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1의 정치와 현실 정치
    [왼쪽에서 본 F1]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2015년 11월 05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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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얘기 듣기 짜증나서 기분 전환 하려고 찾아보는 스포츠에 웬 정치 얘기냐?”

    F1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된 사람 중 상당수가 넌더리를 떨면서 하는 얘기입니다. 스포츠는 스포츠여야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공정한 조건에서 실력을 겨루고 스포츠맨십을 발휘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F1은 그렇지 못합니다.

    유감스럽게도 F1은 정치적인 스포츠입니다. 아니 그 자체로 정치라 얘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스포츠맨십이나 동업자 정신은 찾아볼 수 없으며, 협잡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F1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경구는 “F1의 가장 큰 특징은 ‘불공평’이다.”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F1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사람들이 떠나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F1의 정치는 현실 사회의 정치와 매우 유사하고, 많은 현실 정치의 행태가 고스란히 재현됩니다. 때로는 일반인들이 좋지 않게 보는 정치의 경우보다 더 악랄한 장면도 많이 보게 되죠. 물론 정치란 것의 안 좋은 면만 부각해서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좋지 않은 정치적 특성이 나타났을 때 주로 미디어들이 다루다 보니, 일반인들은 어쩔 수 없이 F1 정치의 좋지 않은 면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재밌는 것은 F1이 이런 특성을 잘 숨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불공평함을 숨기지도 않고, 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부정하며 피하지도 않습니다. F1을 주관하는 FIA(세계 자동차 연맹)나, F1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FOM(포뮬러 원 매니지먼트) 모두 상당히 정치적인 성향의 조직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이라는 말이 그리 부끄러울 이유도 없긴 합니다만, 동시에 공정한 경쟁이 필요한 스포츠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순되게 얽혀있는 특성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F1은 쇼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물 밑에서 정치적인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더라도, 겉보기에는 매우 공정한 스포츠로서의 경쟁이 주목받아야 하죠. 불공정함은 숨기고,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여줍니다. 카메라가 비춰줄 때만 웃고, 화면 뒤에서는 멱살을 잡고 싸울지도 모르죠. (실제 멱살을 잡지야 않겠지만, 기분은 그보다 더할 때도 많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멋있기만 하고 신사적인 것처럼 이미지를 만든 F1은 ‘숨기고 싶은 얼굴’은 짙은 화장으로 가린 채 무대에 오릅니다. F1의 정치적인 이면을 아는 사람들도 모른 척하고 봐줍니다. 어차피 이건 쇼니까요.

    [ F1 프레스 컨퍼런스에 참가한 각 팀의 주요 엔지니어들 ]

    [ F1 프레스 컨퍼런스에 참가한 각 팀의 주요 엔지니어들 ]

    최근에는 F1의 정치가 좀 더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난 7~8년간 이어진 세계 자본의 위기는 F1의 돈줄을 메마르게 했고, F1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대형 자본을 등에 업은 몇몇 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가진 자에게만 유리한’ 규정을 꾸준히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애초에 배당금의 분배도 공평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규정이 더더욱 소형 팀, 즉 가지지 못한 자에게 불리하다는 것은 더 화가 날 만하지만 생존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참아냅니다.

    게다가 가진 자들 사이에도 균열이 일어났습니다. 어차피 가진 자들끼리도 서로 경쟁 상대일 뿐이었으니까요. 이번에는 파워 유닛, 쉽게 말해서 엔진을 가진 자(메르세데스, 페라리, 르노)가 갑이 되고, 자본도 있고 기술도 있지만 엔진을 갖지 못한 자(레드불)는 을로 전락했습니다.

    막강한 자본의 힘을 과시했고, 기술적으로 가장 발전해 있던 레드불이 한순간 F1에서 쫓겨날 위치에 놓이게 된 겁니다. 4년 연속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며 ‘너무 강해서 재미없다’는 말을 듣던 것이 채 2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가졌지만, 필수 자원을 확보하지 못한 국가의 몰락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순간 함께 ‘열강’을 구축하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료가 아닌 경쟁자로 강 건너 불구경을 할 뿐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소형 팀들의 작은 반란도 이슈입니다. 몇 주 전 자우버의 리더 모니샤 칼텐본이 주도해 EU에 소송이 제기됐습니다. 자우버나 포스인디아 등의 소형 팀들이 불공정 계약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 소송의 이유이고, 이런 불공정한 상황을 외부의 압력으로 개선해달라는 목적에서였습니다. 힘의 논리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F1이 소송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F1의 정치가 참 복잡하게 진행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F1의 정치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갈등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F1에서 자의 반 타의 반 떠나간 사람들의 자서전이 주목받는 것도 이런 얘기가 흥미를 끌기 때문이죠. 누구에겐 진절머리가 나는 얘기지만, 간혹 이런 얘기들을 즐기는 사람도 있나 봅니다.

    어쨌든 지난 10년 사이에만도 수십 가지 정치적 이슈가 F1을 휩쓸고 지나갔고, 개인뿐 아니라 팀이나 조직, 회사에까지 막대한 손해를 끼친 사건도 많았습니다. 1대1의 경쟁도 아니고 다양한 팀이 서로의 이익(승리)을 위해 싸우는데다가, 이를 관리하는 FIA, 운영하는 FOM까지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 보니 심심하면 일이 터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 F1 최고의 리더에서 한순간 가장 불쌍한 인물로 전락한 레드불의 크리스찬 호너 ]

    [ F1 최고의 리더에서 한순간 가장 불쌍한 인물로 전락한 레드불의 크리스찬 호너 ]

    그런데, 당장에라도 사달이 날 것 같은 F1은 용케 대부분 사건을 잘 해결해왔습니다. F1 팀들이 FOM에 반기를 들고 몇 차례나 새로운 스포츠를 만들려고 했을 때,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싶던 순간 묘하게도 합의가 이뤄지고 F1이 살아남았습니다.

    도저히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의견 대립으로 양자, 혹은 3자, 4자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진흙탕 싸움이 이어지다가도, 어느 순간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타협이 이뤄지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쇼의 무대에 올라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한 편의 마술을 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배경이 되는 사회와 문화에 따라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F1에서 보여준 대타협의 마술은 그 비밀이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서로 죽일 놈 살릴 놈 외치면서 멱살을 잡고 싸우다가도, 신기한 타협점을 찾아내는 기술이 무언가 알고 싶습니다.

    관계자들의 평소 얘기와 지난 타협의 결과물을 살펴보면, 대략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선택지와 그 결과들을 비교적 정확히 분석하고, 그중에서 가장 손해가 적고 이익이 많은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죠.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만, 많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F1에서 경쟁하면서 종종 갈등을 빚는 사람들이 어떤 숭고한 정신이나 절대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타협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체의 이익이 최우선이고, F1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식의 생각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 신념을 지니고 있는 쪽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라면 ‘결국 내가 이기는 것’뿐인 셈이죠.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인정하고, 상대에게도 어떤 숭고한 가치를 기대하지 않으면서 협상 테이블에 앉는 덕분에 얘기를 더 잘 풀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특성이 F1의 타협의 마술에서 특수한 비결이 되거나 전부인 것은 아닐 겁니다. 단지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얘기를 들어보면 ‘형식적으로 F1의 가치나 예의와 격식을 갖추는 언급은 하지만’ 결국 내 이익이 우선이고, 내 이익을 챙기려고 협상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자세를 숨기지 않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협상에 해가 될 경우도 있겠지만, 서로가 이기적인 것을 알고 인정하고 테이블에 앉는다면 좀 더 진솔한(?) 대화가 오갈 수 있을 테니까요. 적어도 종교적인 신념을 내세우는 사람보다는 낫겠죠.

    최근 F1의 이슈는 레드불의 파워 유닛, 쉽게 말하자면 엔진 공급 문제입니다.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나갔던(너무 많이 앞서 나갔던) 레드불은 현재 르노의 파워 유닛의 출력 부족에 심한 불만을 표했고 결국 새 파워 유닛으로의 교체를 추진했습니다. 르노가 지난해와 올해 문제가 심하게 많았던 것도 사실이므로 아무도 레드불을 탓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강한 파워 유닛, 엔진을 만드는 메르세데스와 페라리가 모두 레드불에 자신들의 심장을 나눠주기를 거절했다는 거죠. 낙동강 오리알이 된 레드불은 부랴부랴 일 년 넘게 욕만 했던 르노의 문을 다시 두드리는 처지가 됐습니다. 레드불에게 욕만 먹다가 분했는지 팩토리 팀, 즉 자기 자신의 팀을 직접 꾸리기로 결심한 르노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F1에서는 이해 당사자들의 상황에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입니다. 엔진을 가진 메르세데스나 페라리는 ‘약한 엔진을 가지고도 빨랐던’ 레드불에 좋은 엔진을 줘서 자기 팀에게 패배를 안길 결정을 할 리가 없습니다. 르노는 레드불에 배신당하고 새 연인을 찾은 마당에,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고 떠난 것과 마찬가지인 과거의 연인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레드불은 레드불 나름대로 자기들의 기술이 우수한데 엔진이 발목을 잡는 게 화가 날만도 했죠. 레드불이라는 최강 팀이자 대자본을 떠나보내기 싫은 FOM이 구제에 나섰지만, 그렇다고 운영사가 메르세데스나 페라리 등 큰 손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한계도 이해가 됩니다.

    이제 레드불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대타협이 이뤄질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한쪽이 ‘무조건 타협이 돼야 한다’라는 것을 또 하나의 ‘신념’으로 접근하면 이것 역시 협상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죠.

    어쨌든 레드불이 사라질 위기 앞에서 모래시계 속 모래는 떨어지고 있고 진전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마술 혹은 기적이 필요한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과거에 그런 기적이 몇 차례 일어났었기에 포기하기는 이르네요.

    대단한 내용은 없지만, 저는 F1의 타협의 기술에서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나도 이기적이고 남도 이기적이라는 것을 서로 인정할 것. 종교적인 신념에 휩싸이진 않았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볼 것. 그리고 주판을 두드려 가장 현명한 선택을 찾아낼 것.

    왠지 높고 숭고한 목표를 가진 분들은 많지만, 서로 냉정한 타협을 이루는 데는 능숙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배울 게 많은 대목인 것 같습니다. 요즘 뭔가 대타협이란 말에 목마른 저로서는 F1 팀들의 냉정한 타협 과정을 바라보면서 학창 시절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이제는 너무 흔해빠진 느낌까지 드는 경구를 다시 떠올립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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