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민낯' 그리고 '광기'
    [다큐멘터리사진] 권철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
        2015년 11월 11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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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여름, 사진계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사진가 권철이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사진으로 고발하기 위해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에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제주시에 요청을 했고, 제주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허가를 해줬다.

    그런데 느닷없이 광복회 회원 몇 사람이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을 ‘감히’ 어찌 광복 70주년 되는 날에 걸려 하느냐고 제주시에 강하게 항의했고, 이에 제주시는 그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사진전을 취소해버렸다.

    사진가 권철은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겠냐고 항의를 했지만, 제주시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사진을 보라, 이게 어떻게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거냐? 고 아무리 볼멘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일장기가 있으면 친일이라는 그 단순 무지한 문맹자들이 지배하는 세상, 문자는 해득할 수 있으나 뜻은 해득하지 못하는 그 눈 뜬 봉사들이 권력으로 활개 치는 세상. 그 안에 도사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친일에 대한 광기. 그 광기는 여름을 지나 가을에 들어오더니 이제 가을바람을 넘고 소용돌이치더니 가속도가 붙어 겨울로 들어간다.

    친일의 문제는 국정 교과서 문제와 어우러지면서 정치권력들이 혈투를 벌이는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는 ‘역사’의 광기를 안고 겨울 공화국 입구에 서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여러모로 그 의미가 역사와 가깝다. 기록에 가장 큰 의미를 두는 점이 그렇고 그 기록은 시각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점도 그렇고 그래서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사진은 엄밀하게는 예술로 간주되거나 그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기록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보니 특정 사건의 장면을 재단해서도 안 되고, 구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림과 같이 대상의 구도를 자의적으로 배치하고 그 장면을 재현하는데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들어가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프레임 안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증거 대상이 있으면 그것이 설사 그림 미학의 입장에서 볼 때 구성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할지라도 넣는 것이 원칙이다. 사진은 사람의 손이 거의 가지 않은 채 만들어진다. 물론 프린트를 하는 과정에서 뭔가를 빼거나 없는 듯하거나 강조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그것은 사진의 본질 특성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사진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뜻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읽어내는 힘도 중요하다. 기계의 눈으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눈이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데, 읽는 사람의 눈이 그 뜻을 알아차리거나 자신만의 독해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진은 사진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독해가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진이 예술성을 표방할 때는 해석의 여지를 넓히는 것이 긍정적으로 인정되겠지만, 그 사진이 다큐멘터리를 표방하고 나선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장 한 장의 사진 속에 드러난 세세한 느낌은 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전체가 하나로서 주는 메시지는 사진가의 의도에 맞게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해석의 여지, 다양한 해석이 아니라 오독이자 무식이 된다.

    사진가 권철의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은 저자가 10년 동안, 일본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기록한 것이다.

    야스쿠니,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태평양 전범의 위패를 모셔놓은 신사. 일본 군국주의가 드러내는 역사의 민낯. 야스쿠니에서 벌어지는 사건 즉 신사 참배를 하는 것도 그렇고 그에 맞춰 정치인들이 망언을 하는 것도 그렇듯, 상시적인 것이 아니다. 금세 왔다가 사건을 보여주고 금세 돌아가 버리는 순간에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이기 때문에 사진가는 후다닥, 해치우듯, 스케치 하듯 기록해야 한다.

    기록의 중심은 외면에 있고, 그 외면은 일상의 관례에 따라 해석되는 방식으로 재현되어야 한다. 뭔가 감각적이어야 하고, 상징적이어야 하며, 기표가 기의를 낳고, 다시 그 기의가 또 다른 기의를 낳는 의미 생성 방식이 너무 깊은 데서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나 한 눈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하는 일반적 방식이어야 한다.

    짧은 시간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전체를 다 보여줄 수 없다는 전제 아래에서 출발하고, 그래서 역으로 짧은 순간의 장면을 통해 의도적으로 전체를 드러내야 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의미 전달 방식을 따라야 그것을 성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예술적 세계를 통해 침잠해 있는 넓고 깊음의 사유를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 작가주의를 표방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에 수록된 사진은 단독적이다. 전체가 하나의 내러티브를 위해 장면들을 잇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신문이나 저널 읽듯이 각각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다.

    그래서 사진은 주로 캡션을 통해 의미가 보완된다. 책 56 쪽부터 시작되는 정치인의 행렬에 대한 사진이 그 좋은 예다. 이 경우 여러 장의 사진을 연작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기도 한다. 동어반복을 고의적으로 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를 여러 차례 확인하게 하고, 유형을 만들어 그들의 뻔뻔하고 극악무도한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줘 감정을 지극하게 하는 도발적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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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가 권철이 즐겨 사용한 또 하나의 기호 방식은 상징의 정형화다. 한국과 중국의 동아시아 인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인 일장기와 욱일기를 사진가로서 최대한 할 수 있는 한 확대해서 이미지로 만든다. 책 표지의 앞 페이지와 뒷 페이지를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로 덮었다. 그런데 그것들 주변에서 그 역사의 민낯을 보여주는 이들은 모두가 다 늙어빠진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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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일장기와 욱일기 안에 박힌 문자가 보여주는 섬뜩함과 달리 슬프고 가련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국의 어버이연합 노인들과 겹친다. 늙은 돈키호테들이 로시난테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지만, 그들이 걷는 길마저 우습지는 않다. 광기가 절인 블랙코미디가 현실로 나타날 때, 그것은 이미 코미디가 아니다.

    사진가 권철이 사진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한국에게는 친일의 역사, 일본에게는 전쟁 범죄의 역사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언젠가는 잊어야하기 때문에 기억해야만 하는 것, 그 슬픔을 애도하지 않고는 그 트라우마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기념식을 만들고, 그곳에서 의례를 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의미를 희화화 하고 정치 도구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것을 막으려면 야스쿠니를 해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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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를 해체하라고 시위를 하는 진보 청년들 앞에 등장하는 경찰의 모습이 사뭇 위압적이다. 경찰이 그들을 보호하려 있는지, 그들을 격리시키려 있는지, 그들이 시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있는지는 사진가가 잡은 경찰의 모습을 통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권철의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은 시종일관 무겁게 진행되다가 끝부분을 씁쓸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이야기꾼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 마치 디스토피아를 넌지시 보여주는 느낌이다. 그것은 사진가 권철이 끝부분을 벚꽃놀이 철에 행락객으로 붐비는 야스쿠니 신사의 평일의 모습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들 행락객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벚꽃놀이가 어떻게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일상의 놀이가 망각의 산물이고, 그것이 앞으로 전쟁의 대가로 이어질 수 있음을 사진가는 직시한다.

    사진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욱일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리고 병아리 같이 샛노란 우산을 쓴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들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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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광기를 노출하는 데 여념이 없는 늙은 군국주의자들과 평화를 갈구하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앞뒤로 배치하면서 사진가는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극대화시킨다.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를 하늘로 날리는 모습이 ‘대동아전쟁’에서 패퇴한 그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겠다는 건지, 전쟁을 도발하여 전 세계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것인지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기억이 배제된 비둘기 몇 마리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극우 정치인들이 힘을 얻는 것은 그 신사에 행락객으로 놀러오는 일반 시민들이 있어서다.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전시가 일부의 민족주의의 옷을 입고 휘두른 이미지 문맹자들의 폭력으로 취소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보여주지 못하면서 자기 작업만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사진계가 있어서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는 것은 역사를 기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지,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그것은 돈은 물론이고 ‘가오’까지도 없는 ‘우리’가 자꾸만 늘어가기 때문이다.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국정 역사 교과서에 싣겠다고 버젓이 들고 나오는 그 후안무취함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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