼로이를 만나지 못했다. 1980년대 초에 내가 지하운동의 선이 끊어져 이탈되었을 때도 칼로이는 삼발레스에 남아 있었다.

    파르티잔 부대

    1985년에 나는 다시 칼로이와 만났다. 칼로이는 우리 집에 와서 당으로부터 새로운 지하활동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했다. 무슨 임무인지 물었지만 칼로이는 대답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둘만 남았을 때, 나에게만 말해 주었다. 마닐라 수도권의 무장 도시게릴라 부대를 지휘하는 임무였다. 그는 지방에서 철저하게 훈련된 게릴라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일련의 작전계획이 있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됐다”고 말했다.

    사툴 오캄포〔필리핀 공산당의 리더로 계엄령 하에 지하활동을 하다가 1976년에 체포되었으나 1985년에 탈출했다. 이후 마르코스 체제가 붕괴한 후 민족민주전선의 교섭위원회 의장이 되었고 2001년부터 바얀 · 무나 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세 번 역임했다. 2010년 5월의 선거에 상원에 출마했으나 낙선〕는 마르코스 통치 시대의 9년간을 형무소에 있었으나 1985년 내셔널 프레스 클럽 축제 중에 주어진 일시 귀휴를 이용해 도망쳤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의 탈주는 칼로이 부대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칼로이와 다시 만나면 수고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으나, 결국 그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일을 나가려고 하고 있을 때, 7단지에 있는 지하 아지트를 군 첩보부대가 덮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은 8단지에 있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군과 집 안에 있던 무장 저항그룹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 전 과정을 라디오가 중계했다.

    저녁 때 집에 돌아오자 옆 집 사람이 황급하게 찾아와 말했다. 오늘 낮에 사람들이 가득 탄 차 한대가 오더니 한 사람이 내려 내 형이라면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은 이곳을 알지 못하므로 그 자는 형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 이웃은 아까 왔던 사람들 중에는 총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면서 내게 곧바로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음 날 신문 기사를 읽고, 또 당의 노동자 조직국 동지의 얘기를 듣고 사태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 7단지의 아파트 총격전에서 살해된 것이 칼로이였다. 그는 아파트 뒤쪽의 도랑 옆에 쓰러져 있었다.

    그 동지의 얘기에 의하면, 그날 아침 머리에 반다나〔머리 스카프, 수건〕를 쓴 무장한 사복 병력들이 두 개의 현관이 있는 2층 아파트 건물을 둘러쌌다. 칼로이와 파르티잔 부대원 2명은 2층에서 그것을 봤다. 칼로이의 아기는 유모와 함께 1층에 있었다. 칼로이는 유모에게 아기를 데리고 이웃집에 가서 누가 찾으러 올 때까지 거기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동지들에게 습격부대를 유인하는 역할을 자신이 맡을 테니 도망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동지는 셋 모두 함께 탈출을 시도하자고 했다.

    두 사람의 동지가 먼저 집 뒤편에 있는 창문의 목제 블라인드를 부수고 도랑에 뛰어들 때까지 칼로이는 총격전으로 적들을 유인했다. 도랑으로 뛰어 든 두 사람의 동지도 총격전을 벌였으나 그 중 한 동지가 총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산발적으로 총격이 이어졌고 이따금 군을 향해 수류탄이 날아갔다.

    습격자들의 태세가 다소 흐트러진 틈을 타 두 사람의 동지는 머리에 반다나를 쓰고 공중을 향해 총을 쏘면서 군 습격자들이 없는 쪽으로 질주했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아마도 이들도 습격자 측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 후 둘은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은 후 경찰이라고 말하고는 다른 한 동지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동지는 부상당한 동지를 일반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 꺼림직했기 때문에 그들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때 집에 있었다면 친구인 의사가 있는 곳으로 데려갈 수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나는 집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지트에 있던 또 다른 조직국 동지가 그들을 의사인 동지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부상당한 동지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85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칼로이의 최후를 정확히 모른다. 그의 부인과도 만나지 못했다. 그 후 칼로이의 시신은 어떻게 됐을까? 부인이 수습한 것인지, 아니면 양친이 와서 찾아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습격자들이 유모의 존재를 몰랐으므로 유모가 이 끔찍한 사건 이후 아기를 칼로이의 집에 무사히 데리고 갔다는 것은 확인되었다. 그 아기도 지금은 성장해 어른이 되었으리라. 만약 그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나에게 연락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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