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물'과의 만남
    [필리핀 좌파운동 회고] 질풍노도⑦
        2015년 11월 06일 04:2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제 10 장 「대어」를 찾아서

    나는 스물한 살 때인 1976년에 필리핀 공산당(CPP)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새로운 멤버로 발탁됐다. 지구조직의 캡을 하고 있던 다른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선발된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제 3지구(D3)로부터 마닐라 · 리잘 지역 집행위원회로의 전출인 셈이었다.

    내 새로운 임무는 당 내 교육이 주된 것이었지만,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와 다른 지역과의 조정역(정치 담당)도 맡게 되었다. 당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는 7명의 위원과 1명의 특별위원을 포함해 총 8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특별 위원은 에드가 좁슨이었다.

    필리핀 공산당 내에 민족민주전선(NDF) 결성 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어 마닐라 · 리잘 지역에서의 통일전선 결성의 임무를 수행했는데, 에드가 좁슨은 그 위원장이었던 관계로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멤버가 되었던 것이다. 포포이(필몬 라그만)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위원회를 이끌고 있었다.

    내가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위원이 되자 군에서 나를 추적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속히 제3지구와의 물리적 접촉을 끊어야만 했다. 군은 나보타스 경찰에게 나를 마약중독자 리스트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활동가를 경찰의 상시적인 감시 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정보는 시청에 근무하고 있는 동지로부터 입수했다.

    이 무렵, 포포이와 나는 낡은 큰 집의 한 방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집은 케손시의 바나위 교회 근처에 있었고 임대용의 여러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옮기고 난 후 채 2개월도 되지 않아 다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밖에 계속 주차되어 있는 여러 대의 차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루손섬

    아베니다(Avenida)의 하숙

    우리는 마닐라의 번화가에 있는 하숙집으로 이사했다. 그곳은 아베니다의 솔라 거리 근처였다. 하숙은 낡은 목조 가옥으로 2층은 6개 정도의 학생용 작은 방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엌, 세탁실, 화장실이 있었다. 1층에는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작은 상점이 있었다.

    우리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전에 살던 곳의 주민들은 주로 중년의 전문직 종사자들이었고, 우리 집 주인은 젊은 의사와 동거하고 있는 미망인이었는데 우리를 껄렁껄렁한 건달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외모나 태도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여기는 가난한 대학생 대상의 하숙이라 마음도 편했고, 그 분위기와도 잘 어울릴 수 있었다.

    하숙은 말라카냥 궁과 가까웠다. 포포이와 나는 가끔 옥상의 빨래건조대 옆에서 멀리 대통령궁을 바라보곤 했다. 포포이는 자신을 쫓고 있는 군을 “말라카냥궁에서 돌을 던지면 맞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우리가 있는데도 모르고 있는 놈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야말로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던 “호구”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우리는 군의 감시 하에 놓여 있었고, 우리를 추적하고 있던 요원들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우리 옆방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옆방 사람들을 학생들이라고 철떡 같이 믿고 있었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군의 첩보요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밤엔 이런 일이 있었다. 필리핀 공산당의 지하기관지 『앙 바얀』이 테이블에서 떨어졌는데 하필 마루 판자 틈 사이로 빠져 아래층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는 바짝 긴장했고 이 문건을 회수하기 위해 밤새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아침에 가게가 열려 사람이 들어오면 문건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윗방 사람이 반정부 문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떨어진 문건을 회수해야만 했다.

    궁리 끝에 우리는 낚시를 하듯 풍선껌을 줄 끝에 붙여 문건을 낚으려 시도했다. 피말리는 도전과 시도를 수십 번 되풀이 한끝에 『앙 바얀』은 껌에 달라붙었다. 우리는 천천히 줄을 끌어올렸다. “작전 성공! 임무 완료!”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큰 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목소리를 죽여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옆방에 있던 군 첩보요원들이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우리를 지켜보면서 배꼽을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 지도부 간의 연락역을 맡고 있던 제다이가 체포된 후에야 우리는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운이 “끝내주게” 좋았다고나 해야 할 정도의 우연과 행운이 겹쳐 우리는 체포를 면했던 것이다.

    어느날 제다이는 포포이와의 연락 장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연락으로, CPP 의장 호세 마리아 시손을 비롯한 당 중앙위원회 멤버들과 포포이 사이의 연락이었다. 포포이는 무언가 일이 터진 게 아닌가 생각하며 다른 동지와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그 동지도 제다이가 자신들과의 회합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두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제나 접선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스타일로,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전화를 하든가 메세지를 보냈을 것이었다. 그 날 점심 무렵 포포이는 나에게 바깥에 나가 주위에 수상한 자들이 없는지 감시할 것을 명령했다.

    나는 지시대로 했으나 이 지역은 마닐라의 번화가여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많고, 길거리에 서성거리거나 여기저기 행상을 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저쪽 전봇대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보며 서성거리고 있지 않는 한, 집을 감시하고 있는 인간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혹시 감시의 눈이 있지는 않나 주의하면서 보통 때의 동선과는 달리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주위를 확인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가게의 쇼윈도우에 비친 사람 그림자를 확인했다. 나는 급히 돌아서서 백화점으로 뛰어 들어가 다시 뒷문으로 나가는 방법으로 미행을 따돌렸다.

    이렇게 아베니다를 급히 떠난 후, 나는 어떤 동지의 집에 머물렀다. 3일 후 포포이가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무사했던 것이다. 그는 우선 하숙에 남아 있는 소지품, 특히 비합법 문건을 챙겨 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전에 우선 누군가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올 필요가 있다고 주의를 환기했다.

    그날 아침 나는 다른 동지에게 하숙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는 없는지 보고 올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갔다 와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고 보고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우리는 짐 옮기는 것을 도와줄 다른 3명의 동지와 함께 지프니에 올라탔다. 하숙집에 도착하자 주인은 나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집 주인과 집세에 대해 흥정하고 있는 동안 동지들은 방에 가서 물건들을 모두 챙겨가지고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30분 이내에 해야 했다. 집주인은 방세를 가지고 잔소리를 했고, 나는 달라는 대로 다 지불했다. 이렇게 해서 무사히 하숙집을 철수할 수 있었다.

    군이 체포한 제다이의 건에 대해 발표한 후에야 우리는 겨우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제다이의 가족들이 군 형무소로 면회갔을 때 그녀가 준 편지를 전해 받아 사건의 자초지종을 파악했다. 제다이는 어느 날 아침 우리 하숙 근처에서 잡혔고 포포이와의 약속 장소로 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납치되어 차에 태워졌다. 그리고 군 캠프에 끌려가 소지품 전체를 빼앗기고 군 첩보부대의 취조를 받아야 했다.

    첩보부대원들은 제다이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그들은 얼마 전부터 제다이를 미행한 결과, 조직의 중요한 회의가 열릴 예정이고, 그 회의에 필리핀 공산당의 거물이 참석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이 「대어」를 노리고 있었다. 포포이의 체포 현상금은 이 거물에 비하면 껌값이었다.

    또 감시조가 밀착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포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체포할 수 있었다. 첩보요원들은 포포이가 사는 옆방에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인해 이 거물이 참석하는 회의가 취소되자 그들은 제다이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게 아닌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제다이를 체포했고, 내가 하숙을 도망친 그 날 아침, 포포이와 나를 체포할 준비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이 우리에게 따라주었다. 닥쳐오는 위험도 알지 못한 채 그날 포포이는 하숙집을 떠나는 현명한 판단을 했다. 제다이에 의하면 군은 포포이와 내가 이미 눈치채고 하숙을 뜬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 감시팀의 일원을 하숙 주위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나는 그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완전히 아지트를 “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설마 제다이의 체포 후 3일 만에 짐을 찾으러 다시 하숙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리라.

    CPP-NPA

    신인민군(NPA)의 훈련 모습

    「거물」과의 만남

    거물과의 만남은 1976년 말에야 겨우 실현됐다. 루손 섬 중앙부로 가는 여정을 위해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멤버들은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내가 속한 그룹은 오후에 고속도로 근처에 있는 한 촌락으로 들어간 후 저녁 무렵 영업용 지프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갔다. 거기서부터 캄캄한 어둠 속을 한 줄로 서서 희미하게 보이는 앞사람의 셔츠에 의지해 가며 논두렁길을 3시간이나 걸어야 했다.

    우리는 야자나무로 만든 고상식(高床式) 집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 몇 번씩이나 미끄러져 논두렁에 빠지는 바람에 진흙투성이였기 때문에, 더러워진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마루에 앉아 밥과 생선, 야채가 곁들여진 저녁을 먹었다. 곧 지역에 있는 동지들이 와서 다시 어둠 속에 이동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엔 시에라마드레 산맥 쪽을 향해 걸었다. 처음엔 별 것 아니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험한 산길을 헐떡이며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점점 지쳤다. 우리는 몇 번이나 안내역의 동지에게 쉴 것을 요청했다. 5시간 이상은 걸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라이플의 실루엣이 보였다. 게릴라 캠프의 초소에 도착한 것이다. 거기서 조금 쉬고 나자 곧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메인 캠프를 향해 또 다시 걸었다. 얼마 후 경사가 급한 사면 아래쪽 작은 계곡 가에 일군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쳐다보던 포포이가 외쳤다. “조마〔Joma; 호세 마리아 시손의 애칭〕다! 저 중국인 같이 생긴 사람!”

    잠시 후 우리는 아마도 게레로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는 필리핀 공산당 CPP의 의장 호세 마리아 시손과 그의 부인 줄리엣 리마와 직접 인사를 나눴다. 시손의 처 줄리엣도 당 중앙위원회 멤버였다.

    「단테 사령관」으로 불린 베르나베 부스케이뇨〔신인민군 NPA의 창설자〕는 이 회의가 있기 몇 개월 전인 1976년 8월 26일에 팜팡가 주의 멕시코에서 체포되어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빌록 사령관」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던 로돌포 살라스는 와 있었다. 그는 말랐지만 체격이 좋고 행동이 민첩해 게릴라 리더로서 잘 어울리는 풍모의 소유자였다. 근육이 발달된 몸을 가지고 있었고, 후에 단테의 후임으로 신인민군(NPA)과 당 군사위원회의 캡이 되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당 의장과 회견했다. 시손은 당시 필리핀 공산주의자들의 바이블이었던 『필리핀 사회와 혁명』의 저자였다. 시손의 외모는 우리들이 상상하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진흙과 돌투성이의 산 속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새하얀 고무 신발을 신고 있던 것이 묘한 인상을 주었다. 진흙투성이인 우리들의 구두가 그의 하얀 신발과 대비되어 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시손은 매력적인 연설가였다. 그는 자신이 영어로 쓴 문장과 마찬가지로 우아하고 노련한 화술을 구사했다. 우리와 토론하면서 시손은 때때로 본론에서 벗어난 여러 부차적인 문제에 빠져들기도 했는데, 잠시 듣다 보면 반드시 사려 깊은 태도로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필리핀의 생산양식이 “식민지 반봉건적인가?”라는 등의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에둘러 답변했다. 저명한 좌파 역사가인 레나토 콘스탄티노가 자신의 역사서에서 1900년대의 미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 이후 필리핀의 생산양식은 자본주의적이었다고 썼던 직후였다. 이에 대해 시손은 자신의 견해를 애매하게 피력하면서 콘스탄티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회피했다.

    마침 그 때 캠프 가까이에서 필리핀군의 군사작전이 행해졌기 때문에 시손과의 회견은 단시간에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지역의 신인민군 부대와 함께 급히 캠프를 떠났다. 긴 여정을 시손과 그의 처 줄리엣, 그리고 살라스 사령관과 함께 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밀림 속을 걸어 “안전한” 마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대오를 해산한 후 뿔뿔이 흩어져 이동했고, 이튿날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동지 전원은 마닐라로 돌아왔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필리핀군이 이 지역에서 신인민군 소탕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작전은 1개월간 계속됐다. 시손이 이 귀환 도중에 권총을 잃어버린 것도 나중에 알았다.

    두 번째 만남

    나는 당 군사위원회가 소집한 군사회의에서 다시 시손을 만났다. 회의는 누에바 에싯쟈 근처의 시에라마드레 산맥에서 개최됐다. 당의 NDF(민족민주전선) 준비위원회의 캡이자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 특별위원이기도 한 에드가 좁슨이 우리를 회의에 데려가 주었다.

    나는 지난번 산행에서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배낭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넣었다. 윈드 자켓(길게 자란 풀 사이를 헤치고 나갈 때 상반신을 보호하는 데 필요), 긴 팔 폴라셔츠, 쉽게 건조되는 바지(기지를 사서 근처 재봉집에 맡겨 만들었다), 로마 풍의 샌달(가볍고 잘 미끄러지지 않았다), 회중전등, 론손 라이터(바람 속에서도 잘 작동), 방충제 약병, 캔디(당분 보급)와 기타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고생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번 게릴라 캠프로의 왕복 여정 중에 「우불락」(캠프에서 멀리 떨어진 야전 초소)에서 노숙할게 될 줄은 또 몰랐다.

    우리를 태운 작은 봉고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광대한 야채 농장을 따라 먼지투성이 길을 달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불빛이라고는 우리가 탄 봉고차의 헤드라이트뿐이었다. 봉고는 산기슭에 있는 작은 집 근처에서 멈췄다. 집 주인은 우리가 먹을 저녁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마치자 신인민군 게릴라부대가 도착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한 후 곧바로 우리는 시에라마드레 산맥의 험난한 산길로 들어섰다. 가끔 잠시 쉬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담배를 피울 때는 한 번에 한 명씩만 피워야했고, 피울 동안 담뱃불을 손으로 덮어 가려야 했다. 산길에서는 바늘 구멍만한 작은 불빛이라도 멀리서 금방 식별되기 때문이었다. 담배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준비해 둔 캔디를 동지들과 게릴라 안내원에게 나눠주었다.

    산 정상으로부터 작은 시냇물가로 내려왔을 때, “여기가 우불락입니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냅니다”라고 게릴라 안내원이 말했다. 우불락은 작은 개천 옆의 노천으로 우리가 하룻밤을 지낼 곳을 의미했다. 거기에는 바위가 많아서 에드가 좁슨과 나는 큰 바위를 등지고 자갈밭에 몸을 누이었다. 우불락에서의 첫날 밤은 이렇게 지나갔다.

    다음 날에도 산 속의 행군이 이어졌다. 길은 점점 더 험해지기 시작했다. 산길은 군데군데 길이 끊어지기도 하고 또 관목으로 뒤덮여 있는 곳도 있어 길을 찾으면서 걷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때때로 90도 가까운 급경사를 기어올라야 하는가 하면, 바위산과 계곡에 끼인 좁은 산길을 걸어야 하기도 했다.

    이윽고 대나무로 만든 급조한 다리를 건너자 커다란 나무와 덤불로 가려놓은 평평한 곳에 회의용 캠프가 세워져 있었다. 시손은 20명 정도의 동지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곳곳의 게릴라 지역에서 온 게릴라 지도자들이었다.

    회의에서는 각 지역의 게릴라 공작의 진척 상황이 논의됐다. 빌록 사령관은 옥중에 있는 단테 사령관의 후임이 되어 이미 군사위원회 지도부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시손은 회의의 기조연설을 했고 미리 준비해 둔 신인민군의 성장과 발전을 칭찬하는 성명문을 읽었다.

    회의에서는 문화 이벤트도 행해졌다. 캠프에 모인 여러 게릴라 부대원들이 몇 시간 동안 합창과 독창 등 노래를 하는 시간이었다. 게릴라 생활을 그린 노래나 정부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의 내용을 담은 노래 등 자신들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에드가 좁슨과 나는 최근 유행하는 정치범들의 형무소 노래라든가 1/4분기의 폭풍 시절의 투쟁가를 불렀다.

    휴게 시간에 나는 시손에게 질문을 했다. 시위대의 보위를 위해 시위 중에 필박스를 사용해 마닐라 수도권의 정세를 예각화하려는 마닐라 · 리잘 지역위원회의 방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포포이로부터 시손에게 물어봐 달라고 부탁받은 것이었다.

    시손은 즉답을 피하면서 필박스가 급진파들이 1/4분기의 폭풍 시대에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집회나 시위에서 방어를 위해 필박스를 쓰고 안 쓰고는 저항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역량의 유무에 달려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러한 행동이 시위대 사이에 다음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모일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불러일으킨다면 데모나 집회에서 필박스를 사용하는 것이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시손과의 두 번째 회견이 된 이 군사회의 또한 어떤 사건이 생기는 바람에 일찍 끝내야 했다. 지역의 게릴라 리더 한 명이 캠프로부터 탈영했던 것이다. 그는 라이플만 간이침대에 남겨놓은 채 나머지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챙겨가지고 사라졌다.

    나는 우연히 그 동지를 목격했다. 작은 시내 옆 우거진 숲 속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는데, 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 동지였다. 그는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하면서 순찰 중이라고 말했다. 몇 주가 지난 후 나는 이 지역의 동지가 보내준 편지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이 신인민군 탈주병은 자신이 살던 마을로 돌아가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에 투항했다. 그의 탈주는 그가 속한 부대가 정기적으로 패트롤하고 있던 어느 마을에 숨겨둔 정부(情婦)와 관계가 있었던 듯했다. 우리가 시손과 회의하고 있는 동안에 신인민군 게릴라 부대가 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스캔들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7년 11월 10일, 팡가시난 주의 비밀 아지트가 급습을 받아 호세 마리아 시손과 그의 처 줄리엣 등 몇 명의 동지가 체포됐다.

    1977년은 독재자 마르코스에 있어 「추수의 해」였다. 이 해에 군의 첩보기관은 마르코스의 환심을 사기위해 기를 쓰고 설쳐댔다. 마르코스가 보낸 용맹한 충견들에 의해 많은 활동가들이 납치되고 고문당하고 또 살해됐다. 그 이유는? 독재자 마르코스가 좋아하는 숫자가 「7」이었고, 이 해는 「7」이 두 번이나 겹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1977년 5월 11일, 노동 변호사로 포포이의 동생인 헬몬 라그만과 노조 조직가인 빅터 레이에스가 마닐라 수도권의 어느 거리에서 군에 납치됐다. (케손 시티의 산프란시스코 델 몬테에서 정차 중이던 밴에 두 사람이 납치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때 이후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1970년 대 초, 포포이의 동생 헬몬 라그만은 군이 칼루칸 시의 포포이의 집을 수색했을 때도 체포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군이 노리고 있던 것은 포포이였기 때문에 그는 곧 석방됐다. 그러나 1977년에는 그러한 행운을 얻을 수 없었다.

    헬몬은 머리가 좋고 성실한 변호사로 계엄령이 발포되자 곧 노동문제에 관련된 많은 사건을 맡아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의미로 뛰어난 존재였다. 처음으로 타갈로그어로 소송서면을 작성한 인물로, 판사나 노동위원회 위원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받았다. 그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도 법정에서 진행되는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형 포포이와 같은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이 전혀 보수도 없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헬몬은 그들로부터 변호사비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주머니돈을 털어 의뢰인들에게 교통비나 식비로 건네주곤 했다. 헬몬은 납치되기 전부터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신뢰받는 변호사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법적인 지원을 하는 것만 아니라 그들이 투쟁을 계획하고 전략을 짜는 데도 협력했다. 납치된 당일도 헬몬은 빅터 레이에스의 노동조합 활동을 도와주고 있었다.

    1977년 7월에 남(南)타갈로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10명의 활동가들이 납치됐다. 이것은 계엄령 하에서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의 납치 사건이었음이 가족과 친척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 사건은 마르코스의 배후 조종과 지휘 아래 군과 경찰 첩보부대의 혼성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그들은 단언하고 있다. 그 혼성팀은 국군 제 2보안대(M-G2), 제 2치안경찰대(CUS2), 필리핀 경찰 231부대였다. 10명의 활동가 중 몇 명은 도시의 지하활동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그 외는 라구나 주에 있는 필리핀 대학 로스 바뇨스 캠퍼스의 학생들이었다.

    후에 그 중 1명의 시신은 케손 주의 루세나 시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2명의 시신은 카비테의 따가이따이에서 발견됐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내가 로돌포 아기날도 대장이 이끄는 제 5치안경찰대에 납치된 것도 1977년 10월 20일의 일이었다. 군의 「안가」에 갇힌 채 며칠간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다행히 11일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나의 납치 사건에 관해서는 프롤로그에 언급했다.

    필자소개
    필리핀 좌파 활동가(번역 석치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