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선거 참여와 갈등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⑧
        2015년 11월 19일 09: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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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⑦ 링크

    제11장 임시국회 선거와「라반」

    1978년 마르코스는 미국 지미 카터 정권의 압력을 받아 임시 국회 선거를 공고했다. 임시의회는 마르코스의 독재지배를 은폐하기 위한 「어용 국회」로 고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운동 진영에서 보면 국회의원 선거는 대중동원이나 반독재 캠페인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에 지하 활동가들이 기다리던 것이었다. 선거운동은 대중을 조직화하여 광범위한 선전활동을 할 수 있고 후보의 선거집회나 유세를 활용해 대중동원을 행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기회를 살려야한다고 판단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선거 참가를 결정했다. 그리고 민족민주전선(NDF)의 캡이자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특별위원이기도 한 에드가 좁슨과 함께 당은 「라반」의 결성에 협력했다. 라반은 선거를 통해 마르코스 독재와 맞서 싸우기 위해 결집한 반독재 세력의 연합체였다.

    이 연합에는 혁명적 좌익 세력과 중산계급의 대표, 종교 그룹, 그리고 반 마르코스파 의원들도 들어와 있었다. 그 중 누구나가 다 리더로 생각한 것은 전 상원의원 베니그노 아키노였지만, 그는 1972년에 체포되어 구속 중이었다.

    아키노

    구속 당시의 베니그노 아키노의 모습(오른쪽)

    「라반」이라는 이름도 니노이 아키노가 제안한 것이었다. 라반은 「단결한 민중의 힘」이란 뜻의 타갈로그어의 앞 글자를 딴 것이지만 투쟁 시의 구호인 “투쟁!”을 의미하기도 했다. 라반은 임시의회 선거를 위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조직으로, 마르코스 독재에 반대하는 선거조직과 정치조직을 겸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필리핀 공산당 CPP 내부에는 당이 부르주아 선거에 참가하는 것이 원칙을 벗어난 행동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필리핀 공산당이 대중단체를 통해 선거전에 관여하는 것은 오로지 선전 선동을 위해서이고, 「중간 세력」(빈곤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다양한 종파의 수녀와 신부, 선교사 등의 중간계급)의 폭넓은 통일전선 결성을 촉구해 독재자나 대지주, 자본가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1977년 11월에 팡가시낭 주에서 호세 마리아 시손이 체포된 후 의장 대행이 된 로돌포 살라스에 의해 이 노선이 채택됐다.

    라반 연합 내에서 필리핀 공산당은 「B-H-B」를 후보자로 내세웠다. 최초의 「B」는 알렉스 본카야오로, 당시 그는 마닐라 수도권의 급진적 노동운동의 대표적 노조인 솔리드 밀즈(Solid Mils)노조의 리더였다.(알렉스는 선거가 끝난 후 신인민군에 참가해 필리핀 군과의 교전 중 사망한다. 신인민군은 마닐라 수도권에 「알렉스 본카야오 여단」이라는 무장부대를 창설해 그의 공적을 기렸다) 「H」는 도시빈민운동 여성 리더인 트리닝 에레라(Trining Herrera)로, 그녀는 ZOTO(철거반대 투쟁 단체)의 활동을 이유로 군 첩보부대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마지막 「B」는 게리 바리캉으로 「1/4분기의 폭풍」 시대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인물이다. 라반 연합의 후보자들 중에는 이 외에도 중간층과 엘리트 층 출신의 니노이 아키노, 아키리노 피멘탈, 차리트 플라나스 등이 있었다.

    「라반」은 마닐라 수도권에서 21명의 후보자를 냈다. 45일간이라는 단기간의 선거운동을 통해 야당이 표를 결집할 수 있는 것은 마닐라 수도권밖에는 없다는 판단에서 수도권에 역량을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마르코스는 거의 대부분의 주에서 후보를 독점하고 있었다. 마르코스 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을 확실히 배제시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부인인 이멜다를 입후보시켜 마닐라 수도권의 KBL(신사회운동)당 후보 명부의 맨 위에 앉혔다. 이렇게 선거는 마르코스 일족과 라반 연합으로 대표되는 광범위한 반대파의 결전으로 진행됐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세력을 결집해 “대중의 목소리를 듣는” 선거운동을 했다. 선거운동은 독재와 계엄령에 반대하는 시위행위가 되었다. 니노이 아키노는 구치소에 수감 중이었기 때문에 7살의 딸 크리스를 그의 선거운동에 등장시켰다. 선거기간 중 챠리트 플라나스는 마르코스 일족의 재산과 이멜다가 소유하고 있는 엄청난 양의 보석에 대해 어필했다.

    「B-H-B」 팀은 마르코스가 노동자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폭로하고 정치 경제 체제의 「오버홀」의 필요성, 즉 「혁명」에 관해 얘기했다. 나는 「B-H-B」의 선전물 작성을 담당했다. 선전팀은 교통부문의 운전사들이 운전 중에 틀어줄 「B-H-B」의 카셋트 테입도 만들었다.

    투표일인 4월 7일 직전,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필리핀 공산당 CPP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선거는 「개량주의적」 실천일 뿐으로 대중의 혁명적 의식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며 선거보이콧 방침을 결정했다.

    당 중집의 지침을 따르자면 우리는 방침 전환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선거는 사기극이고 마르코스에게 속는 길이며 독재타도의 유일한 길은 폭력혁명을 준비하는 것밖에 없다고 대중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우리는 의기소침했다. 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이렇게 전술적으로 무의미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선거에서 대중들을 그들의 요구 하에 조직화 하는 것이 뭐가 나쁘지? 우리는 노동조합의 요구에 맞춰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지 않는가?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도시빈민들을 조직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개량주의적 요구라고? 임박한 주요 과제, 즉 마르코스 독재 반대투쟁에 대중을 동원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선거 보이콧 방침에 대해 포포이가 소집한 지역 회의에서 분개하는 의견들이 들끓었다. “보이콧을 호소하는 것은 라반의 후보자 명부에서 B-H-B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아니 혁명운동에 있어 정치적 자살행위가 될 것이다. 라반 내 우리들의 동맹자, 그리고 대중들은 오히려 우리가 체제에 매수되어 선거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 의심할 것이다”─이는 회의 에서 나온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의 하나였다.

    우리는 현장의 동지들이나 간부들과 얘기해보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왜냐하면 현장 활동가들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선거 참가 방침이나 대중동원 방침을 실천하고 정치적 동맹자들과 함께 활동해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현장 간부들은 금번 당 중앙의 결정에 쇼크를 받아 그들 중 몇 명은 당 중앙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대다수는 새로운 방침 결정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지역위원회에 요구했다.

    그 결과, 새로운 방침은 잘못으로 혁명운동에 해악을 끼치는 결정이라고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입장에 입각해 선거보이콧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지역위원회 멤버 몇 명이 누에바 에싯쟈의 당 중앙 캠프로 향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누에바 에싯쟈에서 필리핀군의 군사작전이 행해지고 있어서 파견된 동지는 캠프로 갈 수가 없었다.

    파견된 동지가 마닐라에 돌아오자 곧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향후의 대책에 대해 짧은 시간이었지만 치열한 토론을 했다. 우리는 선거 참가 방침의 계속을 결정했다. 그것은 분명히 당의 보이콧 방침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사안의 중대성으로 인해 우리는 상당히 긴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결정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겁먹지 않고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월 6일의 일제 「소음 폭격」

    투표일 전날인 4월 6일 밤, 격렬한 소음이 마닐라 수도권 일원을 덮었다. 지하활동 중인 우리는 마닐라 수도권 교외에 있는 「지하 아지트」에 조용히 숨어 있었지만, 거기에서조차 그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당시 포포이와 살리, 그리고 칼로이와 텟사의 두쌍의 부부와 함께 불라칸의 지하 아지트에 있었다. 칼로이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지역 조직국의 캡으로, 지역위원회의 위원으로 막 선출된 참이었다. 그 날은 칼로이와 텟사 부부가 집 근처의 급수장에서 물을 길어 와야 하는 당번이었다. 그들이 돌아 온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돌아오자마자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설명했다. “급수장 근처에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는데 운전수가 계속해서 경적을 울리고 차에 탄 승객들도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L」자를 만들어 라반! 라반!을 외치는 거야!”

    또 2~3일 전에는 당시 제 3지구의 캡이던 재드를 만났는데 재드는 니노이 아키노의 호소 편지에 대한 당의 입장을 알려달라고 나에게 요청했다. 그 호소는 “4월 7일의 투표일에 마르코스는 부정을 저지를 것이 뻔하기 때문에 선수를 쳐서 4월 6일 밤, 사람들이 라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일제히 사운드 데모를 하자”고 하는 제안이었다.

    재드에 의하면 그 호소 편지는 대중적으로 마닐라 수도권의 여러 사무실에 FAX로 보내져 그 문서를 복사하거나 「연쇄 편지」처럼 베껴 쓰거나 해서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상인들은 편지를 대량으로 복사해 주변 사무실이나 동네, 클럽과 상점가에 배포했다. 재드가 나에게 보여준 편지도 카톨릭 교회에서 받은 것으로, 사제가 신자들에게 배포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폭력 혁명만이 마르코스를 타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일제 사운드 데모와 같은 평화적 항의행동으로 마르코스를 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반(反)마르코스 반동분자」 ─필리핀 공산당은 반 마르코스파 정치가들을 이렇게 불렀다─들과의 동맹은 이러한 반동 부르주아들까지도 스스로 무장하고 무장투쟁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해서 성립될 수 있었다. 나는 재드에게 우리는 다른 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일제 사운드 데모 따위는 무시하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4월 6일 오후 7시에서부터 8시까지 마닐라수도권 거의 전 지역의 거리거리에서 역사적인 일제 사운드 데모가 펼쳐졌다. 마치 12월 31일 밤의 축하 행사가 리바이벌된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차들의 경적이 라반! 라반!을 외치는 대중들의 구호 리듬에 맞춰 단속적으로 울려 퍼졌고, 거리의 사람들은 「L」 사인을 서로 확인하면서 「라반!」을 연호했다. 교회의 종이 일제히 울리고 거리는 종소리로 뒤덮였다. 거리 한복판에서는 타이어가 불타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이나 거리거리에서 크고 작은 데모가 파상적으로 전개되었다. 돌을 주워 금속제 포스트에 탕탕 소리를 내며 던지는 사람도 있고, 주저하는 사람에게 사운드 데모에 동참하라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운드 데모가 아니라 “조직된 카오스”라고나 해야 할 목적을 가진 환희의 폭발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전례 없이 흥분했다. 그리고 선거전은 끝났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일제 사운드 데모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라반의 후보자는 한 명도 당선자 리스트에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승리를 도둑맞은 것이다. 마르코스는 개인에게가 아니라 당에 투표하는 「블록 투표제」(즉 라반 vs KBL당의 투표 방식)를 명령해 아주 간단하게 승리를 탈취한 것이다. 계엄령 체제하에서 라반은 이렇게 어이없이 당선자 리스트에서 지워져 버린 것이다.

    선거 결과에 항의해 대규모 집회가 제안됐지만 당의 선거 보이콧 방침에 공공연히 반대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분열주의자」의 레테르가 붙여져 집회에 스스로의 세력을 조직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45일간이라는 선거운동기간으로는 야당의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정치 조직을 다지기엔 무리였고, 당의 지역조직만이 반독재 투쟁의 대중 기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데모 행진은 도중에 중지되고 로렌조 타냐다 전 상원의원과 당시 저명한 인권변호사였던 죠커 아로요 등 저명한 리더 전원이 투옥되었다. 선거 기간 중 공공연히 활동할 수 있었던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간부들은 다시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제12장 산악캠프에서의 논쟁 

    필리핀 공산당 중앙지도부와의 예정된 회의를 위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임시의회 선거에 대한 견해를 둘러싼 논쟁을 준비했다. 포포이는 마치 법정문서 같이 두꺼운 초고를 작성해 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가 선거 보이콧 방침에 반대했고, 또 마지막까지 선거 참가 방침을 고수했는가를 분명히 했다.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전체회의가 소집됐다. 13명 중 1명만이 당 중앙의 보이콧 방침에 대해 지역위원회가 반대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이렇게 포포이의 문서는 지역위원회에서 승인되어 당 중앙간부회에 보내져 당 중앙의 평가와 회답을 기다리게 되었다.

    당 중앙지도부로부터 곧바로 연락이 왔다. 그들은 당시 누에바 에싯쟈에서 캠프를 개최하고 있었다. 포포이를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서기장 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으로 에드가 좁슨을 임명한다는 지시와 함께 포포이에게 즉시 캠프로 출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또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이의 제기에 대한 회답으로 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위해 누에바 에싯쟈에서 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지역위원회가 참가할 것을 명령했다.

    1979년 1월 마지막 주, 우리는 몇 개 팀으로 나눠 캠프로 향했다. 나는 칼로이 외 몇 명의 동지와 함께 했다. 우리는 시에라마드레 산맥 기슭의 농가에서 하룻밤 머문 후, 다음 날 그곳으로 마중 나온 신인민군 대원들과 함께 캠프를 향했다. 산 속에서 이틀 내내 걸어 저녁 무렵에 캠프에 도착했다. 포포이와 또 다른 지역위원회 동지들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텐트를 설치하고 캠프에의 식료 반입 등을 도왔다. 게릴라 병사들은 비닐로 된 지붕을 만들고, 해먹을 걸칠 대나무 기둥을 설치했다. 우리 텐트에는 4명이 있었으나 해먹은 5개가 있었다. 1개는 우리와 함께 있기로 한 지역의 게릴라 병사용이었다. 몇 명의 당 간부가 쓴 두툼한 문건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어떤 간부는 포포이가 지도하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를 「개량주의」, 「반혁명」, 「수정주의」로 규정했고, 또 어떤 이들은 「분파투쟁」에 물들었다고 비난했다. 이런 것들은 공산당 내에서는 심각한 위반행위였다. 캠프에서의 중앙집행위원회는 로돌포 살라스(빌록)와 다른 3명의 당 중앙 간부가 리드했다. 에드가 좁슨도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특별위원으로 동석했다.

    캠프에서는 우리들 개개인에게 권총이나 카빈이 지급됐다. 우리는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하여 개천으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간단한 체조를 한 후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후의 휴식 시간에는 동지들이나 지역의 게릴라들과 대화하거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아침 8시가 되면 회의장에 들어가 회의가 시작되는 것을 기다렸다. 회의장은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장방형의 채벌지로 대나무로 만든 긴 벤치가 「ㅁ」자형으로 놓여있었다.

    토론은 중식과 간식 시간을 제외하고 저녁때까지 하루 종일 이어졌다. 격론이 이어져 선거 보이콧파와 참가파와의 사이에 격렬한 비판과 반론의 응수가 이어졌다. 매일같이 그런 토론이 계속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점도 찾아내지 못한 채 한 달이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마닐라 수도권으로부터 2, 3명의 간부가 캠프에 소환되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문제점에 대한 증언을 했다. 특히 포포이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까발려졌다. 당 중앙의 문서나 자료를 배포하지 않았다거나, 조직 건설과 당원 확대를 게을리 했다거나, 즉흥적으로 당 조직편제를 해체했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잡다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어느 날 나는 빌록의 책상 위에 놓여진 내가 옛날에 쓴 문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혁명이 계급투쟁의 성쇠나 부침에 의해 완급의 변화를 동반하면서 전진하는 게 아니라 산술적으로, 즉 혁명적 조직의 간부나 당원수의 단순한 증가에 의해 전진한다고 하는 일부의 사고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 문건이 다행히 나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어느 날 아침 기상을 하자 토론 종료가 선언됐다. 캠프의 팀 리더들은 우리들에게 나눠준 총을 모두 회수했다. 오늘은 회의가 없으니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고 했다. 점심 식사 후 당 중앙집행위원회의 대표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멤버를 한 사람씩 불러 무엇인가를 얘기했다. 나는 불려나가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회의장에 소집되어 빌록으로부터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확신범적인 분파투쟁주의”가 극도에 달했고, 당 지도부에 대한 “중대한 협박”이 행해졌다고 통고받았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여러 번 질문을 한 끝에야 알게 됐지만, 그 “협박”이라는 것은 포포이가 그의 텐트에서 몇 명인가의 동지들에게 했던 코멘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포포이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가 옳은 것으로 판명된다면 누군가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당 중앙간부회는 포포이의 언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포포이는 자신이 말한 것은 비유적인 것이며 만약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견해가 올바른 것으로 판명된다면 당 중앙집행위원회의 몇 명은 교체되거나 사임하게 될 거라는 뜻으로 말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은 섬찟한 것이었다. 캠프에서의 격렬한 토론 분위기 속에서 전원이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당 중앙집행위원회가 품게 된 포포이의 말에 대한 오해는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멤버들의 무기를 회수하고, 소위 「분열주의의 주모자들」 에 대한 대량 체포의 가능성을 내비췄기 때문에 캠프의 분위기는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토론을 속행하는 것도, 당간부회나 그 대표들을 비판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마침내 빌록은 선고를 내렸다. 우리의 주된 죄명은 「분열주의」였다. 그는 우리들 사이에 약 1개월에 걸쳐 진행된 토론이 문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특징점(「수정주의」 「개량주의」 「반혁명사상의 유포」 따위)에 대해 파고 들어 천착했지만, 그런 것들은 「중죄」인 분열주의가 만들어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당 중앙집행위원회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멤버(한사람 한 사람씩 불려나간 사람들 중 몇 명인가의)들의 증언을 통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에서 “비밀회의”가 행해졌으며, 포포이를 캡에서 해임하라는 당 중앙의 결정에 불복해 반기를 드는 음모적 과오를 거듭했다는 것이 판명됐다고 말했다.

    결정은 그 즉석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예방조치적인 결정이었다. 포포이는 캠프에 잔류하여 분열주의의 혐의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누에바 에싯쟈의 게릴라 지역에서 「재교육」을 받게 되었고 지역위원회의 임시 지도부가 구성되어 에드가 좁슨이 캡을 맡게 되었다. 우리는 임시지도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중, 마닐라 수도권에 돌아가도 좋다는 지시를 받았다.

    다음 날 우리는 포포이와 살리에게 작별을 고하고 캠프를 떠났다.

    마닐라에 도착하자 당 중앙집행위원회의 다른 간부가 찾아왔다. 그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지역 지도부의 「비밀회의」에서 무슨 토론을 했는지, 또 우리가 그 토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보고서를 쓰도록 명령했다. 우리는 선거 보이콧 방침에 반대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의 방침을 학습하고 그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역위원회 동지들과 회의를 가진 것을 인정하고 간단한 레포트를 썼다.

    「분열주의」라는 비난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분열주의」라는 것은 당 중앙에 정면으로 반대해 새로운 당 중앙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그 지도부는 그러한 조직을 만든 게 아니라 단지 당 중앙의 방침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을 따름이다.

    이 때, 우리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지도부에서 밀려난 상태였고, 새로 선임된 임시 지도부에게 신병을 위임하고 있었다. 임시 지도부는 구 지역위원회 멤버인 재드에게 새로운 임무 부여의 조정을 명했다. 재드는 우리에 대해 마닐라 수도권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다른 지역으로 전출시키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전출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칼로이는 중앙 루손 지역위원회 관할 하에 있는 잠발레스 지구의 신인민군 부대와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그는 잠발레스로 떠나기 전에 우리 집에 들러 만약 자신과 함께 가고 싶으면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나는 코르디렐라 지역위원회와의 접촉을 시도해 바기오 시에 있던 그 지역위원회의 연락원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연락원은 코르디렐라 위원회도 분열주의 문제를 경험했기 때문에 내 “전과기록”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격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당신네 위원회에서 활동하지 않겠다”고 그녀에게 선언했다.

    살리의 죽음

    1979년에 살리가 누에바 에싯쟈에서 죽은 것을 알았다. 1979년 6월 23일, 누에바 에싯쟈의 분가봉에서 필리핀 공군부대와 살리가 소속된 비무장의 선전팀이 조우했다. 군은 추격전 끝에 일제사격을 가해 살리를 살해했다. 비탄에 잠긴 가족들이 살리의 시신을 거두어 마닐라로 옮겼다. 살해됐을 때 그녀는 아직 20대 중반이었다.

    포포이는 살리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다른 동지에게 편지와 3송이의 빨간 장미를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포포이는 편지에 “가장 사랑하는 부인이자 전우”라고 썼다. 편지의 일부는 2001년에 암살자의 흉탄에 의해 포포이가 살해된 곳, 즉 필리핀 대학 딜리만 캠퍼스의 동창회관 계단 오른쪽에 있는 묘석에 지금도 남아있다.

    혁명으로 쓰러진 순교자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정치범들의 생애를 떠올릴 때마다 적들에 대한 깊은 증오를 금할 수 없다. 그들은 많은 민중들을 빈곤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투쟁한 사람들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애국적이고 헌신적이며 자기희생적인 사람들의 긴 리스트가 된다. 우리들,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들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어 왔지만 만약 이 파시스트 국가의 잔학함과 폭력이 없었다면 더 많은 은혜를 입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살리는 당시 가장 뛰어난 애국적이고 헌신적인 그리고 자기희생적 활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 또한 「1/4분기의 폭풍」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녀는 「카사피」라는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그룹의 리더로써 활동을 시작해 계엄령 발포 전에 민청협(SDK)에 가입했다. 중국풍의 미소녀였던 살리는 영리하고 아름답다는 말 외에 형용할 길이 없었다. 민청협에서는 많은 남성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끌렸지만, 동시에 그녀의 총명함에 외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계엄령 하에서 그녀는 노동자 그룹과 활동하게 되었고, 거기서 포포이를 만났다. 그 때 포포이는 말라본의 리락 밀즈(Lirag Mills)사의 노조 리더로 활동 중이었다. 둘은 동지가 되었고 이윽고 연인 사이가 되어 부부가 되었다. 두 사람 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혁명운동의 리더가 됐다.

    살리는 불굴의 지도자이고 그녀의 친구, 지인, 협력자들의 광범위한 네트웍 덕분에 거처나 회의 장소 기타 운동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았다. 포포이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지도부의 논쟁에서는 살리(그리고 그 외의 멤버)보다 우월했지만, 살리는 포포이 이상으로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다. 포포이가 당 중앙 지도부의 입장에 반하는 견해를 가졌을 때도 당 중앙에 맞서 투쟁하도록 그를 설득한 것은 살리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리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된 것은 일로코스 노르테 주의 라오악 시에 있을 때였다. 그 때 나는 코르디렐라 지역위원회로 가려 했으나 거부당해 정치적 감금 상태에 있었다. 살리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포포이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담은 시를 썼다. 나는 일로코스-코르디렐라 지역위원회에 소속된 “정치적 색깔이 없는” 한 멤버에게 포포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편지는 전해지지 않았고,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전직 지도부 그 누구로부터도 애도의 메세지를 받지 못한 포포이는 옛 동지들에게 실망했다고 했다는 것이다.

    살리의 죽음은 포포이의 인생에 있어 두 번째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동생인 노동변호사 헬몬 라그만이 군에 의해 납치된 것은 1977년 5월 11일로, 2년 전의 일이었다. 헬몬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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