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들의 세계
    '센겐 조약'과 이동의 자유
        2015년 11월 24일 03:59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제게 한 명의 제자가 있습니다. 중국 출신의 석사과정 여학생인데, 지금 ‘홍루몽’에서의 빨간 색을 뜻하는 여러 한자들의 의미(赤, 紅, 朱 등)를 공부합니다. 저도 옛날에 한학을 하고 지금도 그 쪽으로 취미가 남아 있기에, 그녀를 아주 기쁘게 지도하죠.

    헌데, 그 중국 여학생의 노르웨이 생활에 아주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비자” 문제죠. 학생비자로 입국했으면 그걸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데, 일이 많고 유럽연합 바깥으로부터의 외국인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노르웨이 당국들은 가끔 가다가 10개월(!)이 지나도 비자 갱신을 못합니다. 서류들이 밀려 있다고 해서요.

    그 기간 동안 노르웨이에서 체류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외국에 나가자면? 바로 여권 검사에 걸려 “불법체류자” 명목으로 본국, 즉 중국으로 송환을 당합니다. 그 다음에는 노르웨이를 포함한 센겐조약 가입국(유럽연합과 노르웨이 등 일부 인접 국가 사이 무비자 교류에 대한 조약)으로의 입국이 몇 년간 금지되고 학업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여권 검사를 아직도 안하는 유럽연합 국가로는 마음 조마조마한 걸 참아가면서 다니지만 예컨대 학회 일로 미국에 간다는 건 지난한 일입니다. 노르웨이 학생비자는 갱신돼도 미국 비자 얻기란 대단히 어렵고 시간도 걸리고… 독일로 교환학생으로 가자면? 3개월 이상의 체류에 또 특별한 허가증이 필요해, 수개월 걸리는 신청 노동을 미리미리 시작돼야 합니다. 그러니까 ‘홍루몽’ 공부를 하러 온 사람은 결국 모욕감을 참아가면서 타국살이를 해야 하는 꼴입니다.

    “월경”, “국경 없는 세상”, “지구촌”… 1990년대에 이런 말들이 엄청나게 유행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국경선이 아주 두꺼운 세계에서 삽니다. 유럽연합 국가 사이의 무비자 자유 왕래(센겐 조약)는, 사실 유럽연합과 “나머지 세계” 사이의 두꺼운 벽이 생긴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리아나 아프간, 에리트레아 등으로부터의 피난민들이 왜 목숨 걸고 지중해 밀항선을 타겠습니까? 비행기 표를 사서 유럽으로 갈 돈이 있어도 그들이 “정상적으로” 센겐 비자(유럽연합 입국 비자)를 받아 유럽에 가서 거기에서 피난민 지위 신청을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국가” 사람이라면 유럽 비자 받는 게 하늘의 별 따기 이상으로 힘듭니다.

    아직 별로 불안하지도 않은 알제리만 해도 유럽 비자 거부율은 27%이었습니다(2012년). 재산과 직장 증명이 불가능한 가난한 사람 같으면 아예 시도도 하지 않고 밀항을 시도하는 형국이죠. 유럽이든 미주든 밀항 등 비법 월경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멕스코로부터 미국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은 해마다 수백 명 단위로 죽고, 지중해에서의 연간 이민자 사망 건수는 이미 천 명 단위입니다.

    중동인만 그런가요? 유럽연합과 인접해 있는 러시아나 백러시아 사람으로서 유럽 비자 받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여름마다 외국여행을 즐기지만, 러시아에서는 구소련 영토 밖으로 여행해 본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불과합니다. 월경이나 “유목민적 삶”도 부자들의 특권이죠.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일면으로는 “부자나라” 문턱에 와서 유럽이나 미국으로의 3개월 무비자 입국의 세계적 특권을 따냈지만, 일면으로는 3개월은 “관광”을 의미할 뿐입니다. 유럽인이나 미국 자본가들은 한국 관광객의 “돈”을 노리지, “헬조선”을 탈주하려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일자리까지 나누어줄 생각은 없습니다.

    실은 지금 미국 거주 한국인의 약 8분의 1, 즉 25만 명가량이 소위 “불법 체류”하면서 법의 탈을 쓴 자본과 국가의 배타성을 뛰어넘어 “월경”을 실행하고 있지만, “유목민” 이야기를 좋아하는 포스트적 “사상가”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관광이나 여행 같은 “고급” 월경은 한비야 기행문의 인기가 보이듯 주목을 받아도, “하류 인생”들의 월경은 그냥 묻혀버리는 경향이 있는 거죠.

    가면 갈수록 이 세계는 영화 <헝그리 게임즈>에서 나온 악몽적 세상을 떠올립니다. 수도 (캐피톨) 지역은 부유해도, 수도로 여행할 자유도 없는 구역(디스트리크트) 주민들은 거의 봉건제와 같은 상황으로 떨어지고…

    자본의 이동을 자유로 하되 사람들은 저임금 지역에 붙잡아두고 무제한 착취하도록 설정돼 있는 신자유주의의 제도에서는 아무래도 “국경의 세계”만이 가능하나 봅니다. 결국 신자유주의, 나아가서 자본주의 자체를 철폐하자는 운동은, 이 세계를 나누는 각종의 “벽”들을 철거해서 세계민들을 위한 지구 자유 왕래 쟁취의 운동이기도 하죠.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